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정하기 전에 작은 발걸음부터 올바르게
먼 길을 돌아와서, 50대 후반의 나이에 접어들은데다가, 혼자 살면서 이국땅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의 처지가 되고 보니 여러 생각이 든다. 퇴근하고 문을 열면 썰렁한 빈 집이 나를 맞아주는 저녁 시간에는 조용한 방안에앉아서 잠깐 상념에 빠져든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지금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 건가 하는 물음. 불과 두 달 전까지 고양시 창릉천의 그 눈시린 푸른 겨울 하늘을 바라보면서 뚝방길을 산책하던 초로의 노인네가 갑자기 인도로 이주해서, Global EMS회사들이나 전장사업을 하는 글로벌 대기업들과의 사업협력을 위해 매일 같이 메일과 전화와 회의들과 씨름하는 일상을 살게 된 것이 아직도 조금은 급작스럽다. 지금 나는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바라고 살고 있는 건가?
그러면서 생각나는 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돌아봐야 겠다는 것. 그래야 변화된 이 상황에 적응하며, 하루 하루가 외부 상황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주도하는 목적의식적인 시간들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대 때 스스로 정했던 삶의 우선순위를 거의 30여년 무의식적으로 지켜왔던 것 같은데, 이제는 한 번 쯤 되돌아볼 때가 되었다.
그때는, 막 신앙을 갖게 된 젊은 청년이다보니, 우선순위가 이러했다.
1)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것,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것.
2) 가족과 형제자매와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고 함께 하는 것.
3) 직장이든 사업이든 주어진 사회적 직무와 경제활동에 힘써서 1), 2) 번을 실천하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
1)번을 위해서, 자주 새벽기도에 참석하고, 매일 정해진 만큼의 성경구절을 읽고, 주일날은 빠짐없이 출석해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도 하고, 부활절을 앞두고 하던 120시간 연속기도회때는 심야나 새벽시간 두어 시간을 감당하고, 매일 자기 전에 기도하고, 교회일에는 시간과 물질을 바쳐가며 참여하는 등의 "행위"가 잘하는 것처럼 생각되었었다. 그러면서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여겼었다.
2)번을 위해서는, 좋은 말과 선한 행동을 하고, 가족과 이웃들의 대소사를 되도록 챙기고, 할 수 있는 한 동참하고, 나누고, 배려하고, 나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양보해서라도 나의 시간과 노력을 다하는 것을 잘하는 것처럼 여겼었다.
3)번을 위해서는, 직장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내는데 주안점을 두어 잠을 줄여 가면서 일하는 것이 미덕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 얻는 소득이, 1)번과 2)번을 가능하게 하는 나 자신의 노력의 성과물이라고 생각했었다. 부의 축적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되고, 순전히 1)번과 2)번의 물질적 토대일 뿐이라는 생각이 컸다. 그러기 위해서는 야근이나 밤샘 근무, 장기출장이나 더 높은 연봉을 받기 위한 개인적 노력들은 힘들어도 마땅히 감수해야 하는 일종의 필요조건으로만 생각했었던 것 같다.
이제 거의 30여년이 지나서, 다시금 되돌아 보니 그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이제는 내 나이와 잔여 수명, 변화된 상황들, 그리고 나 자신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고려해서라도 조금은 수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순위를 바꾸어야겠다.
위 1)번은, 내가 내 의지대로, 원한다고 가능한 것이 아님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것은, 내 바램이었을 뿐, 삶의 종착점에서도 과연 이뤄질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2)번은, 여전히 필요한 일이고 내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30여 년전에 비해 이제는 부담이 조금 줄었고, 내가 맡지 말아야 할 일들도 오히려 늘어났기 때문에, 오히려 비우고 내려놓아야 할 부분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3)번 역시 예전에 비해 부담이 많이 줄었고, 내 체력과 정신건강 등을 생각하더라도 이제는 내려놓고,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많아졌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어야지 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돈으로 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고 생각하던 것에서 이제는 벗어나서, 일이 주는 기쁨과 사회적 기여, 스스로에게 주는 성취와 훈련의 기회로 받아들여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새롭게 바뀐 우선순위는 위 순서가 2) --> 3) --> 1)로 바뀌되 내용도 새로와져야 한다.
가) 가족과 형제자매와 이웃사랑은 내가 해야 할 의무적인 행위가 아니라, 우러나오는 기쁨이어야 하며, 나 역시 그 속에서 이제까지 살아왔음을 인정하는 내적인 자기고백의 시간들로 삼자. 그런 이후에는 내 욕심껏 하려고 하지 말고,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하는 정도로 만족하자. 그 이상은 욕심이 된다.
나) 경제적 활동을 통한 물적 토대를 지속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에서 나의 건강을 해치거나, 마음이 각박해져서 삶 전체를 돌아보거나 가)를 기쁨으로 감당할 여유가 없어진다면, 그것은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경제적 활동이 비단 수입을 가져다 준 것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나를 더욱 세밀하게 훈련시키고, 깎아 내고, 조금 더 새롭고 온전한 모양으로 빚어 냈던 일종의 "완제품 조립 과정"이었던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아울러, 그 활동 역시 내 맘대로는 결코 되지 않는다는 것이 대전제이므로, 욕심이 생기는 것을 막고, 할 수 있는 만큼만, 감사함으로 감당한다는 태도가 필요하다.
다) 이 부분은 위 1)번에서 가장 대폭 수정되어야 할 사항인 것 같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오해였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한 마디로 말하면 턱도 없는 소리였던 듯.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하나의 토기 정도에 불과한데, 토기장이와 화목하게 지내길 바랬던 것 같다. 반면, 토기보다는 한 단계 나은,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자녀일 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아는 것이지, 내가 졸라서 얻을 수 있는 자격이 아닌 것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여전히 그분이 지으신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그분의 나라가 실현되기를 바라며, 결국에는 그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꿈을 포기하기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내 바램 (욕심?)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나는 그냥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일 뿐이다. 내가 감당해야 할, 혹은 누려야 할 아주 작은 순간 순간의 일들과, 생각들과, 만나는 사람들에 충실하는 것, 그것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 너머의 영역은, 내 몫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결국, 요약해서 다시 마음에 새긴다.
"내게 주어진 위치에서, 내가 겪는 일들과 만나는 사람들에 성실하고, 욕심 대신 감사함으로, 자기 자신을 도구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을 매일 매일 하면 된다. 위 가)~다)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섞여 있기 때문에, 마치 비빔밥처럼 맛있게 먹으면 될 것 같다. 거기에 어쩌다가 "뿌려지는" (수동태!) 참기름의 향기를 가끔씩 맡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성경 말씀을 나는 여전히 믿는다. 내가 아무리 예전에 마음으로 내 진로와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었어도 돌아보면 그대로 된 적이 별로 없었다. 길은 커녕 단거리 구간 자체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보이지 않았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내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을 그저, 온전히, 단단하고 힘있게 내딛는 것 뿐. 그 걸음들이 이어져서 만드는 행로가 길이 될 것이지만,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은, 위 다) 항을 살아내는데 있어 기본적인 바탕이 된다.
이 글을 쓰는 새벽 시간, 지난 주말에 만났던 공원의 꽃들과 새들과 다람쥐들이 기억난다. 사실 지난 밤 늦은 시간에, 주초에 제안했던 사안에 대해서, 고객사로부터 전화가 와서 심각한 정도의 이견과 차이가 있으니 오늘 전화협의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예전 같으면 아, 어떡하지 마음이 무겁고, 엑셀을 다시 들여다 보면서 밤잠을 설쳤을 법도 한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결국, 모든 일은 순리대로 되어갈 것이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피었다 지는 저 꽃들처럼, 평화로운 다람쥐들처럼 그냥 살아가면 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