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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일걸즈 Nov 02. 2020

홀리 마마!

Part 1. 레벨 1의 여행자

살면서 인도는 꼭 한 번 가야지, 다짐하게 만든 데에는 영국 밴드 콜드플레이의 ‘Hymn For The Weekend’ 뮤직비디오도 한몫했다. 형형색색의 가루와 화려한 사리를 입고 춤추는 여자들, 눈빛에 살아 온 시간이 투영되는 요기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웃으며 뛰어다니고, 밴드는 길 한복판에서 “Got me feeling like drunk and high (취한 것처럼 기분이 너무 좋아)” 라는 가사를 열창하며 신나게 연주한다. 사람들은 음악 소리에 맞춰 듯 두 팔을 흔들며 춤추고 있었다.

뮤직비디오는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축제인 ‘홀리(Hoil) 축제’를 표현한 것처럼 보였다. 홀리 축제는 인도와 네팔에서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음을 기념하는 봄맞이 축제이다. ‘홀리(Holi)'는 힌두교 신화 속 마녀 '홀리카 Holika’에게서 따온 것인데, 축제 전야에는 마녀 홀리카를 형상화한 짚더미를 태운다. 짚더미를 태우면서 악을 몰아냈음을 축하하고 흥겹게 축제를 시작하는 것이 홀리 축제의 순서였다. ‘인도에 가면 꼭 해 볼 것’ 목록에 홀리 축제를 적었다.


“해피 홀리!”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눈앞으로 가루가 날아왔다. 메고 있던 가방 위로 초록색 가루가 찰싹 붙었다. 홀리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축젯날이면 눈앞에 보이는 사람에게 “해피 홀리”라고 말하며 색 가루를 뿌리거나 묻히는 일이 전통이었고 그 사람에게 축복을 빌어준다는 의미였다.

머물던 호스텔 안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색 가루가 섞인 물을 물총에 담아 뿌리고, 아예 바가지에 물을 담아서 끼얹는 애도 있었다. 온갖 색으로 범벅이 된 얼굴 속에서 허연 이빨과 눈동자만 보였다.


호스텔에서 벗어나 거리로 나왔을 때, 순간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았다. 길바닥은 이미 알록달록하게 물들어져 있었고 유유히 옆을 지나가는 소의 등마저 핫핑크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 사이로 눈과 이빨만 드러난 사람들이 좀비처럼 걸어 다녔다. 한 걸음 뗄 때마다 가루가 눈 앞을 가렸다. 어디선가 “해피 홀리~” 소리가 들렸고 몇 개의 손이 내 머리와 턱을 문지르며 지나갔다.

시가지 중심으로 갈수록 인파가 몰렸다. 앞뒤, 양옆으로 사람들과 몸을 딱 붙이고 걸어야 했는데 꼭 출근 시간 서울 지하철 안을 비집고 나가는 것 같았다. 날아오는 가루 막으랴, 앞서가는 친구 쫓아가랴 이건 뭐 축제인지 생존게임인지 모를 때쯤, 눈앞에서 일이 벌어졌다. 한 남자가 크롭티를 입고 있던 여자에게 달려들어 여자의 배를 만지려 한 것이다. 여자는 화를 내며 팔꿈치로 그를 힘껏 쳐냈다. 홀리 축제에서 성추행이 빈번하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걸 눈앞에서 보니 바짝 긴장됐다. 뒤따라오던 친구는 누군가 자신의 가슴을 치고 갔다고 했다.

손은 여기저기서 뻗어 나왔다. 콜드플레이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신나게 춤을 추지도, 활짝 웃을 수도 없었다. 언제 어디서 달려들지 모르는 손을 신경 쓰느라 솜털까지 곤두서 있었다. 그제야 호스텔에서 나올 때 인도에 자주 온다는 여자친구들의 당부가 떠올랐다.

“사람 많은 곳으로 갈 땐 꼭 여럿이, 아는 남자애들이랑 같이 가. 절대 혼자 다니지 마.”


‘넓은 곳으로 가면 괜찮겠지, 거기에선 춤출 수 있을지도 몰라.’ 시내의 중심부인 광장에 겨우 도착했을 때,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구름 떼 같은 인도 남자무리가 광장을 메우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여성 여행자들은 한 귀퉁이에 서서 그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봤다. 사리를 입은 여자들은 발코니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인도에 오기 전 찾아 본 인터넷 사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홀리 축제는 아는 자와 모르는 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아이와 어른의 구분이 없이 누구나 모두 공평하게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인터넷 사전에 적힌 문장과 달라도 한참 달랐다.

©성지윤

자이살메르에 갔을 때였다. 좁은 골목을 걷다가 우연히 들어간 헤나 가게에서 인도의 여성 운동가를 만났다. 그는 여행객들에게 천연헤나를 해주고 여러 가지 기념품을 팔았다. 인도에 온 이후로 여성이 운영하는 가게를 본 건 처음이었다. 릭샤를 운전하는 기사도, 옷가게와 식당에서 일하는 직원, 주인은 모두 남성이었다. 길에는 걸어 다니는 여성조차 쉽게 볼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뒤틀린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았다. 여자가 증발하듯 사라진 세계. 나와 랑은 그에게 물었다.

“여자가 운영하는 가게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헤나 가게 주인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인도에서 여자가 장사 하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에요. 가게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손님을 마주해야 하는데, 결혼한 여성이라면 남편과 가족 외에 다른 남성과 마주치는 것 자체가 불경하다고 여기는 문화 때문이죠.”

실제로 힌두교의 경전으로 여겨지는 마누 법전에는 “여성들은 독자적으로 어느 것도 해서는 안 되며, 아버지와 남편, 아들을 벗어나려 해서도 안 된다”고 쓰여 있다고 한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니. 낡은 율법 아래,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마저 지켜지지 않는 인도의 현실이 답답했다. 나와 랑이 인도에 가겠다고 했을 때 한 명도 빠짐없이 우리의 안전을 걱정했다. 그도 그럴것이 인도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 관한 기사는 매일 쏟아져 나온다. 2013년 델리에서 일어난 집단 성폭행 사건을 다룬 드라마<델리 크라임>이 넷플릭스에서 큰 주목을 받으며 방영되기도 했다.


헤나 가게를 운영하던 여성은 꿋꿋이 자신의 가게를 지키겠다고 했다. 인도에서 여성이 겪는 부당함에 대해서 알리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자이살메르에서 만난 이 여성처럼 인도에서 여성의 삶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더 만나보고 싶었다.


타지마할로 유명한 도시 아그라에 갔을 때, 랑과 나는 ‘Sheroes Hangout’이라는 이름을 가진 음식점에 갔다. 영웅을 뜻하는 Hero에 여성 대명사인 She를 합쳐 만든 Sheroes는 여성 영웅을 의미하는 새로운 단어였다. 그러니까 음식점의 이름을 해석하면 ‘여성 영웅들의 아지트’ 같은 것이다.

Sheroes Hangout은 염산 테러의 생존여성들이 운영하는 카페 겸 음식점이었다. 식당 안 쪽 티브이 화면에서는 생존여성들의 인터뷰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친척이나 남편처럼 가까운 지인에게 피해를 입고 난 뒤 그들은 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한다. 경제활동을 물론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피해사실을 구태여 알리지 말라는 가족과 사회적 압박까지 더해져 생존여성들은 혼자서 지난한 시간을 감당해야 했다.

2014년, 흩어져 있던 그들은 뭉치기로 한다. 힘겨운 시간을 버텨온 자신들에게 '영웅‘이라고 부르며 위로하고 서로의 지지자가 되어준다. 식당 운영뿐 아니라, 각자의 재주를 살려 전시를 열거나 베이킹 기술을 배우는 프로젝트도 하고 있다. Sheroes Hangout에서 활동하는 한 여성은 말했다.

 “이곳은 제가 계속해서 살아 갈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줍니다. 저의 이야기를 밖으로 꺼낼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지요.”

Sheroes Hangout은 현재 아그라에서 조금 떨어진 도시 러크나우에도 분점이 생겼다. 2020년에는 새로운 프로젝트로 바라나시에서 카페를 운영한다고 한다.


2018년, 전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인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미투 고발이 번졌다. 구글은 검색엔진을 이용해 전 세계에서 ‘미투’ 단어를 검색하는 도시를 빛으로 나타내는 ‘Me too rising'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2018년 10월 기준, 미투 운동을 가장 많이 검색한 상위 다섯 개의 도시가 모두 인도에 있는 도시였다.


'여자가 여행하기 위험한 나라, 여자가 살기 어려운 나라'로 유명한 그곳에서도 살아가는 여자들이 있다. 너와 내가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면서. 때로는 서로를 영웅이라 부르면서 조금씩 더 살아나간다.

그들과 나의 하루가 다르지 않음을 생각하며 정세랑 작가의 말을 전한다.


“여자아이들은 희고 무른 석고 인형으로 태어나 세상을 마주한다. 매순간 자신에게 흠집을 내려고 하고, 깨부수려고 하는 외부 환경에 대항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어떤 날에는 완전히 부서져 영원히 온전한 스스로가 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석고 인형의 상태에서 벗어나, 그다음을 향해야 한다. 우리에게 그런 여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한없이 슬프고, 한없이 벅찰지라도 참혹하고 추악한 세계에 단호히 맞서야 한다.

여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을 구하고, 여자들이 여자들을 구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우리를 구할 수 없다.”


_<우리가 석고 인형으로 태어났더라도>, 정세랑


©성지윤


글, 사진 성지윤(찌루)

•메일걸즈의 영화 추천


 <위장 기혼>, 리마 센굽타

스미타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남편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을 나와 혼자 살 집을 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법적으로 아버지 혹은 남편 등 남성 보호자 없이는 여성이 혼자서 집을 구하기 어려운 인도의 현실을 다룬 논픽션 단편 영화. 2018년 여성 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피리어드: 더 패드 프로젝트>, 레이카 제타브치

여성이 월경 중에는 사원 근처에도 못 가게 하는 문화가 있을 만큼, 인도에서 월경은 여성의 질병이나 문제로 취급된다. 이러한 인도 여성이 월경으로 인해 겪는 현실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여성들이 직접 월경대를 만드는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단편 다큐멘터리이다. 넷플릭스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인생은 드라마 Dear Zendagi (나의 인생에게)>, 가우리 신드

실력 좋은 촬영감독 카이라는 어느날 ‘결혼한 가족만 살게 하겠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집주인에게 쫓겨나 고향 뭄바이로 가게 된다. 그러나 매 순간 결혼과 안정적인 직장을 요구하는 가족은 그저 스트레스 집합체. 인간관계와 과거의 트라우마로 지친 카이라는 우연히 제항기르 칸 박사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 심리상담을 받으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성 중심 서사로 유쾌하게, 또 따뜻하게 전개되는 영화. 무겁지 않은 인도 영화를 찾는다면 추천! 이 역시 넷플릭스에서 감상할 수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기사


인도, 이제는 여성인권에 눈 떠야 할 때 2013, 뉴스피플 박소담 기자

http://www.inewspeople.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92


‘미투’ 불길 뜨거운 인도 2018, 국민일보 장지영 기자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17179&code=11141200&cp=nv


 'India’s Sheroes Hangout Café Is Run by Acid Attack Survivors 2018, Global Citizen, Priti Salian

https://www.globalcitizen.org/es/content/a-cafe-run-by-acid-attack-survivors-attracts-vis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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