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즈음, 돌아보는 1년전 그날
자다 말고 뛰어간 국회 앞 도로에서
흑복을 입고 야투경을 장착한 헬멧 차림의 그대들을 마주쳤을 때,
두려운 마음은 전혀 없이, 그저 안타까왔습니다.
우리가 왜 이런 장소에서, 이렇게 만나야 하는지.
아마도 내 아들보다 몇 살 많을 혹은 조카뻘 되었을 그대들이
지금 어떤 무도한 자의 불법한 계략에 영문모르고 동원된 것인지
과연 알고 있을지, 알아도 어찌할 수 없는 군인이라는 신분은 또 어찌할 것인지.
45년전 광주에서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자들이
소위 "명령"에 의해 저질렀던 그 수많은 피흘림과 죽음들을
그대들 또한 "명령"에 의해 반복해야 한다면
그대들 자신에게도 또한 평생 아로새겨질 깊은 상처와 죄의식들을
저 검은 군복 속에 엄청난 훈련과 극기의 과정을 거쳐 단련된
건강하고 빛나는 육신들을 감추고 있는 젊은 그대들은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고맙게도 눈발이 날리는 하늘에서는 헬기가 늦게 도착하고,
그대들의 지휘관들 일부는 깨어 있는 양심으로
서강대교를 건너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시민들은 이구동성으로 계엄철폐를 외치고,
국회의원들은 결사적으로 담을 넘어 해제를 의결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대들은 소화분말을 맞고
밀침을 당하면서도 결코 즉각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젊은 혈기에, 욕설과 물리적 위협들에 둘러싸인 속에서도
일당백의 특공무술과 거칠고 험한 훈련으로 단련된 몸이었음에도
결코 화를 내거나 감정적으로 돌발행동을 해서
더 큰 비극을 폭발시킬 수 있는 도화선은 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그날 밤 여의도 하늘에는 공포탄 소리 한 방 들리지 않았습니다.
시민들도, 그대들도 모두 영웅이었습니다.
민주주의 수호라는 거창한 말 이전에,
그날 밤 우리는 우리 서로를 죽이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체포 명단을 작성하고, 비밀요원을 시켜 폭사 혹은 수장하려는
계획을 짰던 어떤 사악한 일군(一群)의 남자들 외에는.
그런 자들이 그대들의 최상위 명령권자였지만,
그대들의 깨어있는 양심과 훈련된 시민의식이
그날 밤 우리 모두를 총성과 비명의 아수라장으로부터 구했습니다.
그날 그대들은 제복입은 훌륭한 시민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으로 믿습니다.
잘 훈련된 육신만큼이나 군 복무 기간 내내
건전한 양식과 균형잡힌 시선을 갈고 닦아서
훌륭한 군인, 그리고 또한 자랑스런 누군가의 아들과 아빠로
우리가 앞으로도 다함께 걸어 가야 할 길고 힘든
내란극복과 민주주의 대한민국 회복의 과정에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기를.
그날 밤 고마왔다는 말을 이렇게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