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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22. 2020

힐링은 짧고 고행은 길다.

여행하고 쓰다: 후쿠오카

2017년 5월, 8년 3개월간 근무해온 첫 직장에서 남편은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커리어의 전환이었고, 입사 때부터 남편의 생 고생을 지켜봐 온 내 눈에는 신난 얼굴로 책상을 박차고 나가도 모자랄 대 탈출이었지만, 충성스럽게 모셨던 상사들에게, 고락을 함께해 온 동료들에게 갑작스런 퇴직을 통보하는 일이 마음 여리고 소심한 남편에게 결코 쉬운 일일 수 없었다.

마음 고생을 겪으며 십 키로그램 가까이 체중이 들어들었고 미안함과 염치 없음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도 허다했다. 작별 인사와 함께, 책상을 치우고, 남은 업무들을 나누어 주고, 마지막 출근과 퇴근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은 '시원함'과 '섭섭함' 사이 어디쯤에서, ‘실감나지 않는다'는 표현을 완전히 실감하고 있는 듯 보였다. 해방감. 어색한 자유. 소속 없음이 주는 불안함. 갓 제대한 군인이 몇 년만에 맞이하는 알람시계 없는 아침처럼 혼란한 감정 속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남편과 달리 나는, 남편의 안전한 '실업' 상황이 그저 달콤했으며 다시 또 우리가 쳇바퀴로 걸어들어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에 하루 하루가 아쉽고, 초조할 뿐이었다.

언제 또 주어질 지 모르는 이 시간을 십분 누리며 여행을 떠날 생각에 들떠 있었고, 어째서 행선지가 일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처음에는 주원이와 같이 떠날 생각이었으므로 가까운 나라를 택한 듯하다.) 일본 여행의 대가이자 유창한 일어 능통자인 유경의 강력 추천을 받아, 그녀가 이미 대 여섯번을 다녀왔다는 후쿠오카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역시 그녀가 강력 추천한 숙소, '타케후에'. 내가 사랑하는 '온천탕'이 룸마다 딸려 있는, 이 고급 료칸은 1박에 수 십 만원을 호가하는 숙박비를 자랑했으나 때마침 평생 만져 보지 못할 목돈의 퇴직금을 수령한 남편의 든든한 주머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탈한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한 나는 지친 심신의 '힐링' 을 위한 온천 여행이라는 상품 팔이에 성공했다.




후쿠오카에서도 세 시간 가량을 고속 버스로 이동해야 하는 료칸의 위치 때문에 주원이를 데려가려던 여행은 우리 둘만 떠나는 여행으로 수정되었다. 돌아보면, 이미 그때부터 '여행'을 위한 료칸인지, '료칸'을 위한 여행인지의 목적조차 흐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잠시 이성을 잃은 남편이라 해도, 아무리 온천에 환장한 나라고 해도 우리의 바탕은 '짠내'였기에 신혼여행도 아닌 '힐링' 여행으로 하룻밤에 수 십만원 하는 숙소에서 '연박'은 상상할 수 없었고 도합 이 박 삼일, 그 중 '세 시간'을 이동한 뒤 하루를 묵고 다시 '세 시간'을 돌아 오는 여행이 힐링이 될 수 없으리라는 상식적인 계산도 하지 못한 채, 우리는 무작정 후쿠오카에 상륙했다.


여행은, 단연컨대 최악이었다. (이렇게 단정적인 표현은 잘 쓰지 않지만, 내 감정에는 한 치의 거짓이 없으므로 이번만은 강행한다.) 판교에서, 일산에 있는 시댁에 주원이를 맡기고, 다시 판교에서, 인천에 있는 공항으로 이동하는 여정부터 힐링의 절반이 날아갔다.

'온천'과 '힐링'의 하룻밤을 위하여 후쿠오카 역 근처에 팔 만원을 주고 예약한 비즈니스 호텔은 깨끗하고 모던한 인테리어에도 불구하고 고시원과 같은 '초소형의 마법(작은 방에 있을 것 다 있음)'을 자랑했고 출발하기 전 날부터 원인 모를 복통과 설사를 동시에 시작한 우리는 '후쿠오카 함바그'도, 다음 날 차려진 료칸의 화려한 '가이세키' 요리도 맘껏 즐길 수 없었다. 인구만 넘쳐나는 지방 소도시의, 현대적이지도 시골스럽지도 않은 도심을 구경하는 재미는 한마디로 별로였고 이글대는 남쪽 지방의 더위가 더해지는 한낮이 되자 그나마 걷는 것도 포기하고 비즈니스 호텔의 쪽방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캐리어를 질질 끌고 도착한 터미널에서 '모스 버거'로 끼니를 때우고, 우리나라처럼 시원하게 산을 뻥 뚫고 직선으로 질러가는 고속도로 대신, 꼬불꼬불 이어지는 시골 국도 위에서 잠도 안 와. 세 시간을 격한 멀미에 시달렸다. 창백한 얼굴로, 황량하기 그지 없는 산골 마을 한복판에 덩그러니 내려진 우리를 여관에서 보내 준 봉고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멀미를 다시 삼키고, 다시 봉고를 타고, 드디어, 도착한 료칸 주차장에는 일본인들이 타고 온 외제차가 즐비했다. 그렇다. 고급 료칸에 오는 이들이라면 응당 안락한 승용차로 이동하기 마련인 것이다.

숙소는 지금껏 묵은 어느 곳보다도 훌륭했다. 지나치게 훌륭했다. '에르메스' 라고 적힌 어메니티에는 나 같은 사람을 배려한 듯 '가져가셔도 됩니다' 라는 친절한 안내 문구가 적혀 있었고, 변기만 하나 들어 있는데도 사람이 누워도 될 만큼 커다란 '용변용' 화장실은, 갑자기 자동으로 변기 뚜껑이 열려 구경만 하고 나가려던 나를 깜짝 놀래켰다.

저녁 식사를 하는 데만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식사를 하는 내내 식사 도우미가 계셔서, 점잖은 척을 하느라 마음껏 사진도 못 찍고 호들갑도 못 떨어 아쉬웠다. 음식이 너무 많아, 아까워서 억지로 먹고 체했다. 와사비 열매가 그렇게 생긴 줄, 그걸 갈아서 만든 것을 여지껏 먹고 있었다는 것은 그때 처음 알았다.


힐링을 해야 하는데, 일박은 짧고, 정말이지 우리는 너무 바빴다. 깜깜해지도록 이어진 식사를 마친 뒤에는 숙소 곳곳에 있는 전세탕을 돌아다녔다. 산신령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 말하자면 온천 베이스 캠프 같은 곳에서 옷을 벗고,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는 아담과 이브가 된 것처럼 욕탕을 찾아 걸어갔다. 이색적인 경험임은 틀림 없었다. 조금 빡빡한 스케줄이었을 뿐.

잠이 들면 돈이 아까울 것 같아 DVD라도 빌려 버텨 보려던 우리는 지쳐 곯아 떨어졌다. 그리고 늦잠을 자버렸고, 소화도 안 된 뱃속에 또 성대한 아침을 우겨넣고, 부랴부랴 마지막 온천을 하고 료칸과 이별했다.

다시 덜덜덜 시골길을 달려 터미널. 지하철 보관소에 짐을 넣고,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며 백화점 구경을 하고, 나누어 줄 선물을 사고, 그마저 이내 지쳐, 새로 생겼지만 이미 한 물 간 듯한 인테리어의 카페에 들어가 몸을 던진 우리는 생각했다. '괜히 왔어.'

그리고 인천으로, 일산으로, 그리고 판교로 돌아왔다. 그리고 결심했다. 다시는 '이렇게' 떠나지 않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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