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마늘 지게

끝내 영원히 질 수 없었던.

by 진성민

북한산 원효봉 맨 위에 있는 원효암이라는 작은 암자.

지금도 그렇지만 지게질이 아니면 어떤 물자도 받을 수 없는 외진 곳.

밑에 있는 마을에서 늘 지게질로만 식품도, 양초도, 연등도

다 받아올려야 부처님 앞의 향초와 염불이 이어지던 곳.


그 밑의 작은 동네에 고3 남학생이 살았다.

그 아버지는 수십년전에 일찍 돌아가신 큰 형님의 막내딸이 그 암자에

어쩔 수 없이 동자승처럼 맡겨진 것을 못내 가슴아파하던 그 어린 스님의

작은 아버지.


매년 겨울 바위산인 북한산의 꼭대기에 있는 절, 물받이하던 바위샘에 물이 마르면

그 작은 아버지는, 경사 40도가 넘는 송추계곡과 인접한 거친 바위 능선을 오르며

지게질로 물을 길어 올렸다. 옛날 말통이라고 하던 흰 통 서너개를 동시에 지게에 묶고.

땔깜이 없다고 하면, 근처 계곡과 능선에서 나뭇짐을 해서 베어 날랐다.

일찍 돌아가신 큰 형님의 막내딸, 그 파르라니 깎은 머리가 안스러웠고

작은 아버지로서 해 줄 수 있는게 그것 밖에 없어서.


그 아들은 아버지의 갈아입을 옷을 배낭에 넣고 올라가다가 간혹

아버지와 마주쳤었다. 추운 날, 아무렇지도 않아 하던 아버지의 깊이 패인

주름살 골골이 맺힌 땀방울을 보며, 사촌누님격인 어린 여 스님에게

한바탕 신경질을 내고 못된 소리를 내뱉고 돌아섰지만,

그 아들은 깜깜한 산길을 혼자 걸어 내려오며 그저 빛나는 밤하늘을 올려다 볼 수 밖에.


초파일 무렵이었던가, 원래는 오신채를 쓰지 않는 것이 불사의 기본이건만, 이 암자에서는 늦은 밤, 내일 아침까지 깐 마늘 한 자루를 올려 보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변함없이 조카딸을 생각하는 이 아버지가 당연히 짊어 지고 올라가야 하는데, 일 끝나고 피곤에 지쳐 쓰러져 잠든 아버지, 고3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11시반이나 되어 돌아온 아들이 지게를 지기로 했다. 안쓰러움에 등을 두드려 주시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호기롭게 산길 입구에 놓여진 깐 마늘 한 포대를 지게에 실으려고 드는 순간, 예전의 국민학교 친구 김학성의 형, 역도선수 김학양 선수도 못 들을 것 같은 이 무게, 아,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어찌어찌 지게에 싣고, 받침대로 버티고 일어서서, 힘겹게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저 길은 시구문(屍口門)이라고 부르는, 공식명칭은 북한산성 서암문 (西暗門: 몰래 병기와 양식을 실어 내던 서쪽 성벽문) 이지만 옛날부터 시체들을 쌓아놓고 아래로 나르던 장소라는 무서운 지명이 있던 곳까지, 별빛도 들지 않고, 양쪽의 무성한 나무 사이로 난 좁은 흙길이었다. 그쯤 가면 반 정도 간 것. 다시 그 위부터는 돌계단 길이지만, 이후로는 양쪽이 트여 있고, 별빛도 밝고, 바람도 불어와서 한결 나은 길이었다. 일단 시구문까지만 잘 가보자 생각하고 올라갔지만.


고3 수험생 남자아이의 체력이 좋을리 없었다. 매일 새벽 5시반에 일어나 도시락 두 개 싸서 등교하고, 밤에는 구산동에서 연신내까지 걸어와서 156번 버스를 기다려서 타고, 11시 반이나 12시에 와서 또 숙제를 하고 잤던 남고생의 체력이 어찌 그 산길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주말에도 거의 매번 논밭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 소위 저질체력으로는, 지금 생각해보면 50~60Kg가 족히 나갔을 그 깐 마늘 한 포대를 저 해발 500미터쯤 되는 암자에 배달한다는 것은 너무 호기로운 욕심이었다. (찾아보니, 백운대는 해발 836미터, 원효봉은 505미터. 아마 암자는 최정상 기준 100미터 아래쯤이니 아마도 400미터?)


땀이 비오듯 흐르고, 허벅지는 점점 딱딱해져 가고, 숨이 가팔라지다 못해, 이제는 발목의 중심이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등은 무게를 지탱하느라 최대한 긴장해서 허리와 등근육이 아파오고, 원래는 약간 어둠이 무서웠었는데, 그것도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익숙한 산길의 코스를 생각하며, 그래 여기만 잘 지나가면 다음에는 약간 평지가 있다, 거기서 약간 허벅지를 쉬게 하면 그 다음 나오는 경사진 바윗길은 넘어갈 수 있고, 그 다음에는 한 번 쉬지 뭐...


계획은 다 어긋났다. 산길을 올라간 지 몇 백 미터도 못가서, 아마도 30~40분쯤 되었을까, 눈앞에 하얗게 빛나는 꼬리달린 별들이 수없이 동심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흡사 올챙이나 생물시간에 교과서에서만 배웠던 정자들? 그들은 내 눈앞에서 빛을 내며 돌면서, 내게 얘기하는 것 같았다. 버티지 마, 그냥 여기서 좀 쉬어.

그는 힘겹게 지게를 내려 놓고, 받침대로 고정한 다음, 거의 눕다 시피 밤 하늘을 올려다 보며 큰 한숨을 쉬었다. 이럴 것 같았으면 물이라도 한 병 가져올 걸. 차가운 흙의 감촉이 등을 시원하게 쓰다듬는 느낌에, 잠깐 쉬고, 그는 다시 받침대 앞으로 갔다. 다시 지고 이제는 빨리 가자. 내일 학교 지각 안하려면 소위 잽싸게 올려다 놓고 빨리 내려와야 할 것 아닌가? 내려올 때는 거의 뛰다시피 와서 20분 내로 주파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소년은 지게를 지려고 하다가 그만 엎어져 버렸다. 그 사이에 무게가 더 늘어난 것인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지게를 등으로 버티고, 일어서는 것은 고사하고 지게와 그 위에 놓여진 마늘 포대에 눌려 버린 것. 그는 간신히 힘을 내어 일어나서 간신히 지게를 세우고, 마늘 포대를 원위치시켰지만, 다시 시도해 봐도, 도무지 그의 허벅지는 무릎 쏴 자세에서 펴지질 않았다.... 그렇게 수없이 그의 눈앞에 맴돌던 꼬리달린 올챙이 같은 놈들 짓이었다. 나쁜 놈들! 그는 도무지 일어설 수도 없어서, 간신히 그렇게 받침대를 세워놓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캄캄한 길을 혼자 걸어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허전했다. 등의 땀이 식으면서 춥기도 했고, 아 어쩌나, 내일 아침까지 올려놔야 한다고 했는데... 늙으신 그 아버지의 등이 생각났다. 차가운 우물물을 길어, 등목을 해드릴 때면, 그 등짝이 나뭇가지 처럼, 혹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딱딱한 굳은 살이 배어 있었다. 논일과 밭일, 조경일과 등짐 등, 그와 그의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온갖 노동을 마다하지 않던, 늙은 아버지의 그 거친 등과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을 떠올리며, 그는 소리없는 울음을 삼키며, 어쩔 수 없이 그 어두운 산길을 내려와야 했다.


그 아침에, 그 소년은 학교에 갈 준비를 하다가, 아버지가 계신 것을 보고, 죄송스러운 마음에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저 사실 어제 원효암에 마늘 올리려다가 기도원 쯤 옆 길에 그냥 두고 왔어요. 죄송해요."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무거웠지? 벌써 올려다 놓고 왔어. 걱정말고 빨리 도시락이나 챙겨."

그 소년은 너무 놀랐다. 그 무거운 걸, 아버지는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벌써 올려다 놓고, 벌써 내려오셨던 말이야? 놀램보다도, 안도감이 컸다. 그래, 내 아버지는 아직은 강인하시구나, 아직은 건강하시구나. 그리고 내 짐을 맡아주실 그 큰 책임감도 있으시구나. 그는 아주 큰 안도감과 행복감으로 학교에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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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가 되어, 오늘 가을 햇볕 아래 몇 군데를 지나가다 보니, 그때의 기억이 나를 깨운다. 내가 그 때 아버지의 마늘짐은 못 지어 드렸지만, 그래도 재수도 안하고, 소위 괜찮은 학교에 간 것이 아마 아버지를 가장 기쁘게 해드렸던 것 같다. 그 이후, 신병 훈련소에서 면회오셨을때 뵈었고, 별도 자대 교육 후 총 잘 쏘고 훈련 성적 우수하다고 해서 포상휴가 받고 89년 11월 나왔을 때, 복귀하려고 의정부행 버스 타는데, 꼬깃꼬깃 접힌 만원짜리 하나 건네주시던 그 따뜻한 손길이 마지막이었다. 어머니처럼, 꽃과 나무를 좋아하셨던 아버지, 오늘 저 코스모스 꽃밭에서 동호회 어르신 분들끼리 즐겁게 사진찍는 것을 보니,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난다. 어머님은 산소라도 모셨지만, 아버지는 일병 계급장 막 달고 아무것도 모르던, 그저 5남매 중 장남일 뿐이었던 나의 결정에 의해서, 아버지가 힘들 때 즐겨 혼자 찾으시던 북한산과 송추 사이의 계곡, 맑게 흐르는 물 사이로 희고 뜨거운 가루가 되셔서 흘러가셨었는데....


아버지와 늦은 저녁, 논둑 물가에 담가 놓았던 막걸리를 종이컵에 나눠 마시며, 서로 아무 말도 없이 듣기만 하던 풀벌레 소리, 뉘엿뉘엿 지던 황홀한 석양, 나는 그 기억에 오늘 이 글을 쓰며, 옆 자리에 막걸리 한 병 놓고, 한 모금씩, 아버지를 추억한다. 저 시구문 성벽의 큰 바위들처럼, 아버지는 지금도 제게 바위같은 분이세요, 김학량 역도선수보다 더 엄청난 허벅지의 선수이세요, 그리고 지게질 달인, 무엇보다도, (지금은 그분 역시 떠났지만) 조카딸을 위해서 모든 땀과 힘을 쏟아부으시고, 저같이 못난, 말 대답하던 아들을 위해서도 모든 것을 다하시고 떠나신, 사랑이 거칠게 충만하셨던 분이셨어요. 저의 이 뒤늦은 후회를 받아주시길.


그래서인지 저는 오늘 저 하늘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오늘, 너무 맑고 아름다우셨어요... 곧 뵐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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