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기다리거나 예측 가능한 내용물이 담긴 것이 문 앞의 택배 상자인데, 퇴근 후 집에 오니 짐작할 수 없는 상자가 놓여 있다. 제법 묵직한 상자를 들어 보니 강화도에서 보낸 고구마였다. 아! 선생님, 입에서 짧은 탄성이 나왔다.
올해도 벌써 12월 한 달만을 남긴 채 저물어 가고 있고, 찬바람 부는 겨울이 시작되어 마음도 몸도 쓸쓸하고 허전한데, 선생님은 또 이렇게 나의 마음을 챙기시는구나! 상자를 들어 주방으로 옮기는 중에 벌써 내 마음은 푸근하게 데워지고 있었다.
은사님과의 인연
제자에게 고구마를 보내는 일, 담임선생님께 상자째 고구마를 받는 일이 어디 흔한 일인가! 기꺼운 마음으로 추억에 젖어 선생님을 떠올려 본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보잘것없는 실력의 글짓기를 취미로 키우고, 문학의 힘과 정의로운 가치를 믿고 따르며 고교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선생님 덕분이었다.
인연의 시작을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야 할 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선생님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마음은 늘 가슴속에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을 좋아하고 따르는 수많은 아이들 중 하나였지만, 선생님은 나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가난하고 초라했던 그 시절,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불투명한 미래로 방황하던 질풍노도의 시기에 선생님은 빛나는 나의 멘토가 되었다. 선생님의 사소한 훈화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고, 선생님의 지혜와 지식에 무한한 감동을 느끼고 심지어 선생님의 필체까지 따라 하는 바라기가 되어갔다.
졸업을 하고 교사가 되어 간간이 소식만 전해 드리다, 선생님의 정년퇴임 때쯤, 연락을 드려 다시 뵙기 시작했다. 선생님 건강이 좋지 않아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현명함과 지혜로운 모습은 여전하셨다. 선생님 댁을 방문했을 때 내가 좋아하는 시인과 시, 내가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 나의 성향과 생각이 선생님의 취향과 겹쳤을 때 그것만으로도 마냥 기뻤었다.
코로나19 시기에 선생님을 뵙지 못하고, 이런저런 일로 연락도 드리지 못한 채 수년이 흘렀는데 이렇게 오늘 고구마 상자를 받은 것이다. 죄송한 마음으로 전화를 드리니 역시 밝은 목소리로 웃음을 주신다.
지병이 악화돼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최근에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는데 절대 우울한 빛을 드러내지 않는다. 당신의 힘듦과 고통을 내색하지 않으시니 마음이 더 어려워진다. 선생님의 건강을 기원하며 전화를 끊고 고구마 상자를 여니 고구마 밭에서 환하게 미소 지었을 선생님 얼굴이 그려진다.
스승과 제자, 입장 바꿔 보니
지난주(11월 넷째 주)에 2022년 교원능력개발평가 결과가 마무리되었다. 교원의 지도능력 향상 및 전문성 강화라는 취지아래 10여 년 이상 교원 평가가시행되고 있다.
교사로서 나는교육은 물건이 아닌 사람을 다루는 일이며, 학생의 배움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언제든지 혹은 10년 후 먼 미래에도 나타나는 것이라역설하며 이 제도를 부정해 왔다. 교사와교육의특수성을 잊은 채, 획일적으로, 성과주의로 만들어진 평가문항과그 결과 활용이늘 마뜩잖았다.
그런데 오늘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고구마 상자를 보며 다시 교사와 평가, 학생을 이어 생각해 본다. 내가 선생님을 생각하는 제자의 마음으로, 또 우리 2학년을 가르치는 국어교사의 생각으로 배움, 스승, 제자, 평가, 교육, 학교, 교실 등의 의미를 되돌아본다.
누구도 함부로 예단할 수 없고, 쉽게 예측할 수 없는 백년지계, 교육 현장, 그리고 배움!
나의 평가에 관한 서술형 문장을 보며 아이들과 학부모의 메시지에 귀 기울인다. 칭찬에 감사하고, 바라는 바를 되새기며 교사로서 성찰의 시간을 가진다.
오래전 나의 선생님은 종업식날,반 아이들에게 엽서를 주시며 학년을 마무리하셨다.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진심을 담아 썼을 소중한 글귀! 그때 나의 엽서에 선생님이 손글씨로 쓴 문장이 아직도 선명하다.
어둠이 머무는 것은 빛이 올 때까지란다. 빛이 되기 바란다. 어깨를 펴고 활짝 웃어라.
선생님의 바람대로 나는 빛이 되었다.내가 그토록 원하는 일(국어교사)을 하고 있으니 선생님의 예언(?)이 꼭 들어맞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 왔다. 제자의 어려움과 고민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본 선생님의 주문이기에 마땅히 따를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스승과 제자, 교사와 학생의 자리를 바꿔 앉아보며 교사로서 나의 길을 다듬어 본다. 나도 아이들 가슴에 푸근한 추억 속 선생님이 될 수 있기를, 아니 최소한 부끄러운 상처는 되지 않기를 다짐해 본다.
건조한 느낌의 교사가 아닌 따스한 자리 품어 줄 선생님이 되고 싶다. 나의 은사님이 그러하셨듯이.... 겨울이 더 깊어지기 전에 선생님을 찾아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