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은 흐른다
중학교 때 이미륵 著" 압록강은 흐른다"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황해도 은율이라는 이름도 예뻤던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마음씨 곱던 소년이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다 체포를 피해 결국 사랑했던 어머니를 떠나서
몰래 밀항선을 타고 머나 먼 타지 독일까지 가서
가을 낙엽을 보며 고향의 어머니를 그리워 하던 그 글줄들이
지금 이역만리에서 혼자 생활하는 내게 갑자기 떠오른다.
그 책 내용 중에 가장 기억나는 것은
지부티(Djibouti) 해협을 지나며, 이제는 정말 내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다던 20대 초반 조선 청년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
생각지 않게도 어렵게 동물학 박사가 된 글쓰기 좋아하던 순수한 한인청년이
그 낙엽 떨어지는 뮌헨의 가을거리에서 느꼈을 외로움과 그리움을,
수십년 지나서 서울법대 출신의 유학생이었던 전혜린 작가가 공감해서 그 글들을 번역했고,
그 책을 읽은 중학생 시절의 나는 이제야 그 느낌들을 경험해보고 있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인간은 유리알처럼 맑게, 성실하고 무관심하게 살기에는
슬픔, 약함, 그리움, 그리고 향수를 너무 많이 그의 영혼속에 담고 있다"
전혜린 작가 역시 이미륵 선생님의 저서를 번역하고 불꽃같이 살다가 떠났다.
나는 그분들보다 오래 살고 있지만, 그리고 비교할 수 없는 장삼이사이지만,
온갖 고통을 주었던 2025년의 끝자락에 갑자기 먼 타국에 오니
갑자기 그 은율 바닷가를 떠나며 느꼈을 이미륵 선생님의 슬픔과,
텅 빈채 가로등에 낙엽만 떨어지던 늦가을의 뮌헨 거리를 혼자 걷던 전혜린 작가의 고독이,
문득 내게 전해진다.
과연 인간이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이지만,
혼자일 때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가장 내밀하고도 드문 감정과 생각의 번뜩임들이
아주 가끔씩 선물처럼 머리속을 정화하듯이 씻어 내려간다는 것.
뮌헨의 가을밤 거리에 흩날리는 낙엽들을 보며 외로와했을 이미륵 선생님과 전혜린 작가의 고독이,
어쩌다 혼자 척박한 인도라는 나라에서 지내게 된 50대 후반 남자의 홀로된 삶에서 진한 공명을 일으키는 밤, 바깥에서는 다른 이웃들이 행하는 요란하고 화려한 결혼식 축제의 소리들이 끊이지 않고 허공에 울려 퍼지고 있다.
그리고 또 한 얼굴, 이 미륵 선생님을 닮았던, 착하고 아름다왔던 나의 불광중학교 친구, 이 한림.
우리는 이렇게 또 멀리 그리워하며 살다가, 추억하며 살다가, 영원한 꿈으로 남는가 보다.
그분들이 그리워 했을 Yalu River 압록강처럼,
내게는, 삼송리가, 효자리가, 창릉천의 그 겨울 철새들이 생각나는 밤,
철저한 고독을 배경으로 빛나는 하나 하나의 아름다운 영혼들을 꿈꾸어 본다.
이미륵 선생님처럼, 전혜린 선생님처럼,
혹은 불꽃의 여자 시몬느 베이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