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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일걸즈 Dec 30. 2020

파파야를 써는 사람

에필로그: 너에 관하여, 실은 나에 관하여

그러니까, 루가 내게 인도에 가자고 물었던 건 나로선 아주 기쁜 일이었다. 그곳이 인도가 아니라 아마존의 어느 이름 모를 지역이라고 했더라도 나는 따라갔을 게 분명했다. 여행의 동반자가 루라면 꽤 특별하고 색다른 여행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케 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요즘은 우리의 여행이 진즉부터 예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러다 보면 루를 처음 만난 날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대안학교에 입학한 첫날 루는 교실 맨 앞자리에 앉아있었다. 반딱반딱한 볼따구에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아이가 맨 앞에 있으니 자꾸만 그를 쳐다보게 되었다. 앞에 계신 선생님을 바라보는 그 아이의 야무진 표정이 낯설지 않았다. 초등학교 새 학기에 건네던 ‘나랑 친구 할래?’와 같은 낯간지러운 인사까진 아니더라도 나는 꼭 루에게 말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건 내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왠지 루에게 다가가는 건 평소보다 조금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아주 오랜만에 낯이라는 걸 가리고 있을 때 루가 내게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라는 어색한 존댓말이 귓가에 쏙 들어왔다. 이런 세상에. 반딱반딱한 볼따구에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아이는 목소리까지 또랑또랑했다. 루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건 반칙이라고 속으로 나지막이 외쳤던 것 같다.

나는 칭찬을 들으며 자랐다. 엄마는 내가 두 살 때 글을 읽는 모습을 보고 천재인 줄 알았다는 말을 아직도 종종 한다. 어릴 적 동네 아주머니들은 “의진이는 똑똑해서 좋겠어요, 호호”라는 말을 하며 엄마의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은 글씨를 예쁘게 쓴다는 이유로 반 아이들 중 유일하게 샤프 사용을 허락해주었는데, 당시 모든 아이가 연필을 쓰는 가운데에 큐빅이 박힌 샤프를 쓰는 건 엄청난 특권이었다. 학교 선생님들은 수업 시간마다 손을 번쩍 들고 또박또박 대답하는 나를 좋아했다. 엄마의 지난한 육아의 낙은 어디서든 칭찬을 듣는 날 보는 것이었다. 나 역시 이것저것 척척 잘 해내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없는 어떤 특별함을 나는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무럭무럭 자라 자존심 센 청소년이 되었다. 그때 루가 나타난 것은 일종의 혁명과 같았다. 루는 성격이 밝았고 친구 사귐에 어려움이 없었다. 수업에 열심히 참여했고 발표도 똑 부러지게 잘했다. 그런 루를 보고 있으면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미묘했다. 옆 학교의 선생님은 루와 내가 쌍둥이냐고 묻기도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키와 체구를 포함해 짙은 쌍꺼풀까지 닮아 있었다.

그러나 똑 닮은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건 특별하면서도 어려웠다. 특히 그 누군가가 나보다 나은 사람일 때는 더 그랬다. 루에게는 없는 내 결점들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탄식을 흘렸다. 다행히도 루를 좋아하는 마음은 그를 향한 질투의 폭보다 넓었다. 나는 루의 옆에서 그의 장점들을 닮기 위해 노력했다. 나의 오만함은 루의 훌륭함을 마주하며 조금씩 금이 갔다.


서로가 똑 닮았다고 굳게 믿고 떠난 여행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사실은 많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고 돌아온 여행이기도 했다. 나는 길 위에서 나에 대해, 또 루에 대해 몰랐던 것들을 켜켜이 알아갔다.

나는 여행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힘을 얻었다. 내 발전기는 여행자들과의 소통으로부터 돌아갔다. 그러면 루는 신난 내 옆에 앉아 같이 수다를 떨다가 갑자기 어딘가로 사라졌다. 사라진 루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면 그는 구석에서 파파야를 썰고 있었다. 어떤 말도 없이 계속해서 파파야를 썰었다. 루는 아무 생각 없이 어떤 일을 반복적으로 할 때 힘을 얻는다고 했다. 담배를 말 때, 따뜻한 물을 마실 때, 야채를 썰 때, 양치할 때가 바로 루만의 명상 시간이었다. 혼자 무언가를 사부작사부작 하는 루를 발견하면 나는 그 애 옆으로 갔다. 내 여행의 소중한 동반자를 혼자 두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루는 혼자라는 것이 별로 개의치 않아 보였다. 루를 둘러싼 공기는 외로움이 아니라 차분함이었다. 곁을 내어주지만 절대 먼저 발발거리지 않는 묵직한 시베리안 허스키처럼 말이다.


하루는 인도 푸시카르에서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다는 산에 올랐다. 서울의 원룸보다 작은 사원에서는 기도 소리와 종소리가 흘러나왔고, 조용한 산 귀퉁이에는 여러 여행자가 앉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루는 사원 끄트머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명상을 시작했다. 나도 루를 따라 자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명상은 쉽지 않았다. 나는 삼십초 단위로 실눈을 뜨고 루가 아직 눈을 감고 있는지 확인했다. 또 산에 오르는 여행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어느 나라에서 온 이들일지 추측하는 게임을 했다. 그러다 잡념을 떨치고 내 ‘안’에 집중을 하려고 하면 산을 자유롭게 떠도는 공작새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내 명상은 5분도 되지 않아 끝나버렸고, 내가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여행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도 루는 끝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루는 가만히 앉아 에너지를 얻고 그걸 잘 간직할 줄 알았다. 그렇게 간직한 에너지는 소수의 사람에게 균일하게 쏟았다. 그렇다고 루가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을 어려워하거나 뻣뻣하게 구는 건 절대 아니었다. 다른 여행자들과 둥그렇게 앉아 수다를 떨 때는 왁자지껄 목소리를 높였고 음악이 나오면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춤도 신나게 추었다. 파파야를 썰며 혼자만의 명상을 즐기던 전날의 자신은 없었던 것처럼.


우리 여행은 ‘알고 보니!’의 연속이었다. 알고 보니 각자 힘을 얻는 원천이 달랐을 뿐더러, 알고 보니 루는 스님처럼 삼삼한 음식을 좋아했고 나는 달곰한 간식을 즐겼다. 사실 루가 먹는 음식은 삼삼한 정도가 아니라 지루했다. 루는 2주 동안 매일 아침 귀리죽을 먹거나 생야채를 염소처럼 으적으적 씹어먹었다. 나 역시 귀리죽을 좋아했지만 열네 번의 아침 끼니를 때울 정도로 매력적인 맛은 아니었다.

알고 보니 루는 더 신중했고 나는 더 즉흥적이었다. 루가 여행의 신중한 파트를 맡고 있었던 건 정말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시작부터 무식했던 우리 여행이 결국 파국으로 끝이 났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우리가 얼마나 많은 ‘알고 보니!’의 순간을 통과했는지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서로의 닮은 점을 계속 마주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다른 점을 발견하는 것 역시 많은 힘이 쓰였다. 여행이 길었던 만큼 다른 점 때문에 투닥거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럼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꽁하니 토라져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이내 어색한 공기를 이기지 못하고 해가 지기 전 서운했던 점을 털어놓으며 잠자리에 누웠다.

한국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을 때였다. 그는 내가 많이 바뀌었다며, “레벨 2에서 레벨 124로 업그레이드된 것 같아!”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레벨 124라는 표현을 듣고 파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큼 레벨 업이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루와의 여행에서 나는 분명 많은 것을 배웠다. 배탈이 나지 않게 몸을 데우는 법을, 주변을 정리정돈 하는 법을(여전히 부족하지만 여행 전과 비교하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힘들 때는 도망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거라는 말을, 상대방을 기다릴 줄 아는 힘을, 그리고 말에 대한 신중함을. ‘비슷한 점이 사람을 서로 끌어당긴다면, 다른 점은 둘 사이의 빈 곳을 채워준다’던 작가 황선우의 말처럼, 나는 내 빈약한 부분들을 루를 통해 부족하게나마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루가 내게 그래 줬던 것처럼, 나 또한 루에게 그런 존재였다면 참 기쁘겠다.


아차, 그렇게 우리가 완전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돌아오던 한국행 비행기에서 한 승무원이 이렇게 말했다고.

“가족이세요? 닮으셨어요!”


글, 사진 옥의진(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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