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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Dec 17. 2019

나를 염려하고 격려해 준 사람들

입원과 퇴원 사이-엄마가 오셨다.

 비가 내린 후 한파가 찾아온다는 일기예보가 마치 나만 모르게 계절이 바뀐 것처럼 생경했다. 나는 아직 늦가을 속에 있는데, 병원 밖은 이제 완전한 겨울인가 보다. 병문안 오는 사람들의 외투가 갈수록 두꺼워지고, 그들이 실어오는 바깥공기는 나날이 차가워졌다.
 늘 다니던 사거리 교차로를 10층 병실에서 시시때때로 내려다본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낮에는 회색빛으로, 밤에는 차량의 은빛과 주홍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병원 앞 사거리는 때론 우울해 보이고, 달리는 자동차들은 침착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들은 알까? 아니 나는 그때 알았을까? 저들처럼 일상으로 다니던 사거리를 환자복 차림으로 하릴없이 내려다보고 있을 줄을, 부러움을 잔뜩 품은 채로 지난 일상들이 온통 감사였음을 끄덕이며 이렇게 서 있을 줄을.


 매서운 겨울바람에 한껏 옷을 여미고 종종걸음으로 바삐 움직이는 병원 밖 모든 이들이 새삼 기특하고 감동적이었다.
 병원 복도 끝에서 끝으로 걷는다. 두 병동을 잇는 사선형 통로를 한참 오르내린다. 내려가는 걸음 60보, 방향 틀어 또 내려가는 걸음 60보, 왕복 300 여 걸음이다. 무조건 걸어야 한다는 수술 다음날 주치의 당부를 철석같이 따르고 있다. 어느 날은 병원 안에서 만보를 걸었다. 그래서일까 수술 당일부터 주렁주렁 매달고 있던 부착물들도 하나 둘 순조롭게 떼어내고 있는 중이다. 이대로라면 예정대로 이틀 후 퇴원할 수 있으리라.

병원 밖을 내다보며 만보를 걸었다.

 지난 10월 내내 병원을 드나들며 여러 가지 검진으로 마음 졸였다. 입원일이 정해진 후부터는 병가 전 학교 업무로 파김치가 되었다. 수업 진도, 2회 고사 출제, 수행평가 마무리, 방과 후 관련 공문처리, 고교 입시 상담 등등. 원래 속도로도 빠듯한 업무 일정인데, 병원 진료로 부득이하게 병 조퇴까지 가끔 해야 하니 일할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병가를 내려다 오히려 병이 깊어지겠다는 말이 무심결에 나올 정도로 정신없이 맞이한 11월이었다.

 그렇게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고 이렇게 퇴원 일을 기다리고 있다. 엄청난 파도를 잘 헤쳐 나와 지친 몸을 잠시 따끈한 해변에 뉘는 것 같다. 수술로 인한 육체적 고통이 웬만해지니 고마운 이들을 챙길 여유도 생겼다.

그간 염려해 주고 격려해 주고 찾아와 준 친구들과 친척들과 이웃들이 진정 고마웠다.


(나의 절친 선배는 눈만 뜨면 내 앞에 나타나 있었다.ㅎㅎ )

누군가는 침상 머리맡에 놓으라며, 누군가는 침대 위에서 읽으라며 주었다.

 먼저 희♡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희♡는 3월에 전학 온 우리 반 아이다. 희♡ 어머니가 이 병원 간호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수술 당일 수술실에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병가를 내면서 가장 미안하고 죄송했던 상대는 당연히 아이들과 학부모님이었다. 충격받을 아이들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학부모님께는 간단한 편지를 보내드렸다. 중요한 시기에 학기 마무리를 다하지 못하고 병가를 낼 수밖에 없는 그간의 사정을 담은 편지에 몇몇 분이 답장을 주셨는데 그중 희♡ 어머니의 격려 문자도 있었다.

 잔뜩 긴장한 채 누워 가족들과 떨어져 수술실 문을 들어서니 모든 것들이 두려웠다. 안경을 벗은 채 더 희미해진 시야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희♡ 어머니의 등장은 엄청난 위안이 되었다. 물론 그분의 보살핌과 따스한 말투가 직업상 환자 어느 분에게나 간호사로서 한 일 중 하나였을 테지만, 나에게는 두려움과 대적할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용기를 주었다. 수술 준비실에서 아는 의료인을 만난다는 것이 어디 흔한 일인가! 게다가 담임교사와 학부모의 첫 대면이 병원 수술실에서 라니. 침대에 누운 나를 온화한 미소로 내려다보며 위안을 주었던 희♡ 어머니가 몹시도 고마웠다.
 오늘 아침운동을 하며 희♡ 어머니와 훈훈한 통화를 이어 가던 중 나는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말았다. 수술 회복실에서 예정 시간보다 2시간이나 늦게 나온 이유를 묻는 중이었다. 가족들은 수술 당일 내가 오랜 시간 회복실에 머물러 있는 바람에 엄청 마음을 졸인 일과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한 궁금함을 연일 화젯거리로 삼고 있었다. 희♡ 어머니 답변은 내가 짐작한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수술 후 마취로 가물거리면서도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합니다.’라는 말을 두어 번 들은 기억이 있기에 진통이 되지 않아 회복실에 오래 머물렀다는 희♡ 어머니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선생님이 엄청 아파했어요, 계속 아프다고 그랬죠.”
 “ 그랬군요. 가슴이 너무 아팠던 기억이 나요. 아무튼 희♡ 어머니 덕분에 정말 든든했습니다. 진짜 감사드려요.”
 “ 선생님, 몸조리 잘하시고요. 쾌차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 네?”

“ 선생님이 그렇게 어머니를 찾으시더라고요, 회복실에서 계속 ‘엄마’를 찾으셨어요. 어찌나 ‘엄마’를 부르시던지……”


 뜻밖의 희♡ 어머니 말에 걸음이 멈춰지고 호흡도 잠시 정지되는 듯 기억이 아득해졌다. 전혀 생각지 못했다. 수술 후 마취가 풀리며 어지러웠던 회복실 분위기를 문득문득 느끼고 있었지만 내가 엄마를 찾으며 울 줄이야.
 가슴이 뜨거워지며 이내 눈물이 차올랐다. 희♡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평생 모르고 지나쳤을 이야기였다. ‘엄마’를 부르며 고통스러워하던 기억 밖 나의 모습을 소환하여 그려보았다. 그때 부르던 ‘엄마’는 늘 외쳐대던 단순한 감탄사가 아닌 분명 ‘방순례 씨, 우리 엄마’였으리라.

아! 엄마가 왔었구나. 내가 이렇게 무탈하게 퇴원할 수 있게끔 엄마는 여전히 애를 쓰고 있었구나. 엄마는 나에게 와 고통에 잔뜩 찡그린 내 얼굴 펴주고, 뒤틀린 내 가슴 바로 잡아주고, 따스하게 손잡아 주며 머물렀었구나. 그리고 예전처럼 식은땀에 젖은 머리 넘겨주며 엄마 냄새 맘껏 맡게 해 주었구나.

 하늘에 계신 ‘엄마’가 다녀갔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투병 중인 엄마로 인해 수시로 드나들던 병원이었지만 보호자가 아닌 환자의 모습으로는 낯선 곳이었다. 어쩜 그때부터 혹은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보고파 우는 일이 점점 드물어진다는 생각에 섭섭했는데 모처럼 그리움의 폭풍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아직도 나는 엄마를 그리워하고 의지하고 있었나 보다.
 희♡ 어머니와의 통화 후 뒷배가 든든해졌다. 허리에 힘이 생기고 어깨가 펴졌다. 조직검사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무조건 긍정적인 생각으로 병원을 나가리라 생각했다. 미리 종양이 발견되어서 다행이고, 악성이 아니라서 다행이고, 마취에서 무사히 깨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고, 의료사고 없이 수술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고, 염려해주고 걱정해주는 많은 이들에게서 감사함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고, 이렇게 지나간 일로 떠올릴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오래되면 망가지고 고장 나는 것이 세상 이치일 텐데 사람 몸이라고 예외이겠는가! 한숨 쉬어가는 길목에서 삶이 더 영글어가고 깊어지고 짙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욕심이 아니라면…….

 나를 염려하고 격려해 준 이들이 있어  다시 일어나 일상 속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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