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도시를 원하는가? 읽고 쓰다.
우리나라에 도로명 주소라는 제도가 생기기도 전이다. 처음 지하철을 타고 맨하탄에 내렸던 날, 바둑판처럼 짜여진 도시 구획과 자로 잰 듯한 반듯한 건물들이 이어지는 것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걷기 좋은 평지에, 보행자 위주의 짧은 건널목을 지나 걷다 보면 서너 블럭도 금방이었다.
동네마다 높고 낮은 산과 언덕이 있고 도시 한 가운데로는 굵은 강줄기가 관통하는, 사람들이 오가는 걸음처럼 두서 없고 촘촘한 골목길들이 끊기고 이어지기를 반복하는, 나의 도시 서울과는 무척 다른 느낌이었다.
파리의 첫 인상도 그때와 비슷했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방사형의 도로는 물론, 거리에는 크기도 높이도, 지붕과 난간들마저 규격화된 건물들이 이어져 있어, 마치 투시도의 끝 점이 되는 건물을 향해 하나의 선을 그리는 듯 했다. '중정' 을 가운데 둔 작은 사각형의 건물. 그 작은 사각형들이 모여 하나의 큰 사각형을 이루는 블록 구조는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건축 모형으로 짜여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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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가 닮아있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뉴욕에서도 도시를 "뜯어고치려는" 시도가 있었고, 오늘날의 뉴욕을 상징하는 맨해튼의 기본 구조ㅡ격자형의 대로와 고층 건물의 집합체ㅡ는 오스만의 파리 대개조 사업과 프랑스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로부터 영감을 받았던 로버트 모제스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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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당시의 파리는 아름답고, 기능적인, 완벽히 새로운 근대 도시의 원형이었던 셈이다. 도시화의 역사가 길지 않음에도 재개발, 재건축이 빈번한 이슈가 되는 우리나라와 달리, 백 년을 훌쩍 넘긴 세월을 견디며 전면적인 개축 없이 여전히 미학적으로 훌륭하게 기능하는 도시라는 점 또한 현대의 우리에게 도시 계획과 마스터 플랜의 중요성을 환기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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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심어진 가로수 하나도 품종과 위치, 네모 반듯한 헤어스타일이 정해져 있는 도시. 셀 수 없이 많은 거리의 가로등, 신문 가판대, 벤치의 모양마저 모두 통일되어 있는 도시. 우리나라에서 어느 동네를 가도 같은 디자인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면 뭐가 있을까? 언뜻 생각해봐도 조악한 철제 운동기구들ㅡ과연 운동이 되는 건지도 의심스러운ㅡ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날씨마저 좋은 날이면 그저 완벽해 보이는 도시. 자기가 예쁘고 잘 생긴 걸 잘 아는 사람 같은 도시. 그래서 마음껏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듯한 도시. 내가 받은 파리의 첫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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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도 파리와, 파리에 머물며 영감을 주고받았던 예술가들을 동경해 마지않아온 미국인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 도시에 가져온 나의 환상도 주인공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국 박람회가 열리고 에펠탑이 빛나던 '아름다운 시절', 벨 에포크의 도시. 인상주의 화가들을 사로잡았던 풍경이 있고 프루스트가 적어내려간 일상이 숨쉬고 있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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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의 빛나는 도시 파리가 존재하기 전, 훌륭한 레스토랑과 화려한 상점들과 노천 카페의 낭만이 존재하기 전에도, 도시는 그 곳에 있었으며 사람들은 살아갔을 것이다. 오스만의 파리 개조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53년. 2016년 내가 만난 파리의 풍경은 도시의 긴 역사 중 한 장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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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따르면, 개발이 이루어지기 전 파리는 같은 유럽의 런던이나 로마 같은 도시들에 비할 수 없이 낙후된 도시였다고 한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중세의 모습 그대로 상, 하수도 시설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도시는 산업혁명으로 붕괴해버린 농촌 인구의 급격한 유입으로 더욱 악화일로를 걷는다. 좁은 도로는 가정에서 쏟아버린 오물들로 덮여 악취가 진동했고, 그 중에서도 열악한 위생상태에 놓인 서민들은 전염병에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1832년에는 콜레라의 대 유행으로 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당시 파리의 도심 재개발 사업은 필연적이고,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여관은 프아소니에르 시문(市門) 왼쪽으로 난 샤펠 로(路)에 위치하고 있었다. 전체가 검붉은 색으로 칠해진 3층짜리 누옥으로, 빗물에 부식된 덧창이 달려 있었다. 유리에 별 모양으로 금이 간 가로등 위쪽으로는 두 개의 창문 사이에 노란색으로 큼직하게 쓴 '마르술리에가 운영하는 봉쾨르 여관'이라는 글씨를 간신히 읽을 수 있었다. 석고에 곰팡이가 슬어 글씨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때문이었다.
제르베즈는 가로등이 시야를 가리자 손수건으로 입을 막은 채 발돋움을 했다. 로슈슈아로 로가 있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피가 흥건히 묻어있는 앞치마를 두른 채 도살장 앞에 모여 있는 푸주한 무리가 보였다. 상쾌하게 불어오는 아침 바람 속에서 때로 도살당한 짐승들이 풍기는 피비린내와 악취가 느껴졌다. 이번에는 길게 이어진 거리를 따라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의 거의 맞은편에 위치한 라리부아지에르 병원의 신축 중인 새하얀 건물이 보였다. 그녀는 입시세관(入市稅關)의 담벼락을 따라 지평선의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찬찬히 눈으로 훑어나갔다. 밤에는 때로 담벼락 너머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해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오기도 했다. 제르베즈는 음습함과 쓰레기가 넘치는 외지고 어두컴컴한 구석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 곳 어딘가에서 배에 칼을 맞고 쓰러져 있는 랑티에의 시신을 발견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러다가 시선을 위로 향하자 파리의 아침이 웅성거리며 깨어나는 소리 속에서, 도시를 둘러싼 칙칙한 회색비의 기나긴 성벽 너머로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희뿌연 햇살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또다시 푸아소니에르 시문 쪽을 향했다. 목을 길게 뺀 채, 나지막한 두 동의 세관 초소 사이로 몽마르트르 언덕과 샤펠에서 내려오는 사람과 가축, 손수레의 끝없는 행렬을 살펴보느라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시문 앞에서 갑자기 멈춰 선 사람들의 물결이 차도 위까지 길게 이어졌다. 등에 연장을 지고, 빵 하나씩을 팔 아래에 낀 채 삼삼오오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이었다. 마치 끊임없이 거대한 파리의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물결처럼 보였다.' 13p, 목로주점, 문학동네
에밀 졸라의 소설 <목로주점> 초반부에 묘사된 파리의 모습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겨우 도시 변두리의 여관방이나 공용 아파트에 살면서 파리를 드나들던 노동자와 서민들의 삶을 묘사한 것이다.
'세 끼 빵을 거르지 않고, 작지만 아담한 집에서 잠드는 것, 평생 열심히 일하고 난 다음 내 집, 내 침대에서 죽는 것.' 아주 소박한 바람을 품은, 아직은 젊음과 아름다움을 가진 제르베즈를 힘껏 응원해 보지만, 소설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걷잡을 수 없이 망가져 가는 그녀의 삶을 지켜보는 게 가슴이 아파 쉬이 읽혀지지가 않았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유럽을 통일한 지 십 년 만에 패전국이 되고, 돌아온 부르봉 왕조와 시민들이 전쟁을 벌이고, 다시 혁명이 일어나고, 나폴레옹 3세가 대통령이 되었다가, 쿠테타로 황제가 된 직후였다. 불안한 국내 정치 상황에도 불구하고 산업혁명과 식민지 경영에 힘입어 번영을 누리는 부르주아 계급이 생겨났고, 심각했던 상 하수도 수준과 도시 위생의 개선이라는 실제적 필요와 더불어 끊임없이 잉여 자본과 노동력의 해소를 요구하는 자본주의의 흐름, 나폴레옹 3세의 정치적 입지가 절묘하게 맞물려, 역사상 유래 없는 전면적 도시 재개발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1850년의 파리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와 가능성이 끓어오르고 있는 도시였다. 어떤 사람은 파리가 병들고 정치적 고통으로 와해되었으며 계급투쟁으로 찢기고 퇴폐와 부패와 범죄와 콜레라가 범벅이 된 자기 몸뚱이의 무게 때문에 가라앉고 있다고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파리를 개인적 야심이나 사회적 진보를 이룰 수 있는 기회의 땅으로 보았다.
171p,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글항아리.
사업은 1853년부터 1869년 사이, 3단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이 기간동안 파리는 하나의 거대한 건축현장이었다. 총 66, 578호의 건물 중 27,000호의 건물이 철거되었다. 이는 전체 가옥의 3/7에 해당하는 비율이었다. 이 과정에서 집을 잃고 이주했던 시민들은 35만 명, 파리를 떠나야 했던 시민들도 2만 5천 명에 이르렀다.
출처_도시의 탄생, 파리_Discovery HD channel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만 역시 사유재산권을 존중하는 '근대인'이었기 때문에, 보상 절차를 마무리하는데 길게는 5년에서 10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다음 단계로 들어서면 사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도로와 상하수도 공사는 불과 2-3년만에 마무리되었다.
당시 파리에는 농촌으로부터 수 만명의 값싼 노동력이 유입되고 있었고, 오스만은 개발권을 넘겨주는 대신 민간 자본에 토지 보상 및 건설 비용을 부담시키는 '근대적' 사업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천문학적인 예산을 충당했다. 막대한 자본과 노동력을 끊임없이 수혈받으며, 파리 개조사업은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도시 디자인의 핵심은 '직선'이었다. 자연발생적으로 구불구불하게 생겨난 도로들을 폭이 넓고 시원스러운 직선 대로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지도 위에서 자를 대고 선을 그은 뒤, 그 선에 걸리는 건물들은 모두 헐어버리는 식의 전면적이고, 무관용적인 철거가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파리는 아름답다. 어쩌면 우리가 아름답고 현대적이라고 느끼는 도시들의 공통점은 이러한 '직선의 미학'에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논과 밭이었던 땅이 아니라, 수많은 유서 깊은 건물들과 무허가 주거촌이 이미 자리잡고 있었던, 다시 말해 '사람'과 '기억'이 존재하는 땅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도시의 신체가 급작스럽게 개조된다면 그 영혼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456p
발자크는 말했다. 기억이란,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유일한 기능'이며,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지금, 여기에서 통합할 수 있게' 하며, '우리 안에 잠자고 있던 과거의 잠재력을 현재로 끌어오는' 것이라고.
그리고 벤야민이 주장한 대로, '위기의 순간 활짝 피어나 미래로 향하는 통로를 알려주기 위해' 신성 공현처럼 등장할 것이라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완전히 기억함으로써만 삶이 죽음으로 환원되는 것에 저항할 수 있다."_발자크
급작스럽게 개조된 도시의 육체는 건강하고 아름다워졌을지 모르나, 그 영혼의 행방은 전혀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기억은 또한 집합적 방식으로도 작동한다."_Aldo Rossi 알도 로시
도시 자체가 그 주민들의 집합적 기억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기억이 그렇듯이 그것도 대상과 장소에 결합되어 있다. 도시는 집합적 기억의 장소다. (중략.) 이렇게 전적으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도시의 역사에는 엄청나게 많은 상념이 흘러가며 도시에 형태를 부여한다. (Rossi, 1982)
아버지가 태어난 집이 철거되는 것을 보면서, 루이 뵈요는 이렇게 쓴다. "나는 쫓겨났다. 또 다른 사람이 이곳에 자리 잡고 살았고, 내 집은 철거되어 무너졌다. 단단한 포도鋪道가 모든 것을 덮고 있다. 과거가 없는 도시, 추억이 없는 정신이 가득찬 곳, 눈물 없는 심장을 가진 곳, 사랑 없는 영혼이 가득한 곳! 뿌리 없는 군중의 도시, 언제라도 쓸어버릴 수 있는 인간쓰레기의 더미, 너는 성장하여 세계의 수도가 될 수도 있겠지만, 너에게 시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457p,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가끔 동부간선도로를 달리다 보면 만 세대가 훌쩍 넘는 송파의 재건축 아파트 단지를 지나게 된다. 탄천을 향해, 일렬로 늘어서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거대한 아파트 숲은 멀리서 보아도 위용이 굉장하다.
불과 몇 해 전 그 단지에 청약을 넣고 모델하우스를 둘러보던 날, 포크레인이 열심히 부수고 있던, 몇 동 남지 않은 시영아파트를 마지막으로 구경하기 위해 가까이 걸어가 본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팔자에 없던 강남살이로 향수(!)에 시달릴 때, 내 고향 목동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개포동의 주공아파트 단지에 가서 가끔 산책을 했다. 오래되고 커다란 나무들이 늘어선 길을 걷다 보면 괴롭던 입덧이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지금 개포동은 앞다투어 재건축을 시작했고, 이미 완공된 단지들은 서울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중 하나가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재력가가 되어 투자할 부동산을 보러 가게 될 지는 몰라도ㅡ이제 90년대의 서울을 환기하며 오래된 길을 걷기 위해 개포동을 찾을 일은 없게 될 것이다.
모든 사회 계급이 사라진 과거에 대한 향수를 품게 되었다." 사진 작가인 나다르는 고향에 있는데도 낯선 기분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사람들은 모든 것, 모든 기억을 부숴 버렸다."고 그는 애석해 했다.
"하지만 쫓겨난 자들 편에서야 상실감이나 '없어진 집에 대한 비탄' 이 크겠지만 실제로는 집단적 기억은 놀랄 만큼 빨리 사라지며 인간의 적응력은 상당히 빠르다.
새롭게 태어난 도시에 자본가들은 앞다투어 고급 상점, 대형 백화점, 극장, 호텔 등을 건설했고, 감당해야 했던 투자금의 수십 배가 되는 이익을 가져갈 수 있었다.
파리는 '모더니티'의 수도로 거듭났고 파리를 찾는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예찬했다. 오스만의 도시 개조 사업 이후 파리가 문화와 예술이 만개하는 벨 에포크(Belle Epoque) 시대를 맞이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자갈로 포장된 길은 비가 와도 더 이상 진창으로 변하지 않았다.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그림 '비 오는 날의 파리 거리'는 그러한 파리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걷기 좋은 거리로 새롭게 태어난 파리를 아름답게 차려입은 중산층 시민들이 한가로이 걷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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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는 새롭게 등장한 이 '도시 산책자'들을 지칭하는 '플라뇌르(flaneur_만보객)'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이제 거리는 '공적 무대'가 되었고 거리를 걷는 시민들은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행동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걷게 되었다. 파리는 소비, 스펙터클, 여가의 개념이 경쟁적으로 등장하는 소비주의와 자본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다. 동시에 주거지의 분화도 이루어졌다. 오늘날 관광의 명소이기도 한 몽마르트나, 북동부의 벨빌은 여전히 저소득층이 밀집된 주거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해에는 그들이 사는 지역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외곽 도로를 관통하는 마장타 로와 오르나노 로가 새로 뚫리면서 예전에 있던 프아소니에르 시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푸아소니에 가 한쪽도 건물이 모두 철거되었다. 이제 구트도르 가에서 거대한 공터를 바라보면서 태양과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음미할 수 있었다. 또한 오르나노 로에는 시야를 가로막던 초라한 집들 대신 거대한 기념물 같은 7층짜리 대저택이 들어섰다. 마치 교회처럼 조각으로 장식된 건물에는 부티가 줄줄 흐르는 환한 창문마다 자수 커튼이 드리워 있었다. 구트도르 가 건너편에 있는 새하얀 건물에서 나오는 빛이 거리를 환하게 밝혀주는 듯 보였다. (…) 제르베즈 또한 파리의 외관이 날로 아름다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교외의 초라한 모퉁이를 온통 뒤집어엎어놓았기 때문이다. 제르베즈를 무엇보다 우울하게 만든 것은, 자신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바로 그 시각에 온 동네가 아름다워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진창 속에 빠져 있을 때는 머리 위를 환하게 비추는 햇살이 달갑지 않은 법이다. 240p, 목로주점
"우뚝 솟은 새 건물들 사이에는 아직 힘겹게 버티고 있는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들이 보였다. 정면이 조각으로 우아하게 장식된 건물들 사이에는 움푹 들어간 시커먼 틈새 공간이 남아 있었다. 군데군데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한 창문이 달려 있는 가축우리 같은 집들도 눈에 띄었다. 나날이 더 호화스러워지는 파리의 뒤안길에서 더욱더 두드러져 보이는 외곽 빈민가의 비참함이 빠르게 변모해가는 도시의 건설 현장을 더럽히고 있었다."285p, 목로주점
옳건 그르건 간에 발자크와 당대의 많은 사람(그 도시의 적절한 재건설을 추구했던 유토피아 사상가나 도시 이론가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도시를 소유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며, 그것을 개조하는 과정에서 사회질서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자신은 개조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1848년 이후, 그 도시를 소유하고 그것을 자기만의 특별한 이익과 목적에 맞추어 개조한 것은 오스만 개발업자, 투기꾼, 자금주, 시장의 힘이었고, 대중에게는 상실감과 허탈감만 남았다. 164p,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2016년의 여행객인 나에게서도 감탄을 불러일으킨 아름답고 정돈된 도시 파리. 한 해에도 수 천만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낭만의 도시 파리가 존재하게 된 바탕에 오스만의 정책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 빛과 명암이 있듯, 저자의 말처럼 "도시의 형성 과정의 핵심에는 배제와 약탈이 본질적으로 존재"하기 마련인지 모른다.
경제 성장의 위기마다 구원투수로 등장하는 부동산 개발과 주택 건설 붐 역시 "소외된 사람들을 더욱 극심한 고통으로 몰아넣고", 그 결과 역설적으로 "국가 경제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가깝게는 2008년에도 우리는 미국의 부동산 버블이 붕괴하며 촉발한 경제 위기를 직접 경험했다. 또한 부의 양극화가 심화될 때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를 맞이할 준비를 시작하기 마련이다. 노동자들을 철저히 소외시킨 파리 재개발 역시 이후 파리 코뮌의 원동력이 되었다.
파리 대개조를 뒷받침했던 금융 시스템과 신용구조ㅡ부채로 자금을 조달해 도시 기반시설을 개발하는 케인스주의적 시스템ㅡ는 과잉 팽창하면서 점차 투기적 성격을 띄었고 결국 1868년 파탄을 맞이했다. 오스만은 자리에서 쫓겨났고 나폴레옹 3세는 보불전쟁에서 패배하며 권좌에서 물러났다. 이후 빚어진 권력의 공백 상태에서 자본주의 도시 역사의 위대한 혁명적 에피소드 중 하나인 '파리 코뮌'이 일어났다. 33p
오스만이 파괴한 과거 도시세계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파리 대개조 사업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품었던 자기들의 도시를 되찾고 싶다는 열망이 파리 코뮌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34p, 반란의 도시
파리 여행을 정리하면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과 에밀 졸라의 목로 주점, 파리에서의 생활을 회고한 해밍웨이의 에세이집 'A movable feast', 새롭게 알게 된 사회학자이자 도시 인문학자인 데이비드 하비의 책 두 권을 읽었다. 해밍웨이의 책은 광화문 교보에 가서야 구할 수 있었고, '반란의 도시'는 절판이 되는 바람에 웃돈을 얹은 중고 거래로 어렵게 구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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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파리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문학 작품들과, 파리 재개발 모델을 통해 도시 개발의 탐욕적인 이면을 조명한 하비의 저서들을 통해 파리를 여행하면서 느꼈던 막연한 낭만이 아닌 도시의 맨 얼굴에 조금은 가까워진 듯했다.
나아가 그동안 내가 여행했던 도시들, 내가 머물렀던 도시들을 떠올려 보고, 내가 살고 있고 살아갈 도시, 서울에 대해서도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고민해 볼 수 있었다. 도시는 누구의 것인지. 정치 권력이나 자본 권력, 야심 있는 정책가에 의한 하향식 도시 개발이 아닌, 도시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우리가 도시를 직접 만들고 바꾸어 나갈 수는 없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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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서울이 더 좋아졌다. 도로명 주소만 들고서는 절대 찾아갈 수 없는 구불구불한 서울의 골목길이, 첨단의 아파트 단지와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남아 있는 오래된 상권의 노포들이, 낡고 오래된 것들과 새로움이 공존하는 내 도시가, 나쁘지 않아졌다.
한강 다리를 건너며 반포에 들어선 새 아파트를 감탄하며 바라보다가, 건너서는 강북의 불빛을 바라본다. 한강변의 프리미엄을 노리는 자들(!)에게 이미 소유권을 점령당했는지는 몰라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남동 고지대의 주택들.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번지고 겹쳐 보이는 무수한 불빛들을 통해 그 노른자 땅에도 아직 '사람'이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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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들 근사한 집에 살며 깨끗한 환경에서 일하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누구나가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그건 전혀 다른 문제다. 누군가에게는 보증금 없이 얻을 수 있는 월세방이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오래된 시장이나 낡은 건물일지라도 장사를 할 수 있는 상권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변화'는 필요하지 않을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생존과 주거를 위협하는 것이 그 '변화'일 수도 있는 것, 개발이라는 것의 이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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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도시를 원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는가,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가, 자연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가, 어떤 생활양식을 원하는가, 어떤 미학적 가치관을 품고 있는가ㅡ등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26p, 반란의 도시, 데이비드 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