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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Apr 25. 2023

산책은 나의 힘!

감정의 해우소, 내일을 맞이할 힘을 얻는다.

 비 온 후 날이 개자 놓칠세라 산책을 나갔다. 미세먼지로 며칠을 주저했기에 더 고마운 날이다. 저녁 6시, 햇빛은 충분하고, 겹벚꽃은 만발하여 꽃대궐을 이룬다. 미리 꽃잎을 터뜨렸던 목련과 벚꽃도 여린 이파리로 풍경을 더한다.


 시선을 멀리 떨구고 호흡을 길게 빼내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살랑 부는 봄바람에 강아지까지 대동하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에 귀를 맡기고, 푸르른 나무 사이에서 호사를 누리니 실룩실룩 움직이는 반려견의 엉덩이만 보고 걸어도 '쉼'이라는 단어가 느껴진다. 퇴근 후 이런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니... 소소한 행복감이 밀려온다.


 30여 년, 교직생활 중 당연 꽃길만 펼쳐졌을 리 없건만 아직도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남았었나 보다. 이번 주는 유독 어려운 학교생활을 보냈다. 대부분의 상식적인 학부모와 학생들 속에서 여느 날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단 한 명일지라도 오해와 불신 속에서 받은 상처가 크다. 처음에는 '교권'을 떠올리고 '보호위원회'까지 떠올리며 흥분했으나 그럴 의지도, 교육적 소신도 희미해지고, 또 그런 나를 보고 우울해지고... 이런 기분을 반복하며 한 주를 보냈다.

 세상이 어쩌고저쩌고 말이 많아도 '나는 교사다'라는 당당함으로 교직의 길을 걷고 있다 생각했는데, 예기치 못한 일로 공격을 당하니 한심한 마음이 저절로 들어 자괴감이 깊어졌다. 이 경력에 아직도, 이 나이에 이런 일을, 2009년 생을 어쩌지 못하는, 어찌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진 나 자신을... 버티기 힘들었다.


  학부모는 학교와 교사를 향해, 교사는 교육현장과 학생, 학부모를 향해! 모두 하고 싶은 말이 넘쳐나 하늘을 찌르고 있는 때에,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나는 어디서 헤매고 있는가?


 느긋한 마음으로 한가로이 거니는 게 산책의 사전적 의미라는데, 나의 마음은 지금 어떠한가!


 강아지와 발을 맞춰 천천히 걷다 보니 저 멀리 봄꽃잔치가 한창이다. 사과나무꽃, 모과나무꽃, 라일락... 벚꽃 잎이 떨어진 후 뒤를 이어 전성기를 맞이한 꽃나무들이 철쭉을 배경으로 무리 지어 나타난다. 가까이 가니 나의 나무, 겹벚꽃나무가 얼굴을 드러낸다.

 식물 바보인 나의 눈에 이 귀한 겹벚꽃나무가 들어온 지는... 5년 전 부활절 즈음이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 너무나 아깝게 세상을 뜬 이 선생님, 세 자매를 두고 어찌 가셨을까, 선생님을 보내고 허한 마음으로 처음 마주한 우리 동네 겹벚꽃나무! 봄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도, 한겨울 앙상한 가지로 버틸 때도 이 나무 앞에 서면 선생님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고, 다시 만난 듯 반가운 인사를 건네게 되었다. 어느덧 기쁠 때는 자중을, 우울할 때는 세수하듯 마음을, 정리하고 달래는 멈춤의 자리가 된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어여쁜 겹벚꽃, 나무 앞에 서니... 나의 우울과 고민이 돋아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더니 결국 작아지고 가벼워진다. 죽음 앞에 무엇을 들이대고 크다 할 수 있단 말인가! 낮은 가지 꽃잎에 얼굴을 가까이 묻으며 크게 숨을 들이켠다. 나의 근심이 먼지처럼 가벼워지기를, 나의 시야가 광야처럼 넓어지기를...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자세로 나를 돌아보기를...


 강아지도 한참을 머물며 나를 기다려 주는 듯하다. 마. 인. 드. 콘. 드. 롤! 그래 이렇게 살아있음을, 건강히 지낼 수 있음을, 이리 산책할 수 있음을, 꽃구경으로 호강할 수 있음을, 강아지와 함께 할 수 있음을... 감사히 여기자.

 어찌 모든 것이 완벽할 수 있단 말인가! 옥에 티 정로도 여기고 가볍게 지나치자. 나무랄 데 없이 좋은 것, 옥이라 여기며 교직의 길을 걸어왔다. 교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아이들을 좋아하고, 수업을 재미있다 여기며 살고 있는데, 그깟 티 밖에 안 되는 것에 신경 쓰지 말자! 티끌에 매몰되어 귀한, 옥 같은 많은 아이들의 웃음을 지나치지 말자. 어김없이 겹벚꽃을 마음에 담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한 시간 코스, 산책 길도 중반을 지나친다. 오던 길을 되돌아가며 마음을 정리하고, 아이들에게 종례 때 강조하던 회복적 탄력성을 키워본다. 우울을 딛고 올라오는 힘, 넘어졌으나 다시 균형을 잡고 일어서는 힘, 상처 난 자존감을 치유하고 다시 당당해지는 용기가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몸소 체험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 속에서 상처투성이인 순간순간, 그저 무탈하기만을, 마음이 안전하기만을 바랄 뿐인데도 오늘처럼 유독 어지러운 날은 쉼 없이 나타난다. 더러움, 스트레스, 억울함, 창피함, 후회... 등을 아낌없이 걷어내는 감정의 해우소, 산책!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 자연에 산책을 더하면 내일을 맞이할 힘을 얻는다.


 멀리 가지 않아도, 차려입지 않아도, 화창하지 않아도... 산책은 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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