러시아. 시베리아 횡단 열차
시베리아 횡단 열차, 화장실 앞에 있는 내 자리는,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가끔은 어깨를 부딪치기도 했고, 재수가 없으면 머리통을 맞기도 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정말 살면서 내가 느낀 피곤함은 그동안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며칠 야근? 며칠 밤샘? 노.! 노.!
감히 신에게 왜! 인간들에게 배출용의 출구를 따로 만들었는가에 대해 울분을 토해낼 뻔하면서,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자니, 스트레스와 피곤함 때문이었을까.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본 옆구리의 고통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화장실을 이용할 때마다 힘든 것을 보니 그 출구와 관련된 몸의 어딘가 고장이 난 건 대충 알았으나, 달리고 있는 이 열차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 이 순간에... 또는 “하필”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라던가,
신의 장난 같은 타이밍에 온갖 물음을 던지면서 고통을 감내했다.
***
이 열차칸에는 아시아 인이라고는 나 혼자였다.
다른 칸에는 고려인으로 보이는 동양인들이 있긴 했지만, 몸도 마음도 불편한 이때에, 말이라도 편하게 할 수 있는 한국인이 어딘가 있었더라면, 원수라도 절친이 되었을 텐데 말이지...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주변을 둘러본다.
열차 안 아저씨들의 얼굴은 아침이고 낮이고 구분할 것 없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디 아저씨뿐 만이랴, 나이 불문하고 러시아 남자들은 다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40도가 넘는 보드카를 물 마시듯 들이켜는 러시아인들. 추위에 맞서기 위해서였을까. 이러한 독주를 마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면 이게 독주로 느껴지지 않아서인가.
그때 눈을 마주친 민머리 아저씨가 보인다. 씩. 미소를 지어주는데, 어라라. 이쪽으로 오는 것 같다. 그래. 술에 취했지만, 비틀거리지도 않고, 정면으로 나를 보며 다가오고 있다.
‘아니 이걸, 병 채로.?’
투명한 보드카 한 병을 그대로 건네는 붉은 얼굴에 악의는 없음이 느껴진다.
술도 한잔 했겠다, 혼자 있는 동양인 아가씨의 표정도 안 좋겠다, 순간 이것이 아저씨의 러시아식 위로가 아니었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머리 한 올 남김없이 밀어버린 아저씨는 어쩐지 유명한 격투기 선수를 닮아있었다. 자세히 보니 두꺼운 손등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투박해 보이지만 그 취한 미소도 좋았다. 토끼 눈이 된 나를 보더니, 보드카 병뚜껑에 참새 눈물만큼 보드카를 따라 주었다.
꿀꺽.
우앜.!! 정말 ‘목이 타 들어간다’라는 표현이 이처럼 들어맞는 순간이 있을까.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쓰이도록 만들어진 문장 같았다. 타 들어가는 느낌에 두 손으로 목을 잡고 고통으로 절로 찡그려진 표정으로 아저씨를 올려다보았다.
"크하하하."
아저씨는 큰 웃음 터뜨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변 사람들 모두가 웃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열차 안은 호탕한 웃음소리와 따뜻한 미소로 가득 찼다. 무관심해 보여도 동양인인 아가씨의 반응이 다들 궁금했나 보다.
"헤헤헤. "
이마를 긁적이면서, 나 역시 환한 미소로 답했다.
밝아졌다.
분명 고통은 여전히 실재했으나, 불편도 사그라들고, 주위의 공기가 바뀌었다.
그 한 모금으로, 내면에 변화가 생겼다. 마치 원효대사의 해골물처럼...
무엇이든 마음먹기 나름인 것을,
보드카가 그 촉매제가 된 것이었다!
‘조금 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이 순간을 즐기도록 하자.’
***
열차 여행 중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열차 전용 컵에 온수를 받아서 차나, 커피를 만들어 먹는 일이었다. 생맥주 컵과 같은 커다랗고 두툼한 유리잔에 철로 된 장식과 손잡이가 있어서 어쩐지 투박해 보였지만, 그것 또한 내 안의 러시아 란 나라와 이미지가 맞아서 좋았다. 국민 라면인 도시락 컵라면에 블라디보스토크 마트에서 사 온 깍두기까지 꺼내서 기차 안에서 한 끼를 해결하고 나면 꼭 그 전용컵에 차 한잔을 마셨다.
딱히 할 일도 없어 무료할 것 같았지만, 꼭 그렇지 만도 않은 하루하루였다. 창 밖으로 시선을 두기만 해도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창문의 네모난 프레임 안에서 끊임없이 지나가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러시아 땅덩어리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광활하다는 것을 확인하며 매번 감탄을 쏟아냈다.
비가 와서 온통 그레이 할 때, 그런 잿빛 하늘을 뚫고 햇빛이 쏟아질 때, 생애 끝인 양 저무는 태양이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지평선을 뚫고 광선처럼 쏟아져 나올 때, 그때 잠깐 빨갛게 노랗게 온 하늘을 물들고 어둠 속으로 서서히 잠겨갈 때, 차창 밖의 모든 순간순간들은 마치 수채화의 한 장면 같았다.
자연의 색감이라는 것이, 이토록 안정감을 줄 줄이야...
중간중간 조금 큰 역에 서면 정차 시간이 길어서 열차에서 내려 돌아다니기도 했다. 역 안 상점에서 캔디류를 구입하거나, 빵이나 과자를 팔러 나온 아낙네의 소쿠리에서 어쩌다가 따뜻한 빵 하나를 손에 쥐기라도 한다면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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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카도, 수채화도, 따뜻한 빵도 잠시나마 행복을 느끼게 했지만, 고통은 시시때때로 살갗으로 파고들어 나는 어쩜 기적적으로 버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시라도 빨리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불편한 몸을 폭신폭신한 매트리스에 뉘이고 햇볕에 잘 마른 듯한 하얀 이불을 코 끝까지 올려 덮고서는, 진통제를 한 가득 입 안에 털어 넣고 깊은 잠에 빠져들고 싶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