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은정 Jul 31. 2021

색깔 전쟁

아이돌팬덤에서 배우는 브랜드팬덤

중세 시대 스코틀랜드인들은 켈트의 체크무늬 색깔로 자신의 클랜(clan)을 나타냈다.

(이건 겨우 200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는 ‘만들어진 전통(invented tradition)’이란 주장도 있다.)

색깔로 자신의 소속과 신분을 나타내는 것은 오래된 관습이다.


현대의 클랜(clan)은 혈통이 아닌 취향을 바탕으로 모인다.

그들은 풍선의 색으로, 응원봉의 불빛으로 자신의 소속을 드러낸다. 여러 팬덤들이 모이는 드림콘서트에 가면 어떤 응원봉을 들고 있는지에 따라 우리 진영과 상대 진영을 구분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시각적 아이덴티티를 보여준 최초의 팬덤은 ‘클럽HOT’다. 그들은 흰 우비를 입고 흰 풍선을 손에 들었다. 이에 대응하는 젝키팬들은 노란색 풍선으로 자신들의 진영을 이루었다. 색깔 전쟁의 시작이었다.

하늘색, 핑크색, 빨간색, 초록색, 연두색. 팬덤의 색깔은 정체성이자 자부심이며, 구심점이었다. 지금도 아이돌그룹들은 모두 공식 색깔을 갖고 있다. 이 공식 색깔을 중심으로 굿즈, 커뮤니케이션이 진행된다.


색의 스펙트럼이란 다양한 듯하면서도 의외로 제한적이라, 새로운 아이돌그룹 런칭시 공식 색깔 지정은 매우 어려운 과제다. 나름 다른 색깔이라고 골랐지만, 선배 아이돌 그룹의 지정색깔과 비슷하면 색깔을 지키려는 팬덤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공식 색깔 논쟁을 겪지 않은 아이돌 팬덤은 한 팀도 없다.


고육책 중에 하나는, 팬톤 컬러명을 공식색으로 정확하게 지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구별하기 어려운 미묘한 차이지만, 일단 팬톤 컬러명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색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두 세가지 색깔을 같이 쓰는 것도 흔하다. 로즈쿼츠(Rose Quartz)와 세레니티(Serenity), 어떤 색인지 상상이 가는가? 따뜻함과 청량함의 이중적 매력을 지닌 세븐틴의 공식색이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풍선의 자리를 응원봉이 대신했다. 그룹명, 팬덤명, 그룹로고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응원봉들의 디자인들은 재밌고 놀랍다. 마마무의 응원봉은 말 그대로 ‘무우’를 형상화했다. 야구몽둥이를 형상화한 아이콘의 응원봉은 택시 잡을 때 최고다. 지금의 응원봉은 IOT기술이 접목되어 원격 조정까지 된다. 응원봉의 생명은 독창적 디자인, 발광력, 그리고 여전히 불빛의 색깔이다.


도대체 왜 색깔인가? 색깔이 왜 중요한가?


첫째, 색깔은 가장 직관적인 구별의 매개다. 동서양 모두 근세 이전에는 신분별로 입을 수 있는 옷의 색깔이 달랐다. 상하관계를 즉각 인식해야 하는 신분제 사회에서, 색깔은 가장 효과적인 지배 수단이었다.


둘째, 모든 색깔은 역사와 문화를 거쳐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회적 함의를 갖고 있다. 누구에게나 초록은 자연, 하얀색은 순수함이다. 빨강, 보라, 파랑, 검정 모두 함의가 있다. 누구든 그 색깔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색깔의 사회적 함의가 내 것이 된다는 뜻이다.


모바일 시대 색깔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손에 잡히는 물성이 없는 서비스 브랜드를 소비자가 시각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매개는 색깔이 전부다. 네이버의 초록, 카카오의 노랑처럼 말이다. 우리는 카카오를 노란색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생각해보면 카카오에게 노란색 제품은 없다. 노란색 앱 아이콘이 있을 뿐이다.


브랜드가 스스로의 존재를 정의하고 다양한 터치포인트에서 정체성을 지니면서 어우러지기 위해서는 꼭 자신만의 색깔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브랜드의 색깔은 어떤 기준으로 정해야 할까? 몇 개의 칼라와 그 칼라를 대표하는 브랜드를 중심으로 생각해보자.


1.     나의 아이덴티티를 반영하는가?


‘열정’은 무슨 색일까? 분명 인간의 감정에는 색깔이 없지만, 우리는 모든 감정을 색깔로 묘사하는데 익숙하다. ‘열정’은 ‘빨간색’이다. ‘열정’이라는 키워드는 젊음, 상쾌, 명랑 등의 감정으로 확대된다.


그렇다면 이 열정적 빨강의 메타포를 소유한 브랜드는? 코카콜라다. 빨강이라는 매력적인 색깔을 수많은 브랜드가 차용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빨강의 주인은 코카콜라다.

‘코카콜라’하면 무엇이 연상되는가? 코카콜라 홈페이지에서 이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다. 1위는 톡 쏘는 맛, 2위는 빨간색이다. “코카콜라 맛 그 자체가 첫 번째 비밀 레시피라면, 코카콜라 레드는 두 번째 비밀 레시피다.” 코카콜라의 글로벌디자인총괄 제임스 서머빌(James Sommervill)의 이 말은 브랜드에게 있어 색깔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코카콜라의 미각이 빨간색이라는 시각을 통해 공감각화된다.


2.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가?


브랜드의 색깔이란 사회적 함의를 바탕으로 우리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우리만의 특별한 이야기란 무엇일까? 노란색을 생각해보자. 색채심리학에서 노란색은 ‘따뜻한, 밝은, 화려한, 상쾌한’을 의미한다.


“카카오톡 말풍선으로 시작된 카카오 옐로는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점을 의미합니다.” 카카오는 자신의 색깔 노란색에 커뮤니케이션 시작점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지구와 인류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살아있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잡지에서 시작되어 엔터테인먼트와 어패럴까지 확장된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철학이다. 이 브랜드는 노란색 사각형으로 유명한데,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내셔널지오그래픽만의 관점 즉 카메라 프레임을 상징한다.


‘노랑풍선’을 보자. 우리나라 여행업계 3위 브랜드인 노랑풍선은 이름부터 로고까지 ‘노란색’을 강조하고 있다. 왜일까?  “구름 사이로 날아오른 노랑 풍선은 가볍고 자유로운 이미지와 여행이 선물하는 다양한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여행의 설렘이 곧 노란색’이라고 노랑풍선은 이야기한다.


나의 철학, 나의 이야기를 색깔과 어떻게 연결 지을 수 있는가? 이것이 색깔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야 한다.


3.     카테고리 전형성에서 벗어났는가?


한국에 처음 방문한 디자이너와 인천공항부터 강남까지 동행한 적이 있다. 그가 사무실에 들어서며 처음 했던 말은 ‘한국 사람들은 정말 녹색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녹색 간판이 아주 많아요.’ 였다. 친환경이 이 시대 가장 주요한 사회적 아젠다로 부상하면서 수없이 많은 기업과 브랜드들이 녹색을 자신의 대표색으로 활용하고 있다.


‘녹색’을 보면 어떤 것이 연상되는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연’이라고 답할 것이다. 실제로 색채심리학 조사 결과도 압도적으로 ‘녹색은 자연’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그런데, 녹색을 대표하는 브랜드는? 이 질문의 답은 크게 두개로 나뉜다. 네이버, 혹은 스타벅스. 결코 ‘자연’과 관련 있는 브랜드는 아니다.


앞서 아이덴티티를 대표하는 색깔을 선택하라고 이야기했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전형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친환경, 자연… 이것은 카테고리지 아이덴티티는 아니다. 스타벅스 역시 초창기 로고는 ‘커피’의 전형적 칼라인 갈색이었다. 이것을 녹색으로 변경하면서 ‘스타벅스는 녹색’이라는 인식이 만들어졌다. 스타벅스가 아직까지 갈색 로고였다면? 스타벅스라는 브랜드를 완성하는 요소 중 칼라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왕관을 쓴 ‘스타벅스 요정’을 더 현대적으로 만들었다. 구태에 얽매인 듯한 갈색을 버리고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일 지오날레의 초록색을 선택했다" 하워드 슐츠의 말에서도 전형을 벗어나 나만의 브랜딩을 하라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시각 70%, 청각 20%, 기타 각각 10%. 인간이 사물을 인지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감각의 순이다. 70%를 차지하는 시각의 영역,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색깔이다. 브랜드가 자신만의 색깔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자신의 색깔을 갖으려는 팬덤, 자신의 색깔을 지키려는 팬덤. 그들의 색깔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팬덤을 가질 (브랜드의) 자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