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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22. 2020

갠지스 강에서의 이별

"하긴 모든 강이 인간의 고향이지. 다 물에서 태어났으니까. 또또 네가 자란 밥통도 물 속이란다. 넌 열 달간 그 속에서 세상에 나올 준비를 했지."  
"그래서 내가 목욕탕을 좋아하는 거 아냐?"
225p, <인도로 간 또또>, 강석경


인도 유학 도중 아버지의 갑작스런 부고를 전해들은 또또의 엄마 선덕은, 어렵사리 유학을 떠난 딸이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았던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ㅡ모든 장례 절차가 끝난 뒤에야 자신에게 연락이 왔음을 알게 되었고,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몹시 괴로워한다. 직접 만든 음식과 진솔한 대화를 통해 그런 선덕의 마음을 위로하는 쟝.

이윽고 엄마와 또또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갠지스 강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예기치 못했던 할아버지와의 이별과, 갠지스 강가에서 마주한 풍경들을 통해서, 다시 치와울라 마을로 돌아가는 날의 또또는 어느새 한 뼘 성장해 있다.

처음 이 책을 읽은 해가 1994년. 아직 외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다. 나는 고작 여덟 살이었다. 불과 몇 년 후, 97년 3월의 봄에, 동작구의 배드민턴 대회를 석권할 만큼 누구보다 건강하셨던 할아버지가 암으로, 맥없이,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의 투병은 길지도 못했다. 누구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없었던 짧은 기간이었다. 전화를 끊은 엄마가 흐느껴 울던 장면을 잊지 못한다. 할머니, 엄마와 이모들, 외삼촌. 우리들. 모두에게 처음이었던, 낯선 이별.


학교를 며칠이나 빠지고 머물렀던 장례식장과 대절 관광버스, 관을 싣고 가는 내내 주문처럼 반복되던 찬송가 가사. 할아버지를 땅에 묻고 돌아온 날 밤, 외갓집 안방에서 나 혼자 덮었던 할아버지 이불의 감촉은 웬지 으스스했고 쉽게 잠도 오지 않았었다. 어쩌면 그땐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어린 날의 나는 이 책을 읽고 또 읽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이불을 덮고 누웠던 그 밤처럼, 또또가 나나와 이별하는 꿈, 소설의 마지막 결말 부분에서 어렴풋한 슬픔을 느낄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2001년에는 외할머니가, 2006년에는 공도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고등학생이었고, 대학생이었던 나는 영정 사진 속의 할머니도, 운구차도, 입관식도 더 이상 으스스하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책 속의 인도를 만난 십삼 년 만인 2007년 여름, 나는 버킷 리스트처럼 간직해 온 갠지스 강에 도착했다. 십 년 전 소설에서 읽었던 풍경은, 활자 그대로였다. 희뿌연 강물에 몸을 씻는 사람들. 다른 한쪽에서는 시신을 태우는 연기가 끝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섞여 가라앉아 있을 강물 위로, 나도 꽃잎에 싸인 불꽃을 띄워 흘려보냈다.

그때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흘러가는 꽃불을 바라보았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버킷 리스트였던 인도 여행도, 갠지스 강도 동화책처럼 아름답지는 않았다. 하지만 삶과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에 닿아 있는 것인지를, 적어도 그 강물에 몸을 담글 수 있는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인도에서 돌아온 해에, 나는 한동안 앓고 있던 신경증과 우울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이듬해가 되어서는 뜨겁게 연애도 하고, 사회로 나갈 희망찬 준비를 시작했다.

몇 년 후 젊음의 절정에서 결혼을 하고, 새로운 생명인 아이를 낳았다. 어느덧 내 나이도 서른을 훌쩍 넘겼지만, 매일이 푸르른 여름날 같은 아이를 바라보며 흘러가는 시간을 잊고 지낸다.

잠들지 않는 시간이면 생각이 이어지는 것이 괴로워ㅡ눈을 감고 다시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했던 날이 있었다. 이제는 그런 바람을 상상할 수 없이, 죽음은 나에게 먼 미래의 이야기가 되었다. 지금의 나는 내 아이를 끝까지 보살피고, 남은 인생을 후회 없이 살아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저녁을 먹고 아홉 시까지 아이와 놀이터에서 놀아준 뒤 사랑하는 농구를 하러 떠났고 덕분에 주원이는 일찍 잠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서울 시장의 실종 소식과, 깊은 밤 계속되는 수색에도 흔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뉴스가 이어졌고 열두 시를 넘긴 조금 전, 모두가 해프닝으로 끝나길 바랐던 뉴스는 결국, 허망한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결말로 마무리되었다.


십 년이 넘어가는 긴 세월은 한 사람의 이름과 '서울시장'이라는 직함을 고유명사처럼 묶어두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에게 큰 관심도 애정도 없었다. 은마아파트도, 잠실 5단지 소유주도 아니므로 크게 미워할 기회도 없었다. 그저 모두가 그랬듯 나도, 다가올 대통령 선거에 분명 출마하리라는 그의 정치적 포부나 야심 정도만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생에 대한 집착과 열망이 누구보다 크고 뜨거우리라 여겼던 사람조차도 하루아침에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리도 씁쓸한 것일까? 삶과 죽음이, 산 사람의 몸과 강을 건너는 영혼이 함께 머물고 흘러가던 갠지스 강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밤이다.


언제든 다가올 끝이 있다고 해도, 생은 귀한 것이다. 슬프다. 부디 아무도, 누구도, 스스로, 그렇게는 떠나지 말았으면 한다.


이날 밤에도 어김없이 전기가 나갔습니다. 쟝의 식탁엔 네 개의 촛불이 타올랐고 창으로 레몬 나무 잎이 일렁였습니다. 또또는 부처님의 푸른 발이 걸린 쟝의 가난한 방을 금빛으로 밝히는 네 개의 촛불을 바라보며 그 중 하나는 할아버지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19p. '외갓집에서 온 편지', 인도로 간 또또, 1994, 한양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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