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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May 18. 2020

중고 LP 음반을 타고 추억 속으로!

오래 전에는 익숙했던...

  남편을 따라 들어간 그곳은 놀라웠다. 가끔 TV에서 ‘아날로그 감성을 찾아서’와 같은 비슷한 제목의 영상을 통해, 과거로 회귀하는 취미생활을 즐기는 이들을 종종 접했기에 이미 다 아는 세상일 거라 짐작했었다.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음악을 듣고, ‘길보드 차트’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저작권에 둔감한, 무지한 시대를 지나 은빛 반짝이는 CD를 경이로움으로 맞이했었다. 다 낡은 MP3는 아직도 화장대 서랍에 있다. 그리고 음원이라는 말이 나오고 디지털 시대가 일반화되며 스트리밍으로 오늘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


 LP라……. 영화 ‘내 마음의 풍금’이 떠오른다. 전도연의 순수한 눈망울과 함께 사랑하는 이를 위해 서툴게 꺼낸 말 “엘프 주세요” (귀 쫑긋 기울여 집중해 들었건만 홍연에게는 ‘엘피’로 들리지 않았다. ) 17살 늦깎이 시골 초등학생 홍연(전도연)이 궁금해하던, 왠지 선생님들(이병헌, 이미연)만의 고급스러운 취미생활일 것 같은 그 너머에 LP가 있었다. LP가 Long Play 약자인 줄은 알고 있었으나 상표명인 줄은 몰랐다. 보통 Vinly로 불린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음악창고’라는 간판을 단 상점 안은 엄청난 양의 LP 음반들로 가득했다. 사방 벽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바닥에도 박스마다 가득 쌓여있었다. 군데군데 붙어있는 포스터는 7080의 분위기를 한껏 풍기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초, 중, 고, 대학생이던 80년대로 돌아가 먼지와 함께 그 세계에 눌러앉아버렸다.    

태광 에로이카

 한 달 전 남편이 시댁에 있던 오래된 전축(이 단어를 아는 사람은 몇 년생부터일까?)을 수리한다며 소란스러울 때까지도 나는 시큰둥하게 남의 일인 양 별 관심이 없었다. ‘태광 에로이카’라니 들어도 너무 오래전 들었던 상표명인데, 어머니는 어찌 그리 곱게 보전하셨을까? 추억의 ‘태광 에로이카’ 오디오는 수리를 받아 곱게 단장한 후 우리 집 안방에 새로운 자리를 마련하였다.

 퇴근 후 남편은 그 전축 앞에 꼼짝없이 앉아 닦고, 틀고, 만지고, 다시 듣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코로나 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자동으로 실천하는 격이 되었다. LP 음반들을 정리한 지 오래되었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창고 상자를 뒤지니 LP 음반 두 개가 나왔다. ‘변진섭’과 ‘사이먼 가펑클’의 음반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생일 선물로 받은 음반 표지에는 20대 귀여운 얼굴의 ‘변진섭’이 있었다. ‘사이먼 가펑클’은 남편이 특히 좋아하던 가수이기에 하마터면 소리까지 지를 뻔했다.

심봤다! 구입한 지 30년이 넘은 LP음반이 집에 있었다.
남편의 취미생활

 그렇게 시작된 남편의 취미생활은 주말 내내 집안에 음악을 흐르게 하였고, 아이들도 안방을 방문하여 소리가 웅장하다며 치켜세우니, 남편은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뿌듯해하였다. 그리고는 몇 주 전부터 중고 LP 음반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서울이 아닌 가까운 곳에 LP 중고 음반을 취급하는 곳을 찾았다며 나가더니 기쁜 표정과 함께 여러 장의 중고 음반들을 들고 왔다. 베토벤 9번 교향곡, 양희은, 배호, 김정호, 최헌, 어니언스, 시인과 촌장, 이글스... 20대 대학시절에도 듣지 않았던 오래전 노래들이 며칠 동안 흘러나왔다. 노래 색깔도, 가수들도, 불리던 시대도 각양각색인 노래들이었으나 하나같이 명반이었다.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를 시작으로 가시나무, 하얀 나비, 이름 모를 소녀, 약속, 안개 낀 장충단 공원, 앵두, 누가 울어,  sound of silence, the boxer, 세노야 세노야, 홀로 된다는 것은... 마치 어느 7080 카페에 앉아 있는 듯했다.

트롯 소년 정동원이 불러 나의 심금을 울린 노래 '누가 울어'의 원곡이 여기서 흘러나오다니...중앙 크게 보이는 얼굴이 원곡 가수 배호이다.
추억의 보석함 음악창고 매장

 그러다 오늘 함께 이곳을 방문한 것이다. “ 어서 오세요. 이쪽은 오천 원, 저쪽은 만 원입니다.”라며 상냥하게 안내해 주던 어느 남자분이 사장님이 아니고 손님이라는 것에 놀랄 즈음 진짜 사장님이 등장했다. 아까 그 주인 같은 손님은 아예 면장갑을 끼고, 안정적인 자세로, 마련된 욕실 의자에 앉아, 음반들을 하나하나 꺼내 턴테이블에 올리며 그 시간 자체를 즐기는 듯했다. 뭔가 마니아의 기운이 느껴지며 고급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나도 남편 따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대충 둘러보았는데 정작 계산할 때 보니 대부분 내가 고른 음반들이 계산대에 있었다. 머쓱한 표정으로 남편을 보니 ‘거 봐 그럴 줄 알았어’라는 눈짓을 보였다.

과거 7080 시절로 돌아가 그때의 정겨움과 추억을 음반으로라도 사고 싶었던 것일까?

 허스키 보이스가 매력적인 ‘이은하’ 음반은 사장님이 저 높은 곳, 이층에서 특별히 찾아내 준 것이다.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초등학교 때 전국을 '밤차'로 휩쓴 유명가수로 알게 되었지만  봄비, 돌이키지 마 등 그녀의 허스키 보이스 매력에 빠져 좋아한다. 앳된 모습이 담긴 귀한 1집 음반을 찾았다. 요즘 ○○ 증후군으로 고생한다는 그녀가 어서 건강을 회복하기를 기원한다.

중고 음반의 또 다른 매력은 누군가의 손탄 흔적을 확인하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짧은 메모나 사인 등을 통해 음반에 스민 스토리를 상상해 본다.

 해바라기 음반은 늘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은 영화 '파파로티'에서도 나를 폭풍 오열하게 했지만 그래도 원곡을 능가할 순 없다. 다섯 손가락의 '사랑할 순 없는지'는 늘 나를 설레게 하는 노래이다. 아픈 사랑의 주인공이 된 듯 나를 낭만적 상황에 빠지게 한다. 임지훈의 '사랑의 썰물'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주었던 사람, 못난 나를 귀하게 여기며 사랑한 사람, 순수한 낭만을 떠오르게 하는 사람들을 생각나게 하는 노래들이니 어찌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년간 잊고 지냈던 노래들이 한 곡씩 담겨 있다.

 노찾사의 노래는 나를 금방 87년 대학 서클실(동아리실)로 데려다 주었다. 문을 열면 언제나 목청 돋워 노래하던 동기나 선배들이 있었다. 기타 소리에 맞춰 대동 단결하던 그때가 살아나 나를 뜨겁게 했다. 30년도 더 된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나를 순수의 세계로 데려다 놓았다. 나는 청년이었다.

역사를 움직인 거국적 인물이 된 듯 목울대가 뜨겁다.

 시인과 촌장의 LP음반도 반가웠다. 지금 보아도 예쁘고 세련된 디자인! 이때 남편과 주로 데이트를 하던 곳도 같은 이름의 커피숍(카페)이었다. 가시나무는 조성모가 리메이크해 히트했지만 역시 난 원곡이 더 좋다.

하덕규와 함춘호의 '시인과 촌장'은 아는 바와 같이 詩人이 아니라 市人이다.
남편이 찾아낸 음반들이다. 역시 명반이다. 시대를 노래하는 음유시인 정태춘, 박은옥 그리고 트윈폴리오 윤형주와 송창식 또한 영화 속 강하늘처럼 청년의 모습이다.
취미생활 한 달째

 코로나 19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사회적 거리두기는 좁혀질 줄 모르니 안방에서의 취미생활도 별 변화 없이 지속 중이다. 아이들은 각자 애정하는 CD를 가져와 아빠와 감상하기도 한다. 둘째와 셋째의 스타 인피니트와 레드벨벳의 노랫소리가 울리는 날이면 얼마 전 동방신기 관련 물품을 정리한 첫째는 괜히 처리했다며 진한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한다. 태광 에로이카로 듣는 CD 음악이 남다르긴 하나보다. ㅎㅎ

 우리에겐 추억을, 아이들에게는 새로움을 가져다준 LP음반들은 나날이 살아나 반짝거린다. 전 세계적으로 닫혔던 Vinyl 공장들이 문을 열고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다니 Vinyl 열풍에 우리 가족도 뒤늦게 올라탄 느낌이다. 

 지지직거리는 음향이 좋다며 LP음반을 찬양하던 아이들은 이번 어버이날 선물로 Queen의 LP 앨범을 선물했다. 대전에 있는 둘째는 좌판에 늘어놓은 중고 LP 더미에서 인이 추천하는 대로 아빠 취향을 저격해 마련했다며 LP 구입 인증숏을 보내오기도 했다. 디지털 스트리밍 음원에 익숙한 20대의 마음도 이렇게 사로잡으니 Vinyl 열풍이 단순 복고풍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겠다. Vinyl 만의 매력에 우리 모두 빠져든 것이다. (영화 맘마미아 1,2 ost를 모두 좋아한다던 우리 아이는 정작  ABBA를 '에이비비에이'로 읽어 우리를 한참 웃게 다.)

둘째가 구입한 LP들도 익숙한 노래이거나 들으면 빠져들 음악들일 것이라 기대해 본다.
LP와 함께 추억 속으로!

 LP 라벨 보호기를 장착하고 세제를 칫솔에 묻혀 꼼꼼히 오물을 닦아내기도 하고, 부드러운 벨벳 천이 덮인 도구로 매번 먼지를 제거하기도 한다.

 책장에서 손때 묻은 책을 고르듣고 싶은 LP판을 고른다. 턴테이블에 LP음반을 올리기 전 최소 3겹의 커버를 확인할 수 있다. 비닐, 종이, 다시 비닐, 그 커버 안에 LP판이 있다.

 상처 나지 않게 조심히 꺼내 턴테이블에 올려 바늘과 만나 돌아가게 해야 음악이 나온다. 물론 A면이 끝나면 B면으로 직접 뒤집어 줘야 하는 한다. 조심히 세워 보관해야 하는 까지! 어쩜 이 수고로운 절차와 과정이  LP 더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잠시 곁에서 멀어진 것들을 다시 가까이하며 즐거워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잊고 지냈던 것들을 다시 꺼내 일상으로 가져온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 또다시 싫증으로, 새로움에 빠져 LP를 멀리한다 해도 그것 또한 자연스러운 흐름의 하나일 것이다. 

끌리는 대로, 내 마음대로, 원하는 만큼 추억에 빠져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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