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코로나마스
코로나 락다운 2년 차, 연말 분위기가 사그러들은 크리스마스 시즌이네. '빼꼼'하고 잠깐 락다운이 풀렸을 때, 남편하고 풀죽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핑계 삼아 일본 호텔체인인 오쿠라 호텔에 가기로 했어.
럭셔리 호텔이 많은 암스테르담이지만, 오쿠라 호텔은 좀 특별해. 우선, 번잡한 센터를 벗어난 곳에 있어. 그래서 자전거로 가거나 걸어가면 되어서 더 남다르달까. 관광지와는 동떨어진 곳에, 수퍼마켓 대신 호텔에 가는 느낌이 재밌기도 하고 편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유럽식 호텔과는 다르다는 게 곳곳에서 느껴지거든. 그게 신선해서 더 좋아하게 되는 것 같다.
일본이나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화강암 건물, 공손한 서비스, 아름다운 원목 인테리어, 정갈한 음식이 마치 한 쪽 발은 도쿄에 두고 한 쪽 발은 네덜란드에 둔 것 같은 기분이야.
오쿠라 호텔이 암스테르담에 들어선지 벌써 50주년이라고 하더라. 방에 비치된 50주년 기념 잡지를 기사를 읽다가 무려 역사 이야기까지 읽게 되었어. 기사에 따르면 호텔의 창립자 중 한 명이 나가사키 출신이래. 그런데 나가사키가 일본의 네덜란드 빌리지가 있는 곳이래.
네덜란드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본 따 만든 나가사키의 테마파크가 역사성이 없는 게 아니더라구. 네덜란드는 일본이 유일하게 무역을 허락한 서양 국가였는데, 데시마라는 나가사키 옆 작은 섬에서의 활동만 허가했대.
그래서 나가사키 출신인 창립자는 호텔의 해외 브랜치로 네덜란드를 첫 장소로 정했다나봐. 아마도 네덜란드의 건축물들을 보고 자라면서, 네덜란드 진출에 대한 꿈을 갖게 된게 아닐까?
이 곳의 우중충한 갈색 벽돌의 검소한 건물들도 사실 이국적인 시선으로 본다면 참 아름답지. 성인이 되어 다시 돌아온 암스테르담은 당시 겨울이었거든. 뺨을 때리게 춥고 흐린 날씨에 음산한 교회의 탑에서 울리던 종소리. 이상하게 동화속에 있는 것 같아서 비디오를 촬영했었지. 그 여행자의 관점을 다시 찾기에 오쿠라에 잠깐 머무는 게 좋은가봐. 동양적 정신과 암스테르담에 대한 애정이 동시에 느껴져서 말이지. 정말 동네에 숨겨진 오아시스 같은 곳이 되었어.
창립자가 50년 전에 암스테르담의 드 파입 지역을 호텔의 위치로 고른 이유는 이 동네에 오페라가 들어설 계획이라는 말에 럭셔리 인프라를 구축하고 이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래. 오페라는 재정 문제로 들어서지 못하고 결국 오쿠라만 남게 되었지. 동네는 복작거리고 럭셔리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호텔만큼은 지금도 럭셔리의 상징으로 남아있어. 일본식 조용하고 드러내지 않는 아름다움을 연상시키면서도, 곳곳에 있는 네덜란드에 대한 정성스러운 홍보가 마치 암스테르담에 여행 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어. 요새는 일상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참 소중해.
오쿠라의 21층에서 내려다본 암스테르담의 남쪽 풍경은 물안개가 자욱했어. 어두운 아침 하늘을 뚫고 보이는 파란 하늘빛은 마치 렘브란트의 그림 같더라.
크리스마스가 다가와서 그런지 우리처럼 스테이케이션을 온 사람들이 좀 있었어. 그동안 문을 닫았던 (이제 또 닫았지, 락다운 레벨이 높아져서) 사우나나 수영장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보이더라구.
코로나 시대라고 해도, 사우나나 수영장, 짐도 예약제이고, 철두철미하게 깨끗한 곳이라 믿고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지. 역시 시간을 안 지키고 그냥 계속 있는 사람들이 있더라.
여기서 재밌는 이야기 하나. 네덜란드의 사우나는 혼성이야 (쓰고 보니 일본도 그런가?). 그리고 사우나에서는 수영복은 안 입는 게 에티켓이라고 수건만 두르고들 들어가. 좀 그렇지? 네덜란드의 개방적이고 나 몰라라 하는 문화의 단면인 것 같아.
무려 더블데이트 사우나까지 한다는 걸 들었을 때는, 완전 문화 충격이었어. 이곳의 사우나는 목욕탕은 없고, (그리고 때미는 곳도 없고) 건식하고 스팀룸 정도 있는데, 보통 수영장하고 붙어 있어. 사우나가 주종인 시설은 날짜를 정해서 언제는 수영복을 입고 언제는 탈의해야하고 이런 규칙을 가지고 있더라.
우리는 사우나에 간다면 항상 수영복 입고 가... 아직 뭐라고 하는 사람은 못 봤어. 그러고보니, 왜 벗는 게 에티켓인거지?
그날 간 오쿠라 사우나에서는 아저씨들이 많아서, 들어가자마자 바로 유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스팀 룸에 들어가서 눈 정화(?)하고 마침 발견한 1인용 여성전용 사우나에서 네덜란드의 습한 물추위 (워터카우드 waterkoud)를 떨쳐내 보았네. 1인용 여성전용 사우나를 생각한 이런 배려, 너무 고마워. 일본인이 마련한 호텔이 아니었다면 알 수 있었을까, 이런 마음?
먹는 건, 코로나 때문에 모든 게 룸서비스로 되었어. 식당 종류도 일식과 프랑스 레스토랑이 같이 있는 호텔이고, 조식 부페도 일본 가정식 아침식사 (미소국, 연어 구이)와 콘티넨탈 부페가 같이 있다는데, 룸 서비스로는 그런 다양함을 경험하지 못해서 아쉽네. 코로나 락다운이 끝나면 경험해볼 수 있겠지. 맛있기로 유명하더라.
저녁 때 출출해서 시켜 먹은 랩 샌드위치는 대박 맛있었어. 평범해 보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맛!
룸서비스로 온 아침식사는 흔히 볼 수 있는 유럽의 조식이었지만 맛있고 정말 정성들여 만든건 확실하더라.
특별한 날, 특별하지 않은 날, 암스테르담에서 찾기 힘든 정성과 배려를 마음 가득하게 느끼고 싶을 때. 오쿠라 호텔에서의 조용한 힐링이 생각나나봐. 그 고요함과 차분함, 아무래도 동양적 정서가 아니면 만들기 힘든 것 같아.
호텔에서 나와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 조용한 일요일의 거리가 좀 새롭게 느껴지고 반가운 게 호텔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닌가 싶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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