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여행하고 쓰다: 파리
해밍웨이는 1926년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라는 장편을 발표하면서 유명 작가 반열에 오른다. 젊은 날 파리에서 전도유망한, 하지만 가난한 신인 작가로 생활하며 고락을 함께했던 첫 번째 부인과ㅡ부정과 기만으로, 그것도 그 둘 모두의 친구였던 여자와의ㅡ이혼하게 된 것도 그 즈음이다.
결국 헤밍웨이는 불륜(!)의 상대와 결혼해 파리를 떠났고, 이후로도 두 명의 여자를 더 만났으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인류 역사에 남을 글을 썼고,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셋방살이를 하던 파리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이 부유한 생활을 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의 기억은, 'movable feast'라는 표현 그대로 평생 그를 따라 다녔던 모양이다. 1950년의 인터뷰에서 해밍웨이는 파리에서 지낸 시간이 그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시절임을 밝혔다. 그는 권총으로 자살하기 석 달 전에도 파리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다. 헤밍웨이가 자신의 글에서 언급한 유일한 '아내' 역시 첫 번째 부인, 해들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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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주원이를 낳고 처음으로, 둘이서만 떠난 해외여행. 우리는 결코 가난한 백패커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부유한 여행객도 아니었다. 시간과 돈을 절약하기 위해 하루에 한 끼만 제대로 먹었고, 커다란 짐짝 두 개를 질질 끌며 숙소를 찾아다니고, 파리를 떠나는 날까지 버스도 택시도 거의 타지 않았으며 뮤지엄 패스로 이용할 수 있는 루브르만 신나게 들락거렸다.
우리를 파리로 보내 준 후견인(!)과 가족들을 위한 소박한 선물 몇 가지를 샀을 뿐 우리를 위한 쇼핑도 하지 못했다. 고작 십 만원 정도 남긴 유로를 가지고 파리 공항에서 쇼퍼백 하나를 만지작거리다 그마저 내려 놓으며, 그 십 만원으로 '기약 없을' 다음 유럽 여행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나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인색하게 굴었으며, 우리 집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잘 알고 있었다. (…) 나는 다른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도 그처럼 어리석게 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절약하지 않고는 이길 수 없는 가난과의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도 당시 우리는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 우리는 값싼 음식으로 잘 먹고, 값싼 술로 잘 마셨으며, 둘이서 따뜻하게 잘 잤고,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_a movable feast. hemingway
사실 우리에겐 이미 이 여행이 선물이었다. 헤밍웨이와 해들리처럼, 우리는 비싸지 않은 음식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으며 몽생미셸 가이드가 트렁크에서 즉흥적으로 꺼내 선물해 준 샴페인을 나누어 마시며 마지막 밤을 기념했다. 그리고는 아주 오랜만에 셋이 아닌 둘이서 방해 받지 않는 꿀잠을 잤다. 무엇보다도 나는 남편을 무척 사랑한다. 족저근막염에 걸렸어도 버스비를 아끼는 지독한 짠돌이라 해도 말이다.
남편이 헤밍웨이처럼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어, 나를 '첫번째' 부인으로 만들지만 않는다면 아마도 우린 언젠가 다시 파리에 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함께.
그리고 언제가 될 지 모를 그 날까지는 오래 오래, 이 여행을 추억하며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파리는 우리에게도 'movable feast' 다.
"파리는 내게 언제나 영원한 도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나는 평생 파리를 사랑했습니다. 파리의 겨울이 혹독하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었떤 것은 가난마저도 추억이 될 만큼 낭만적인 도시 분위기 덕분이 아니었을까요. 아직도 파리에 다녀오지 않은 분이 있다면 이렇게 조언하고 싶군요. 만약 당신에게 충분한 행운이 따라 주어서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딜 가든 늘 당신 곁에 머무를 거라고. 바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_헤밍웨이, 1950년의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