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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Nov 06. 2022

비극으로 가득 찬 10월의 마지막, 11월의 시작

한 사람의 생애가 사라진다는 것

  가을, 또다시 잊을 수 없는 국가적 대참사 앞에서 지난 토요일(10/29) 밤,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인산인해를 이룬 골목 안, 밖에서 심폐소생술, 압사, 위급, 사망까지... 끔찍한 단어들로 가득한 TV 속 현장을 소름이 끼쳐 차마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사망 2명이 150명으로 바뀌어 있었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끔찍한 뉴스 자막이었다.


 일요일(10/30) 오전, 혹시라도 어제 우리 아이들이 그곳에 있었을까? 학교 비상 연락망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이들이 늦잠을 자는 때라 파악이 더뎠지만 다행히 관련 학생은 없었다. 휴~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처참한 이태원 사건 현장으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너무나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TV 뉴스 속, 심폐소생술 장면이 뇌리에 박혀 괴로운 시간을 보낼 때, 얼마 후 내가 또 다른 심폐소생술 현장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학교 비상 연락망을 취하자마자 걸려온 다급한 전화, 오열하는 외숙모 목소리가 심장을 찔렀다. 아! 외삼촌에게 변고가 생겼구나. 몇 년째 지병으로 고생하는 외삼촌의 야윈 모습이 떠올랐다.

  119 구급차를 부른 후, 삼촌 댁으로 급히 차를 몰았다. 이미 응급실로 이송되었을까? 걱정하며 삼촌 집에 들어서니 아까 TV 뉴스에서 봤던 익숙한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섯 명의 구급대원이 삼촌을 에워싸고 번갈아 심폐소생을 하고 있었고, 삼촌은 의식을 잃은 채 낙엽 같은 몸을 뉘이고 마지막 숨을 모으고 있었다. 깡마른 몸은 구급대원의 손길도 버거워 보였다. 등 바닥까지 꺼져버린 가슴은 이미 구원의 손길에서 멀어진 듯 절망스럽게 느껴졌다.  

 

 대학병원 응급실 의사와 영상을 통해 1시간 가까이 구급의료 활동을 하였으나, 끝내 삼촌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응급실로 이송된 후 결국... 생을 마감하셨다. 중환자실에서 단 몇 며칠이라도 버틸 줄 알았는데, 사망선고가 바로 내려지니 황망함에 아찔하였다. 그렇게 나의 작은외삼촌은 세상을 떠나셨다.


 8년 전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나를 위로하고 내 곁에서 모든 일을 처리해 주던 작은외삼촌이 저렇게 허망하게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다. 작은외삼촌은 오늘 74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셨다.


  코로나로 인한 응급실 통제(보호자 1인만 허용)로 출입이 쉽지 않았으나 외숙모를 혼자 둘 수 없었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옆에 앉으니 외숙모님의 통곡소리가 가슴을 에였다. 하나둘 가족과 친척들이 도착하고 장례식장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3시간이 지나도록 응급실에서는 아무런 안내가 없으니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힘들고 답답했다. 나중에 간호사의 안내를 받고 이유(코로나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코로나 검사 결과 음성이어야만 장례를 치를 수 있다. 사망진단이 아직 처리되지 않았다. 등)를 들으니 버틸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다행히 모든 결과가 순조로워 장례식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이틀간의 조문과 다음날 새벽 발인을 거쳐 삼촌을 봉안당에 모셨다. 외삼촌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상조회를 섭외하고 영정사진을 준비하고 음식을 주문하고.... 일련의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상복을 입고 조문객을 맞이하고 입관식에 참석하고 장례미사를 드리며 화장하는 승화원에서 고인과의 마지막 인사를 통곡으로 대신했다.

 한 사람의 생애가 통째로 사라지는데, 시간은 너무 찰나에 머무는 듯했다.  

 

 외삼촌의 특별한 가족사로 오랜만에 만나는 딸들과 실질적 상주 역할을 하는 조카와 외숙모님의 친인척들로 살짝 애매한 장례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고인을 보내는 애달픈 마음은 한마음이었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현명했던 외삼촌이 파킨슨병으로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아픔 없는 그곳에서 영생을 얻으리라, 기도드렸다.


 월요일 화요일, 장례식장에서 간간히 들여다본 이태원 참사 관련 기사는 갈수록 끔찍하고 처참했다. 장례식장에서의 통곡소리와 이태원에서의 비명소리가 겹쳐 들렸다. 어찌 이런 일이 또 생길 수 있는가!

 돌아보니 공교롭게도 국가의 대참사 때마다 같은 해에 가족을 잃어버렸다. 1995년 6월, 삼풍이 붕괴된 해에는 교통사고로 오빠를 잃었고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때는 겨울에 엄마를 여의었다.

 

 선진국에 들어섰다고 자만한 마음이 콧방귀로 나왔다. 결국은 인재였다는 사실이 정말 아프게 느껴졌다. 반성하고 메꾸고 또 터지고... 그러는 사이 너무나 소중한 생명들이 사라졌다. 되풀이되는 참사 속에서 슬픔과 분노와 안타까움이 널뛰기를 하고 있다.

  사고와 지병으로 가족을 잃어도 평생 한으로 남아 극복하기 힘들다. 건강한 애도기간을 거친다 해도 감당하기 힘든 상실감으로 자주 휘청거린다. 그런데 하물며 국가적 대참사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거나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참담함은 어떠하겠는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미리 예방할 수 있었던 국가적 재난에 대한 분통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지병으로 고생하던 70대 삼촌을 잃고 이틀 동안 장례식장에서 그렇게 많이 울었는데, 아무 잘못 없는 청춘들을 맥없이 '압사'라는 처참한 단어 아래 잃어버렸으니 이 슬픔을 또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가슴이 두 방망이로 쿵쾅거려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다.

 2022년 10월의 마지막, 11월의 시작이 비극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이미지 출처- 다음 이미지
이 글은 오마이뉴스 메인에 기사로 실렸습니다.

https://omn.kr/21i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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