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즈카 오사무의 것이 아닌 <파이돈>

<샌드맨> 보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올림.

by 조익상

<샌드맨> 드라마 마지막 시즌에서 너무 멋진 장면을 보다 옛 글이 생각났습니다. 이 장면을 이해하시려면 시즌을 쭉 달리셔야... 암튼! <만화비평: 웁'스> 10호(2023.10 발행)에 실었던 글을 옮겨둡니다.

<샌드맨> 시즌 2 - 11화에서 길버트. 웁니다.




데즈카 오사무의 것이 아닌 <파이돈>

k742936775_1.jpg <만화비평: 웁'스> 10호 표지



데즈카 오사무와 <파이돈>


“일본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1928~1989)의 신작이 사후 31년 만인 지난 27일 발표됐다.” 2020년 3월 2일자 조선일보 기사의 첫 문장이다. 데즈카는 1989년 사망했는데 신작이 나왔다고? 소위 ‘신작’의 제목은 <파이돈>. 하지만 유작은 아니다. 데즈카의 숨겨진, 혹은 알려지지 않은 작품으로 몇몇 작품이 화제가 되었던 바 있지만 <파이돈>은 거기도 해당되지 않는다. ‘신작’이라는 속임수가 담긴 저 기사의 제목은 <AI로 부활한 ‘만화의 神’>이다. 말인즉슨, 데즈카 오사무가 AI로 부활해 ‘신작’ <파이돈>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물론 너무 많이 틀렸으니 확실히 짚고 시작하자. <파이돈>은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이 아니다.


8O04iUnpBNwzUQ3uazNYvlJdB0m6DRyezbIwnydh.jpg 고단샤판 단행본 표지(출판 잡지에는 키옥시아판 전편 표지가 고단샤판으로 잘못 표기되어 들어가 있다. 너무 늦게 확인해 고치지 못했다)
<파이돈>은 전후편으로 나뉘어 <소년 매거진>에서 우선 발표된 후, 고단샤에서 단행본 한 권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키옥시아(KIOXIA) 홈페이지에서도 무료로 감상 가능하다. 현재 무료로 감상 가능한 링크: https://www.kioxia.com/ja-jp/insights/tezuka2020-2-202002.html 정식 한국어 번역본은 출간되지 않았다.


고단샤판 표지에서도 명확히 밝히고 있지만, <파이돈>은 「TEZUKA2020」 프로젝트의 작품이다. 부제는 “AI로 도전하는 데즈카 오사무의 세계.” 「TEZUKA2020」은 데즈카 오사무가 아니고, 그 부활도 아니다. 다만 책 소개는 이런 질문으로 시작한다.


“만약 데즈카 오사무가 살아서 만화를 계속 그린다면 어떤 만화를 그릴까?”


<파이돈>은 그에 대한 「TEZUKA2020」의 답이다. “「TEZUKA2020」은 방대한 양의 데즈카 작품의 스토리와 캐릭터를 추출해 AI에 학습시키고,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세계 최초로 AI가 제작에 참여한 만화를 탄생시켰다.”(https://www.kodansha.co.jp/comic/products/0000343815)


이 소식은 일본은 물론 한국에도 전해졌고, 앞선 기사처럼 데즈카의 ‘신작’이라는 설레발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강조해 두자. <파이돈>은 데즈카의 작품이 아니다. 데즈카의 작품을 학습한 AI가 참여한(=AI를 ‘활용’한) 작품일 뿐이다. 참여한 부문은 크게 스토리와 그림(특히 캐릭터). 데즈카가 썼을 법한 스토리와 데즈카 화풍이 반영된 캐릭터를, AI를 통해 ‘어느정도’ 구현했다. 당시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화제였지만, 이제 3년이 지났다. 챗GPT와 미드저니를 비롯 생성AI가 엄청난 관심을 받고 있는 지금 시점에 <파이돈>을 읽는다면 어떨까?



「TEZUKA2020」의 <파이돈> 읽기


현재 시점에서 <파이돈>을 볼 때, 우선 AI를 활용해 스토리를 만든 점은 돋보인다. 현재 만화와 일러스트 등 시각 예술 장르에서 AI가 주목받고 있는 지점은 주로 그림이다. 소설이나 영상 시나리오로 스토리 생성이 시도된 바 있지만, 만화에서는 무척 드물다. 데즈카처럼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보유한 작가의 스토리 스타일을 반영하는 데 성공해 마치 데즈카가 만들었을 법한 이야기를 생성했다면, 그것은 지금 시점에서도 대단한 일이다.


반면 <파이돈>의 그림은 AI의 함량이 너무 적다. <파이돈>의 선화는 인간이 한 것이다. 2020년의 기술로는 스케치로 활용할 정도로밖에는 그림의 질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 단순히 그림의 퀄리티가 아니라 만화의 인물이나 배경의 일관성으로 논하자면 지금도 어렵다. 미드저니나 스테이블 디퓨전 같은 이미지 생성 AI가 엄청난 능력을 뽐내는 시절이지만, 같은 인물을 두 장 생성했을 때 같아 보이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아마 그런 문제들까지 포함해 「TESZUKA 2020」도 그림은 사람이 그려 마무리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을 것이다.


KakaoTalk_20230726_143423105_03.jpg 키옥시아 홈페이지에 소개된 '플롯 생성 순서'
출처: https://brand.kioxia.com/ja-jp/articles/article17.html

번역:

플롯 생성 순서

좌상-플롯 데이터베이스 작성 / 우상-플롯 작성

-왼쪽부터-
데즈카 만화 플롯화 -> 데즈카 만화 플롯의 추상화 -> 데즈카 만화 플롯에의 파라미터 부여 -> 데즈카 만화 플롯의 일반화 -> 플롯데이터베이스에 데즈카 만화 플롯을 저장 -> 데즈카 만화 스토리 파라미터 설정 -> 파라미터에 따른 플롯 샘플 선택 -> 출력 플롯 조사(의미의 연속성) -> 플롯 생성과 출력


그렇다면 그림은 논할 계제가 아니다. 사람이 데즈카의 그림체를 따라 만화를 그리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니, 결국 논할 것은 스토리다. 2030년의 미래를 배경으로 주인공인 파이돈이 의뢰받은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것을 골격으로 하는 <파이돈>의 이야기는 과연 데즈카스러웠나? 부분 부분은 꽤 그렇다.


우선 주인공 파이돈부터가 데즈카 만화 캐릭터의 조합물처럼 보인다. 의안을 끼면 능력과 인격이 달라지는 변신 모티브는, <세 눈이 간다(三つ目がとおる)>(1974~1978 연재, 국내 미발매)의 주인공 샤라쿠 호스케가 이마에 있는 세 번째 눈에서 반창고를 떼면 성격이 달라지고 능력이 개화되는 것과 흡사하다. 사건 의뢰를 거절하려다 보상에 눈이 멀어 승낙하는 것은 블랙잭과도 비슷하고, 완벽한 변장 능력은 <칠색잉꼬>(1981~1982 연재, 국내 정발)의 주인공과 닮았다. 또한 이야기의 주제의식이나 메시지도 데즈카스러운 면이 보인다. 기술 발전의 위험성을 극도로 경계하는 것이 그렇다. 극중 파이돈의 대사, “언어를 가지고 사고하며 자연의 폭거를 이겨내고 병을 치료하는 법을 아는 인간. 그러나 극에 달한 정교한 기술은 때로는 선에 때로는 악에 닿는다. 오만한 이의 행위가 나라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이를 지적하고 있으며, 이야기의 플롯이 최종적으로 가닿는 결말도 이와 궤를 함께한다.


이처럼 비슷한 캐릭터와 주제의식, 그리고 플롯은 데즈카 만화 130편의 스토리를 AI가 학습한 결과물이다. 후배 만화가이자 2020년 당시 일본만화가협회 회장이던 치바 데쓰야도 이런 지점에서 “<도로로>, <블랙잭> 등 데즈카 오사무 씨의 피가 들어있는 캐릭터”에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을 것이다.(https://encount.press/archives/28092/)


<세 눈이 간다>의 샤라케가 반창고를 떼면 다른 인격과 능력이 깨어나듯, 파이돈 역시 의안을 끼우면 ‘변신’한다.


하지만 닮았다고 해도 데즈카 만화로 인정할 만하지는 않다. ‘데즈카스럽다’에는 최소한 두 층위가 있다. 얼마나 비슷한가, 그리고 얼마나 데즈카의 작품 수준에 육박하는가. 후자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야기의 밀도나 상상의 날카로움은 데즈카 만화 가운데 범작 수준 혹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령 <파이돈> 단행본에 포함된 데즈카의 1982년작 단편 <서스피션–파리채>만 해도 <파이돈>보다 더 치밀하고 강력한 설정과 이야기를 보여준다. 주인공은 AI 요리 로봇을 이용해 아내를 죽이려고 계획한다. 요리 로봇의 촉각 센서와 냄새 센서, 감습 소자, 자동 자외선 소독 기능 등에 대한 설정들이 빼곡하고 그것을 주인공은 살해 계획을 실행하는 데 활용한다. 이에 비하면 <파이돈>의 해양 에너지 발전 기술이나 그 문제점 등은 성기고 헐거우며 이야기에서 겉도는 면이 있다. 요약하자면 <파이돈>은 ‘데즈카스러움’의 외피는 걸쳤을지 모르지만, 그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KakaoTalk_20230727_155242638_02.jpg 데즈카 오사무의 1982년작 <서스피션–파리채>



「TEZUKA」의 작품을 누가 원하는가?


「TEZUKA2020」의 주역이었던 데즈카 마코토(데즈카 오사무의 장남)는 올해 가을에 「TEZUKA2023」의 이름으로 <블랙잭>의 새로운 에피소드를 준비하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2023년 11월에 출간했다] 스토리와 작화에 사용하는 AI는 각각 GPT-4와 스테이블 디퓨전으로, 현재 가장 뛰어나다고 할만한 생성 AI다. 인간과 AI가 일손을 어떻게 나눌지 확실치 않지만, 2020년의 <파이돈>보다는 AI의 비중이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번에도 칸 나누기나 대사 등의 세부는 인간 ‘크리에이터’가 담당한다고 하니, <파이돈> 때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더 궁금한 것은 따로 있기도 하고.



KakaoTalk_20230726_143423105_04.jpg 「TEZUKA2023」 제작 흐름
번역:

좌부터
크리에이터 – 지시 –
(우상) GPT-4 대략의 스토리
(우하) 이미지 생성 AI - 캐릭터의 얼굴, 콘티

출처: https://www.nhk.or.jp/shutoken/newsup/20230613a.html


내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AI의 <블랙잭>을 원하는가? <블랙잭>의 새로운 에피소드는 데즈카의 작품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TEZUKA2023」의 것이다. 데즈카의 저작권을 양도받은 장남이 있기에 가능한 프로젝트. 그들의 저작권 행사에 의해 데즈카의 작품들은 AI에 학습되고, 그 과정을 거쳐 파인 튜닝된 AI는 마치 ‘부활한 데즈카’처럼 논해진다. ‘데즈카스러운 만화의 구현’이 관심받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정신 차리고 보면, 데즈카 본인은 더이상 작품활동을 할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이 있다. 이를 무겁고 진지하게 받아들인 채로, ‘데즈카스러움’이 남아 있는 모양새를 생각해 보자.


근 20년을 생각해 보면 ‘데즈카스러움’의 유지는 「TEZUKA」가 아니라 그 후배들이 성공적으로 이어왔다. 우선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플루토>가 의미 있었다. 돌아간 선배의 캐릭터와 이야기를 후배가 이어간다는 의미가 거기에는 있었고, 두 만화가의 콜라보레이션이라고 부를만한 일이 되었다. 결과물도 데즈카와 우라사와 두 만화가의 이름이나 독자의 기대에 부끄럽지 않았다. 최근 애니메이션이 방영되고 있는 <AI의 유전자>(야마다 큐리 만화)도 <블랙잭>의 21세기판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AI 휴머노이드를 치료하는 냉정해 보이는 인간 의사가 주인공이다. 이 작품에서 나는 데즈카와 <블랙잭>을 향한 일본 만화계의 존경심과 저력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다시, AI의 <블랙잭>을 원하는 것은 누군가? 독자보다는 저작권자가 아닌가? 이미 소유한 저작물을 통해 새로운 수익을 찾는 21세기의 방식. 정당한 저작권 행사이기에 왈가왈부는 어렵다. 데즈카가 살아있었더라도 AI에게 자신의 캐릭터와 이야기를 내맡겼을지는 의문이지만, 알기 어려운 일이다. 데즈카가 죽기 전에 이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부활을 허락했을까? 역시 모른다. 하지만 데즈카 사후의 일본 만화를 이어가고 있는 것은 데즈카의 후배 만화가들이고, 그들 가운데 데즈카에게 영향받고 그를 닮은 작풍으로 출발해 그를 넘어서고 잇고자 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 ‘데즈카스러움’은 이들을 통해 살아있다. 데즈카의 것이 아닌 <블랙잭>보다 데즈카 후배의 <AI의 유전자>를, <플루토>를 독자들은 더 바라지 않을까?


2023년 7월

조익상 | 만화평론가, 문화연구자. <웹툰 내비게이션>(냉수) 등 공저. 합정만화연구학회와 캣츠랩(CATSlab)에서 동료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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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즈카 후배 만화가들의 ‘데즈카스러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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