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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 불꽃 Jan 15. 2021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

#5. 내가 사는 이유

돌아보니 참 아둥바둥 사는 것 같다.

좋은 말로 포장하자면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표현할 것이고,

최근 나와 유사한 삶의 패턴을 가진 누군가는 우리를 미련한 여우라 표현했다.

이런 내 삶에 대해 스스로 참 많이 질문을 던지곤 한다.


WHY?

공식적인 나의 답은 경력단절여성이 되는것이 걱정되었고 일이 좋았다.

일에 대한 성취감은 내가 살아 있는 이유를 느끼게 해 준다. 사회 구성원으로써 무언가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내 삶의 동기이자 원천이다.

그런데...사람을 알아가는 학문이 좋아 코칭을 공부하고 내 마음 수련을 위해 NLP를 접하며 마음공부를 하고, 명상을 하고, 끊임없이 나를 자꾸 돌아보는 장 속에 머무르다 보니, 어느순간 이것들은 모두 그럴싸한 포장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허물을 벗기고 나니 불연듯 내가 이렇게 아둥바둥 사는 내 삶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보게 되었다.  


생각보다 그 이유는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


사람들은 내게 어디서 그런 열정이 나오느냐고 묻는다.

아이들 셋을 키우면서 어떻게 일도 하고, 요리도 하고, 대학원도 다니고, 이것저것 끊임없이 배우러 다니는지, 글을 쓰고 모임을 빠짐없이 참석하며.. 소위 시간을 허투로 쓰지 않는 사람중 손가락안에 꼽히는 인물 중 내가 있다고들 말한다.  

이것이 내 삶의 태도이고, 나의 패턴이라 여겼다.

그 열정은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은 내마음의 그림자가 만들어낸 산물이자 에너지였다.


외할아버지는 실향민으로 바닷일을 하셨는데, 그래도 엄마가 어릴적에는 마을에서는 제법 배도 있고 꽤 한 자리 차지 하셨다고 한다. 5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엄마는 첫째가 딸이라는 이유로 온갖 집안일은 다했고, 엉킨 그물 풀기, 집안 살림하기, 동생들 챙기기 등등 고등학교에 합격했지만 진학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렇게  집안일만 하다 성인이 된 후 빨리 시집이나 가라는 할아버지 등살에 중매로 10년의 나이차가 나는 아빠를 만나 한적한 시골마을로 시집을 갔다고 한다. 할아버지 밥상에 올라간 계란 하나에 먼저 젓가락을 얹었다가 할머니께 된통 혼난 그날을 잊을 수 없어 계란에 한이 맺혔다고..

엄마의 유년기는 열등감이 되어 내 자식에게 만큼은 뭐든 다해주리라, 그렇게 이를 악물로 살아온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런 엄마의 사랑은 소소한 일상에서도 자식들 바라기로 번져갔고, 엄마의 인생은 뒤로 한채 오직 자식들을 위한 삶에 모든 것을 내걸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어도 특별한 날이면 나는 새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엄마는 그 당시 버스로 30분 걸리는 시내에 나가 빨간 바바리 코트와 구두를 사 신기고, 뽀끌뽀글 파마머리에 내 나이 7살 되던 해 미용실에서 귀도 뚫어 주셨으니, 남보다 뒤쳐지지 않는 자식으로 키우고 싶으셨던 엄마의 마음을 충분히 알겠다.

감사하게도? 엄마는 직장을 다니셨기에 소위 학교일에 치맛바람을 날리는 열정까지는 그치지 않았다.

그저 운동회때 학부모 달리기에 나가 내 아이 기죽지 않게 1등을 하고, 어깨에 힘을 줄 뿐..


엄마는 무엇으로 사는가? 라고 묻는다면 엄마 인생의 100이 자식이었다고 나는 감히 말해본다.

자식만 바라보고 살다 보니, 금목걸이가 있어도 자식이 어려운 일이 있는 듯 하면 부탁하지 않아도 자꾸만 어디서 돈이 생기는지 소소하게 봉투를 건네신다. 엄마 목에 걸려 있던 금목걸이와, 팔찌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집안일을 하지 말라고 해도 자꾸만 하시고선 여기저기 아프다 하신다.

퇴근해온 딸 옆에 올망졸망 앉아서 엄마엄마를 부르는 손녀딸들에 둘러싸인 내 딸이 못내 안스러운지

손녀딸들에게 엄마 밥좀 제대로 먹자며 지켜보다 못해 버럭 화를 내신다.

나는 괜찮은데.. 이또한 내가 살아가는 방식인데..

다함께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간다그랬다 안간다 그랬다 번복하기를 수차례, 가기 전부터 내 진을 다 빼놓으신다.

이내 딸 주머니에서 돈나가는게 아까우신지 자꾸만 변덕을 쓰신다.

내 어깨가 쳐저 있으면 무슨일이 있냐고 자꾸만 물으신다. 그냥 좀 모르는척 내버려 두면 좋겠는데..

자꾸만 물으시니 어느순간 짜증섞인 목소리로 아니라고 말해 버린다.

내 딸 힘들까봐 지인도, 연고도 없는 타지에 와서 손녀딸 키워주시고는, 아둥바둥 사는 모습에 딸 눈치 보느라 용돈 달라는 말도 당당하게 못하시곤 내내 미안하다 하신다.

뭐가 그리 미안하고, 뭐가 그리 눈치보이고, 뭐가 그리 걱정이신지, 왜 이렇게 걱정을 쌓아 놓고 살아가는지..

결혼할때 해준게 없다고, 해줄 수 있는게 없으니 일하는데 애들이라도 봐줘야지..라며 그렇게 당신몸이 병들어 가는데도 자식 딸들 봐주느라 친구도 없이 보내온 시간들...

그 시간이 다시 트리거가 되어, 화가날때마다 엄마의 불끈불끈 솟는 서운함이 만들어 내는 말 '애 봐준 공은 없다더니~' 로 우리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는 폭탄을 불러 일으키지만...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다짐한다.


- 자식일에 태연해지기

- 자식한테 미안하지 않기

- 각자도생, 부모일은 부모일, 자식일은 자식일

- 걱정보다는 묵묵히 응원하기

- 말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해 내고 있는 중이라 믿고 지켜보기


ㅎㅎ 내가 말해 놓고도 살짝 기가 찬다. 그 어떤 부모가 자식 일에 태연할 수 있겠는가...

그저 조금은 서로의 삶을 챙기자는 뜻으로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럴려면 나의 주의가 자식들에게 온전히 묶이지 않아야 한다.

그럴려면 무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그 일의 끊을 놓지 않으려면 역량을 쌓아야 하고, 그기 위해서는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나의 열정을 만들어 내는 신념이 되었다.


일에 가치를 부여하며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는, 혹은 시간 관리를 잘하는, 혹은 성실히 살아가는, 열정적인..

이 모든것은 나의 감투이자 허물일뿐,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아 오늘도 나는 이렇게 최선을 다해 또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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