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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골과 촛농

사랑의 무게에 대하여

by 우리의 결혼생활

시간이 흐르면서 깊어진 사랑은 더 이상 감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거운 무언가가 된다. 그것은 마치 세월의 퇴적층처럼 차곡차곡 쌓인 시간의 무게이며, 두 사람이 함께 견뎌낸 삶의 흔적들이다.

어린 시절의 사랑을 떠올려보면, 그때의 감정은 마치 한 움큼의 초콜릿처럼 달콤하고 순수했다. 처마 아래 웅크린 새끼 강아지처럼 작고 소중한 감정이었고, 아름답게 꾸며진 동화 속 이야기처럼 풋풋하고 환상적이었다. 그 시절의 사랑은 조건도 없었고 계산도 없었다. 단지 좋아하는 마음, 함께 있고 싶은 마음, 그 사람을 보면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순수한 감정이 전부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런 순수한 감정들은 모래시계 속 모래처럼 쌓이고 버려지기를 반복했다. 어느 순간부터 감정보다는 이성이 앞서게 되고, 사람을 만날 때는 온갖 조건들을 따져보게 된다. 직업은 무엇인지, 집은 어디에 있는지, 성격은 어떤지, 미래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하는 계산적인 체크리스트를 하나씩 메워가다 보면, 사랑의 순수한 감정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미 굳어져버린다.

사랑의 초기 단계에서는 모든 것이 밝고 가슴 뜨거웠다. 커플이 된 기쁨, 함께하는 시간의 달콤함, 미래에 대한 설렘 등이 삶을 화사하게 물들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 시점에서 모든 커플이 마주하게 되는 필연적인 갈림길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두 사람의 미래 계획과 각자가 요구하는 기준들을 맞춰봐야 하는 순간이다.

이런 순간이 오면 사랑이란 감정은 어느새 차갑게 식어진 향초처럼 변해버린다. 한때 뜨거웠던 불꽃은 사라지고, 굳어진 촛농의 자국만이 그 흔적을 증명할 뿐이다. 마음은 무거워지고 사랑이란 감정이 조금은 무감각하게 느껴진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또다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순간들을 경험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 조건 없는 사랑은 부모님의 사랑 외에는 견줄 만한 것이 없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어떤 조건도 계산도 없다. 자식이 잘못을 저질러도, 실패를 해도, 심지어 부모에게 상처를 줘도 그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연인 사이의 사랑에서 이런 무조건적인 사랑을 찾기란 쉽지 않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로는 하늘에 속한 사랑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두고 “천사 같은 사람”이라고 비유할 때, 그 사람의 인성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바로 사랑과 희생정신이다.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이야말로 천사적인 사랑의 모습이다.

하지만 자기를 완전히 내어주는 사랑이 항상 건강한 것은 아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희생은 사랑이며, 극단적으로는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이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일까? 단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든지 참 사랑을 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사랑하는 이 앞에서 헌신적이 되고, 자신을 모두 내려놓게 된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런 사랑의 이야기들을 수없이 만나왔다. 죽음을 넘어서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 고전 중의 고전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그리고 조국을 사랑하여 한 몸을 기꺼이 내어주는 애국열사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결의와 고백이 개인의 희생을 넘어서 존경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스토리를 본다.

얼마 전, 작은 골목길에 있는 상점의 유리창 가까이 진열대에서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본 적이 있다. 특별히 무엇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저 발길 따라 들어선 작은 편집숍에서 너무 마음에 드는 오르골 하나를 발견했다. 그 오르골을 구매해서 집으로 오는 동안 연신 듣고 또 들었다. 맑은 오르골 소리가 너무 황홀해서 들을 때마다 마음이 평온해졌다.

집에 와서는 책상 위 중앙에 정성스럽게 오르골을 두었다. 처음 며칠은 자주 보고 또 보면서 그 소리에 취해 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는 오르골 소리를 다시 듣지 못했다. 그렇게 서서히 일상이 바쁘다는 핑계로 오르골은 잊혀져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오르골은 여전히 책상 위에 있지만, 더 이상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 채 그저 장식품 역할만 하고 있을 뿐이다.

사랑이란 어쩌면 그 오르골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책장 한 귀퉁이를 장식하고 있는 오르골처럼 첫 만남의 즐거움과 호기심은 이내 끝나고 만다. 호기심이 끝나면 사랑도 오르골처럼 잊혀진다. 만약 이렇게 사랑이 쉽게 사라진다면, 이것을 과연 참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진정한 사랑은 그런 일시적인 감정이나 호기심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헌신과 사랑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동전의 무게마다 그 값어치가 다르듯이, 헌신의 무게만큼 사랑의 무게도 달라지고 그 사랑의 가치는 더욱 귀중해진다. 사랑한다면 상대를 의심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 헌신이라는 관점에서 과연 자신이 준비된 사람인지 스스로 가늠해봐야 한다.

사랑은 마치 초콜릿을 예쁜 몰드에 넣어 잘 포장한 모습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진열대에 둔 것만으로는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다. 자기만족에만 갇혀 있는 진열장 한 편의 순간적인 사랑은 곧 사라질 감정이 되고 만다. 하지만 희생의 가치를 함께 나눈 사랑은 다르다. 그런 사랑은 내면 깊숙이 내려가 자리를 잡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각인된 도장처럼 삶에 깊은 자국과 무게를 남긴다.

결국 진짜 로맨티시스트는 희생을 할 준비를 마친 사람이다. 그들은 사랑을 단순한 감정의 소비가 아닌, 지속적인 선택과 헌신의 행위로 이해한다. 시간이 흘러 감정의 열기가 식어도, 그들의 사랑은 더욱 깊고 단단해진다. 그것이 바로 시간의 무게를 견뎌낸 성숙한 사랑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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