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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익상 Feb 18. 2024

1장 탐구의 목표를 정의하기 7

벽돌책 쓰다듬기 1 <존재양식의 탐구>

[세 번째인 종교적 유형의 “통과” 덕분에 연구자는 가치를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를 알 수 있다]

아, 6에서 세 번째 유형을 [NET]으로 이해했는데, 아닌가?


정보원들이 애착하는 가치들을 명시specify하는 것은 왜 그렇게 어려울까? 영역들의 본성에 대한 암시는 왜 희미한가? 요는 이것이다. “왜 근대인들 사이에서 이론은 실천과 그렇게 동떨어져 있는가?” 가령 법 이론과 과학 이론에서 법과 과학의 궤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다년간의 현장 연구에서야 겨우 그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론은 의미가 있어야 하고, 이론과 실천 사이의 간극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역할인가?”

새로운 유레카 순간. 교회라는 제도가 지금껏 자신을 이루는 모든 것을 변형했으면서도, 자신에 대한 충실이라는 문제에 집중해 왔다는 것이 힌트가 될 것이다. 교회가 보여주는 통과의 세 번째 예.{이건 11장 가야 알려줄 것처럼 써 뒀다.} 사제와 주교, 개혁가, 신도, 은둔자가 스스로 필요하다고 믿는 혁신이 “충실한 영감인지 불경한 배반인지” 고민하는 공백hiatus이 거기에 있다. 과거에 대한 충실성과 성공(번성)을 위한 혁신의 필요성 사이에서 차이를 발견하려는 노력들 - 설교, 공의회, 재판소, 논쟁, 성인들, 심지어 범죄를 통해서까지 - 에 에너지를 잔뜩 쏟은 것이 바로 교회라는 제도인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통과다. 외부적 시선에서 불합리한 추론인 불연속성(늘 새로 시작해야 하고 늘 위험한)의 식별로 인해 얻어지는 새로운 연속성이다. 법적, 과학적 통과가 해당 장르 내에서 이해불가능한 변형으로 보인다면, 종교적 통과는 아예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의 것이다.(인가?) 그래도 다른 통과들과 비교는 해야 한다. 아무리 이상하더라도 그러한 궤적의 이동 자체가 어떤 정보원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가치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충실한가 충실하지 않은가.” 그것은 종교 영역의 많은 정보원들에게는 “삶과 죽음, 구원과 저주의 문제”다.


으으 좀 어렵구나.


p. 75~77


색인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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