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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Apr 07. 2023

서른 살 딸이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했다.

올곧은 가르침보다 만만한 엄마의 사랑이 아이를 지탱하는 것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메인 기사로 실렸습니다.


올해 환갑을 맞이하는 남편의 나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내 딸이 서른 살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서른 살이었던 기억이 그리 멀지 않은데, 내 딸이 서른이라니... 놀랄 것도 없는 사소한 일이 나의 인생, 나의 일이 되다 보면 때때로 감탄하고 경이로운 일이 될 때가 종종 있다. 누구에게나 처음인, 서툰 인생길에서 중장년이 되었다고 모든 일이 익숙하거나 무던해지는 것은 아니다.

 

 네 살 터울의 딸 셋을 낳아 기르며 열심히 살았지만, 돌아보니 때때로 아이들에게 상처를 남긴 속 좁은 엄마였다. 건강하게 자라 성인이 된 아이들의 모습이 자랑스럽고 그저 감사한 일이면서도 좀 더 품어주고 기다려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후회로 남는다.

 특히 첫째에게는 더욱 그렇다. 엄마로서 가장 어린 나이였고, 엄마도 엄마를 처음 해 보는 일이라서 서툴렀다고 둘러대도 후회가 깊다. 둘째와 셋째를 키우며 달라진 나의 모습에 당황했으나 끝내 첫째를 품어주지 못한 미성숙한 엄마였다.


 그때는 그것이 중요한 줄 알았다. 아이가 정직하고 성실하게 자라도록,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학교생활을 잘하는 것이, 학업 성적을 유지해서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디서나 예의 바르고 공손하게 말하는 것이... 올곧은 가르침보다 때때로 만만한 엄마의 사랑이 아이를 지탱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나의 확고한 교육관을 지켜내는 사이 정작 아이의 마음을 놓쳐버린 것이다.


 어린아이의 거짓말이나 자잘한 실수를 너무나 엄격하게 다루지 말았어야 했다. 잘못한 부분을 애정으로 가르쳐야 할 것을 아이를 압박하고 수치심을 심어주었다. 어린아이가 거짓말한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것을 가지고 싶었는지를 공감한 후에 잘잘못을 짚어줘야 했는데, 나는 아이를 큰 죄인인양 닦달하는 데 급급했다. 엄마는 냉정한 선생님일 뿐이었다. 실수했지만 눈물 흘리며 반성할 수 있는 푸근한 가슴을 내어주지 못했다. 비슷한 나이에 막내가 같은 실수를 했을 때, 나는 첫째의 엄마와 전혀 다른 엄마였다.


 동생이 둘이나 태어났지만 첫째인 너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믿음을 주지 못했다. 어린 동생들에게 양보하라 배려하라고 일방적으로 이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비교하며 아이 마음에 생채기를 남겼다. 첫째도 엄마의 사랑이 고픈 똑같은 어린아이였을 뿐인데, 알아서 동생들을 챙기는 의젓한 언니였는데 당연하다고만 여겼다. 왜 그랬을까? 어린 막내를 안고 있어도 충분히 첫째에게 따스한 포옹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첫째는 얼마나 허전하고 외로웠을까?


 첫째는 나와의 정서적 유대 끄트머리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며 사춘기를 맞이했다. 야무진 모습으로 선생님의 칭찬을 듣고, 활발한 모습으로 친구들 속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겉으로는 멀쩡한 중학생이었지만 정작 속으로는 부모를 미워하고, 부모를 믿지 못하고, 부모 앞에서는 웃지 않는 아이였던 것이다.


 아이의 사춘기가 최고 절정에 달하고, 급기야 부모와 아이의 관계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 저녁시간마다 큰소리가 오가며 애간장을 태우던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토록 아이가 힘들어하는데 아이의 마음하나 얻지 못하고, 고작 성적만 살피고 있단 말인가!'


 아이를 향해 몸을 낮추어 아이의 마음을 찾아야만 했다. 책을 찾아 읽으며 조언에 따라 아이 마음을 달래 보려 노력했는데 이때 큰 도움을 받은 책 중의 하나가 '아이를 잘 키우는 7가지 퍼즐(팜레오 지음)'이었다. '강요가 아닌 연결로,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아이 키우기'라는 말이 내 가슴을 울렸다. 책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존중, 경청, 유대, 사랑, 연결, 협조 등'의 단어 앞에서 얼굴이 한없이 달아올랐다. 끊어질 만큼 위태로운 아이와 나의 연결고리를 어서 빨리 붙잡아 이어야 했다. 책의 내용에 공감하며, 반성하며, 아이 마음을 열어보려 노력을 기울였다.


 그나마 아이와 나의 관계가 영영 끊어지는 위기는 막았다고 나의 노력을 대단하게 여겼으나, 10년이 지난 후 아이는 말했다. 그때도 자기의 마음은 하나도 열리지 않았다고! 그 후로도 우리의 유대는 겨우 가늘게 이어졌을 뿐이었다. 나는 분명 아이를 사랑하는데, 아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다니... 나는 어디서 헤매고 있는 것일까?


 첫째와 나의 관계가 다시 틀어지게 된 것은 아이가 대학을 졸업할 때쯤이었다. 공교롭게 같은 과를 전공하고, 졸업 후 하고자 하는 일이 겹치는 바람에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가 아는 것이 아이에게 병이 되고 만 것이다. 국어교사를 꿈꾸며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어려움에 처한 아이에게 30여 년 전 나의 임고 준비시간을 들이대며 아이를 또 몰아세웠나 보다.

' 내가 이미 경험했으니 엄마가 잘 안다. 나는 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임용을 준비했다. 기간제 교사와 병행하는 게 합격에 도움이 된다. 등등' 이미 성인이 된 딸아이의 마음을 살피기 전에 내 주장을 펼치기에 급급했으니.... 나는 또 아이를 외롭게 하는 냉정한 엄마가 된 것이다.


 늘 오해하며 평행선을 달리던, 서로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어색해하던 우리가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은 때는 뜻밖에도 모두가 답답해하던 코로나 19 시절이었다. 물리적으로 가까운 공간에 함께 처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 오고 나서야 진정한 대화의 물꼬가 터진 것이다.


 아이와 진정한 대화를 할수록 알고 있다고 생각한 많은 것들을 서로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겁이 나서 더 크게 소리치던 아이를 강심장이라 여기고, 멀쩡한 웃음 뒤에 감춘 좌절을 짐작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은 아이의 순수함을 지나친 차가운 엄마였던 것이다.


잘하지 않아도 사랑받을, 그 자체만으로도 가장 소중한 딸임을 아이에게 전하지 못한 이 어리석음을 어찌할 것인가!


 아이는 나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나의 사랑을 원하는 강한 몸부림이었음을 어렵게 말했다. 기억하는 순간마다 느꼈던 섭섭함을 드러내며 울먹였다. 나는 '미안하다' 사과하고, '사랑한다' 토닥였다. 아이는 그렇게 20대 중반이 되어 울면서 내 품 안에 안겼다. 이제야 아이가 나와 눈빛을 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딸아이가 기간제 교사로 사회에 첫발을 떼면서 우리의 관계는 더 밀접해졌다. 임용준비만으로도 버거운데 일까지 하려니 사회초년생으로서 엄청 힘들었는데, 그때마다 나에게 조언을 구하고, 어려움을 토로하며 마음을 여니, 어느새 나는 믿음직한 선배교사로서, 언제나 응원하는 푸근한 엄마로서 아이 마음에 안착할 수 있었다. 조금 더 부드럽게, 아이가 오해하지 않도록, 사소한 갈등의 기미가 보이면 열린 마음으로 먼저 다가가려 노력하니 아이 마음이 나날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잘잘못을 따지는 엄격한 엄마에서 이해하고 보듬어 주는, 때로는 알면서도 져주는 푸근한 엄마가 되려 하니, 아이는 나에게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했다. 어릴 때 '안돼'라는 말에 금세 굳어진 얼굴로 돌아서던 아이가 '엄마아아아~, 정말요! 왜요? 왜요? 한번 만요~~'라며 귀여운 투정을 부리는 것이다. 치킨 하나 시킬 때조차도 어리광보다는 단념을 취했던 아이가 이제야 나에게 몸을 흔들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치대는 것이다.  


 서른 살, 딸아이가 어리광을 이제야 부리기 시작했다. 아이가 나를 믿고, 온전히 품어주는 엄마의 품 속에서 이제라도 어리광을 부리니.... 마음이 참 좋다. 우리는 제법 잘 어울리는 한쌍의 모녀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https://omn.kr/23es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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