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과 선생님들, YMCA Medal
지금 브런치스토리에서 감사하게도 내게 공간을 내어 주어서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너무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이 과연 지금의 내게 어떤 의미일지, 그리고 어떤 형태의 글을 쓰고,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 할지도 많이 고민하게도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글쓰기가 내 자신에게, 글을 읽는 다른 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가야 할지도 정말 신중해 진다. 왜냐하면 이곳은 나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고, 오래 전 일기장처럼 나 혼자 마음껏 내 감정과 생각을 내뱉고 해소하는 자리가 아니다보니 더더욱 그러하다. 특히나 제대로 된 글쓰기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한 글자 한 글자 써나가는 손가락이 더 무거워지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꼭 예전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살아온 오래 전의 기억이 오히려 지금의 내게 해답이 되고, 위로와 격려가 되곤 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한 것 같다.
지금 글쓰기의 두려움에 대해서 고민하는 내게 떠오르는 첫 번째 기억은 국민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담임선생님이셨던 이 경란 선생님이 내게 해주셨던 말씀이다. 아마도 당직을 서셨던 날인 것 같은데, 집으로 전화가 와서 학교로 오라고 하셔서 교무실로 갔었다. 환한 햇빛이 비치는 교무실에는 나무바닥에 반들반들하게 칠해진 왁스가 말라서 나는 익숙한 냄새와, 난로에서 석탄이 타고, 올려 둔 물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소리들이 섞여 어쩌면 따뜻한 수채화의 한 풍경같은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성민아, 너 일기장 선생님이 다 읽어봤는데, 아주 글을 잘 쓰더구나"
"네?"
"너 언제부터 일기 썼니?"
"2학년 때 부터 썼는데요."
"그랬구나. 선생님이 네 일기장 읽어보니 너는 참 일기를 잘 썼더구나. 앞으로도 계속 일기쓰는 습관을 버리지 말거라. 선생님은 나중에 네 일기장으로 어린이들 책을 한 번 냈으면 어떨까 생각해."
"네 일기는 계속 쓸께요."
내가 기억하는 대화는 대략 이러했지만, 선생님께서는 아버지는 뭐하시는지, 형제자매는 몇 명인지, 학교에 올 때는 어떻게 오는지, 뭘 좋아하는지 등등 나에 관한 여러가지 질문들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기억하는 선생님의 말씀은 "아주 글을 잘 쓴다, 나중에 책으로 내면 좋겠다" 이 두 말씀이었고, 무엇보다도 선생님이 나를 칭찬해 주셨고, 내게 관심을 보여 주셨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 너무 기뻐서, 그 눈덮인 운동장을 지나 교문까지 오는 동안 내내 눈을 발로 차면서 천천히 걸으며 흐뭇해 했던 기억이 난다. 서대문의 금화초등학교에서 오셨던 선생님의 눈에는 이 작고 빈한한 시골 마을의 저학년 학생 하나가, 상대적으로 글을 더 잘 쓰고, 유복한 배려를 많이 받던 서울의 다른 학생들에 비해 더 안타깝게 느껴지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지금 그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내게 지금 그때의 이경란 선생님께서 주셨던 격려와 따뜻한 관심이 필요한 때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작 2년 정도 쓴 일기, 숙제로 매일 내서 선생님의 확인을 받아야 했던 짧은 글들에 대해서 주셨던 칭찬과 격려가, 지금 50대 후반으로 접어들며, 인생의 여러 가지 격변을 겪고 있는 내게 오히려 생생히 살아서 그때 느꼈던 선생님의 부드러운 음성과 인자한 미소로 되살아 나는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억은, 중2때 담임을 맡으셨던 한경희 선생님이 주셨던 일기장. 신경여상에서 수학을 가르치시다가 불광중학교로 오셔서 첫 담임을 맡으셨던 분이셨는데, 수학 과목 선생님이셨음에도 늘 책읽기와 일기 쓰기를 강조하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아마도 우리 반에서는 드물게 거의 매일 일기를 쓰고, 가끔씩 선생님이 제출하라고 하시면 순진하게도 (?) 선뜻 다 제출하는 아이들중의 한 명 이었던 것 같다. 그걸 다 꼼꼼히 읽어보시고, 나의 모든 고민과, 처한 상황과, 가정형편과, 심지어는 내가 제출한 그 일기장이 그냥 막 쓰는 싸구려 노트를 달력 중 한 장의 예쁜 그림으로 표지를 덮은 것을 보셨던 마음씩 고우셨던 선생님께서는 내게 아주 멋진 일기장을 선물하셨었다. 내게 주어졌던 "푸른 날개".
나는 이경란 선생님의 격려와 칭찬에 힘입었고, 한경희 선생님의 지극한 배려에 용기를 얻었다. 그 힘든 사준기를 지나면서도 나는 한번도 일기장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고, 그 글쓰기는 제대 후 복학한 다음, 그리고 취업 초기까지도 계속되었다. 군에서도 밤새며 주번하사 근무를 하는 날이면 행정반에서, 백지 종이에 김지하 시인의 "남한강에서" 라는 시를 멋부리면서 세로로 쓰면서, 거기에 내 감상을 덧붙이는 식으로 유치하지만, 그래도 글쓰기를 계속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일기장 표지 다음의 첫 페이지에 있던 그림과 싯구는 중고등학교 내내 나를 계속해서 문예창작반, 독서반등의 특활반 활동으로 이끌었다. 내가 이 일기장을 받고 처음 펼쳤던 날,
"무한정 깊은 바다로부터 태어난 이 목숨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 잠든 양 움직이는 조수되어 소리도 물거품도 일지 말아라"
영국의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 경 (Alfred Tennyson)의 "사주를 건너서 (Crossing the Bar)"의 이 한 구절은 내 머릿속 깊이 각인되어 버렸고, 나는 저 구절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나는 저녁 별빛 아래 바다의 한 작은 사구(砂丘)를 바라보던 시인의 생각속에서 어떻게 이런 싯구가 나올 수 있는지 너무 경이로왔고, 그 "고향 (본향)"이 어디인지, 내가 태어난 "깊은 바다"가 과연 어디일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소리도 물거품도 없이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헤르만 헤세, 쟝 꼭또 같은 시인들의 이름이 내게 가까와지던 시기였다.
그 시집들은, 내게는 아주 감미로운 상상이었고, 문자들이 악보가 되어 춤추는 오선지이기도 했으며, 힘들고 절망적인 시간들 속에서 영어단어 10 페이지 써오거나 수학문제 100개 풀어오라는 등의 과제를 하던 싸구려 연습장에 갈겨 쓰며 스스로를 위로하던 작은 도피처였던 것 같다. 소피 마르소의 청순한 사진이 있곤 하던 연습장 표지는 내겐 관심밖이었고, 나는 그 두꺼운 연습장에 영어 단어를 베껴쓰기도 하고, 수학문제를 풀어서 페이지를 채우다가도, 외우던 싯구들을 파란색 볼펜으로 또박 또박 쓰면서 시인들의 세상을 상상해 보던 시간들이 있었다. 선생님들 덕분에 일기를 썼고, 그 쓰는 시간 동안 하루를 되돌아 보며 정리하는 버릇이 생겼고, 그 과정에서 다른 것들을 더 떠올리며 상상의 나래를 폈고, 그것이 궁금하여 알아보다가 더 많은 선생님들 (먼저 사신 분들, 先生)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은 결국 글쓰기로 시작된 작은 선순환이었다고 믿는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나는 글쓰기를 내가 털어놓는 솔직한 고백, 그것을 통해 내가 받는 위로, 혹은 긴 사색의 입구, 혹은 나를 다른 세상, 다른 이들과 연결시키는 통로, 나아가서는 나를 더 익어가게 하는 잘 쌓여진 볏가리로 생각하고 싶다. 두려움 없이. 선생님들의 그 격려를 애써 기억하면서.
또 한 사람, 잊을 수 없는 분은 나의 어머니.
내가 받아오는 상장이나 메달을 너무도 기뻐하셨고, 당신의 상장이나 메달처럼 아끼셨던 분. 나중에 돌아가신 후에 유품정리하면서, 지퍼로 잠긴 오래된 낡은 비닐주머니에 꼬깃 꼬깃 뭉쳐놓은 채로 서랍속에 숨겨 놓으신 내 학창시절의 메달들을 나 자신도 수십년 지나서야 다시 만나보게 되었다. 성적상, 글쓰기 상, 착한 어린이상, 심지어는 턱걸이 대회상까지.
이 수많은 격려들 덕분에 나는 커왔고, 생각도 자라왔고, 지금처럼 이렇게 글을 쓰는 것 같다. 먼저 본향에 가신 어머니, 아마도 지금쯤은 마찬가지로 가 계실것 같은 이경란 선생님, 한경희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내 글이 그 분들을 부끄럽지 않게 하고 싶은데,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턱걸이 17개 하던 정도 이상의 노력과 열심만 잊지 않는다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못하더라도, 저 산밑 작은 동네에서 태어난 나 역시, 테니슨 경이 노래했던 그 "본향"에는 지금 한 걸음씩 더 가까와 지고 있다고 믿는다. 내 이 작은 기억들이 한 사람이라도, 누군가에게 간접 경험이 되고, 공감과 사색의 소재가 될 수 있다면 내 글쓰기는 허무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고, 그것은 나를 한걸음씩 더 본향에 이르게 하는, 작은 계단 오르기, 필사적인 턱걸이의 몸짓이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