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FP 동생 생각 #1
공연장에 입장해 자리를 찾고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순간은 매우 특별하다. 공연 전 각자의 설렘이 그대로 느껴지는 관객석, 음악과 이야기로 채워지기 전의 흰 도화지 같은 무대, 극의 첫 장면을 열게 될 무대 장치, 까다로운 마디를 반복해서 연습하는 오케스트라의 소리. 적당히 모든 것이 어우러져 공연 시작 직전의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핸드폰 전원을 꺼달라는 안내 멘트가 반복적으로 들려온다.
핸드폰의 전원을 꼭 꺼야만 하는 세 시간, 나에게는 현실로부터 잠시 차단될 수 있는 참 고마운 시간이기에, 공연장 입장과 동시에 반가운 마음으로 바로 핸드폰을 꺼두는 편이다. 처음에는 공연이 나에게 보여 줄 세계로 더욱 밀도 있게 들어가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눈을 감고 있기도 했고.
그런데 무대 위 텅 빈 몬티 다이스퀴스 나바로의 고풍스러운 원목 책상을 바라보며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 편>을 기다리던 어느 겨울 저녁, 문득 가방 속에 들어있던 책이 떠올랐다. 관객석 조명이 꺼지기 전이라 적당히 밝고, 푹신한 의자와 잔잔한 주변의 소음, 책 읽기에 의외로 괜찮은 환경인걸?이라는 생각 속 꺼내 들었던 책은 손석희 앵커의 에세이 <장면들>. 그동안 뉴스를 진행하며 겪은 일들을 앵커의 1인칭 시점으로 풀어내는 글이었다. 그리고 참 운명적이고 우연히도, <젠틀맨스 가이드>의 막을 여는 주인공 몬티의 첫 대사는
"1909년 10월 19일 펜톤빌 감옥. 이것은 하이허스트의 아홉 번째 백작, 몬테규 다이스퀴스 나바로경의 회고록이며, (... 중략...) 사형당할 수도 있으니, 내 삶의 진실만을 기록해 두고자 한다."
였다! 읽고 있던 책과 같은 1인칭 시점. 2021년을 사는 인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로부터 1909년의 인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순간 이동이라니. 참 근사하지 않은가.
책도, 공연도, 짧은 시간 안에 다른 세계로 푹 빠질 수 있게 해 주기에 무척 소중하다. 그러한 점에서 책과 공연은 어쩌면 참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날 이후, 공연을 가기 전에는 공연 시작 직전 객석에서 읽을 책을 챙겨 간다. 그리고 마치 와인과 안주를 서로 잘 어울리게 페어링 하듯, 공연의 분위기와 책의 내용을 나름대로 즐겁게 고심해 보며 페어링 한다.
최근 관람한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시작 직전에는 <임경선 단편소설집 호텔이야기> 중 '야간근무'를 읽었다. '야간 근무'의 좀 어리숙하고 순수한 청년 동주의 불같은 사랑은 토니와 마리아가 보여주는 사랑의 모습과 닮은 면이 보였다.
페어링 한 음식과 술이 서로 잘 맞아떨어졌을 때 그 풍미를 더욱 잘 느낄 수 있듯이, 공연과 책의 조합이 좋은 날에는, 공연의 여운과 감동이 더욱 깊고 짙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