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에 남아 있는 한숨

불편함을 기록합니다.

by 왕태일


회의는 늘 비슷하게 시작한다. 문이 닫히고, 노트북이 켜지고, 화면에 자료가 뜬다. 누군가는 물을 마시고, 누군가는 펜을 꺼낸다. 그리고 꼭 한 명이 아직 아무 말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먼저 한숨을 쉰다. 짧은 것도 아니다. 길고 진하다. 듣는 사람까지 피곤해지는 한숨이다. 그 순간 회의실 안 공기가 먼저 내려앉는다.


누군가 말을 꺼낸다. 이번 프로젝트 방향을 다시 보자고 한다. 전략을 바꿔보자는 얘기가 나오고, 콘텐츠 흐름을 다시 짜보자는 말도 붙는다. 아직은 가능성과 아이디어의 시간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꼭 누군가가 너무 빠르게 입을 연다. “이거 또 해야 해요?” “예전에 해봤는데 안 됐잖아요.” “클라이언트가 좋아할 것 같진 않은데요.” 말은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너무 빠르다. 검토보다 먼저 나오고, 생각보다 먼저 나온다.


이상하게도 그런 말은 금방 번진다. 누가 크게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회의실 표정이 비슷해진다. 고개가 조금씩 숙어진다. 자료를 보던 눈이 멈춘다. 누군가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누군가는 펜을 내려놓는다. 차이는 대단한 반대 의견이 아니라 한숨 하나, 말 한마디, 귀찮다는 표정 하나에서 시작된다.


나는 이런 순간이 늘 아깝다. 회의는 원래 정답을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다. 아직 모르는 걸 가지고 이리저리 굴려보는 자리다. 말이 조금 허술해도 괜찮고, 아이디어가 조금 과해도 괜찮다. 원래는 그런 상태에서 시작해야 뭔가가 나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초입을 제일 먼저 끊어버린다. 아직 형태도 없는 생각 앞에서 먼저 피곤함을 꺼낸다. 그러면 회의는 더는 회의가 아니다. 답을 찾는 시간이 아니라, 굳이 안 해도 되는 이유를 모으는 시간이 된다.


가끔은 웃기다. 불평이 의견처럼 쓰일 때가 있다. “현실적으로 보자는 거죠.” “괜히 일만 키우는 거 아닌가요?” “효율적으로 가자는 뜻이에요.” 말은 늘 그럴듯하다. 그럴듯해서 더 막기 어렵다. 그런데 조금만 더 듣고 있으면 알게 된다. 그건 정말 현실 점검이라기보다, 하기 싫다는 마음이 먼저 올라온 말이라는 걸. 어떤 말은 내용보다 냄새가 먼저 난다. 회피의 냄새, 피로의 냄새, 이미 귀찮아진 사람의 냄새.


광고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이런 데 더 예민해진 건지도 모르겠다. 기획은 원래 처음에 좀 허술하다. 멋진 문장보다 어설픈 말 한 줄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 그 전 단계에서 자꾸 불평이 먼저 나오면 사람들은 아이디어를 내기 전에 자기검열부터 하게 된다. 이거 말했다가 또 잘릴 것 같은데. 굳이 꺼냈다가 분위기만 더 무거워지겠는데. 그렇게 회의실은 점점 조용해진다. 말이 적은 사람이 생기는 게 아니라, 말을 접는 사람이 늘어난다.


나는 불평이 많은 사람을 볼 때마다 꼭 한 번은 이해하려고 한다. 왜 저렇게 되었을까. 원래부터 부정적인 사람인 걸까. 아니면 오래 일하면서 너무 많은 실패를 본 걸까. 기대했다가 꺾이는 일을 여러 번 겪고 나면, 차라리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는 쪽이 덜 힘들 수도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조금 안쓰럽기도 하다.


그런데 이해와 불편은 같이 간다. 이해가 된다고 해서 덜 거슬리는 건 아니다. 회의실에서는 개인의 피로가 집단의 공기가 된다. 그 사람 한 명이 지친 건 사실일 수 있지만, 그 지침이 회의 전체를 눌러버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사람들은 더 조심해지고, 더 안전한 말만 고른다. 그러다 보면 회의는 늘 비슷한 데서 끝난다. 새롭지 않지만 무난한 안. 크게 틀리진 않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안.


한숨은 말이 아닌데 말보다 오래 남는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도 그 공기가 남아 있다. 자료는 닫히고, 사람들은 각자 다음 일정으로 흩어진다. 그런데 그날 회의가 무거웠는지 가벼웠는지는 다들 안다. 회의실에서 남는 건 문장보다 분위기라는 것. 그리고 어떤 분위기는 정말 별것 아닌 한숨 하나에서 시작된다는 것.


오늘 회의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자료 첫 장이 넘어가기도 전에 누군가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아, 오늘 회의 쉽지 않겠구나 싶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아이디어는 몇 번 나오다 말았고, 분위기는 좀처럼 올라오지 않았다. 회의는 끝났지만 공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 한숨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나는 그런 한숨이 불편하다. 아이디어를 부정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의 기세를 먼저 꺾기 때문이다. 회의실에 남아 있는 건 늘 자료가 아니라 공기다. 그리고 어떤 한숨은 생각보다 오래 간다.


사실 위의 내용은 ‘소설’이다. 하지만 크게 다를 건 없다. 리더의 위치인 나도 경험하는 일이다. 각색했을 뿐, 불편하다.


「불편함을 기록합니다」

EP. 08 회의실에 남아 있는 한숨


왕태일DR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