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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착착 Oct 10. 2019

"나 이제 고기 못 먹을 것 같아."

양 목장 방문기와 강구구의 채식 선언

지금은 밤 열한 시. 운전을 한 시간 반 했다고 아까 집에 들어오자마자 폭풍 낮잠을 자고 이제야 일어났다. 오랜만에 바깥 밥을 먹었더니 너무 짰나 보다. 일어나자마자 물을 일 리터쯤 마시고 씻고 앉으니 잠이 다 깨버렸다. 오늘은 즐거운 날이었으니 일기를 써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랜만에 강구구가 휴가를 받아 내가 한국 가기 전에 함께 보낼 시간이 생겼고, 오늘은 그 첫날이었다. 오늘은 아침 여덟 시부터 일과를 시작했다. 더 자고 싶었지만 강구구가 새벽 다섯 시부터 깨서 억지로 더 잤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나도 일어났다. 오분만 더 자려고 이불에 쏙 들어가며 내 밥 좀 데워놓으라고 했다. 그리하여 일어나자마자 미역국에 밥을 먹었다. 내가 밥을 먹는 동안 강구구는 아침부터 어제 사놓은 치킨을 먹었다. 내가 채식을 하므로 우리는 이렇게 종종 밥을 따로 먹는다. 강구구는 치킨을 정말 좋아한다! 뉴질랜드에 살면서 가장 걱정했던 것도 치킨을 마음껏 못 먹는다는 점이었다! 물론 여기도 한국식 치킨이 있지만 한국처럼 다양한 브랜드와 선택지가 있는 게 아니고, 그나마 강구구의 마음에 든 치킨집은 그래도 8km 정도는 운전해서 가야 하고, 배달이 되는 게 아니라서 직접 가져와야 한다. 그 탓에 운전을 잘 못하는 강구구는 내가 없는 동안에는 그 치킨은 꿈도 못 꾼다. 그래서인지 나 있을 때 많이 먹어둬야 한다며 틈만 나면 치킨, 치킨이다.


"아, 오늘은 빵 사 먹으러 갈 수 있겠다!"

오늘의 계획은 양을 보러 농장에 가는 거였다. 근데 아까 눈뜨자마자 무심코 우리가 좋아하는 인기 있는 프랑스 빵집이 떠올랐다. 아침 일찍 가지 않으면 맛있는 빵은 다 팔리고 없는데, 우리는 늘 일을 하면 아침에 해서 좋아하지만 잘 못 갔었다. 강구구가 반색을 하며 가서 빵 사 먹자고 해서 거기부터 가기로 했다. 10km 정도밖에 안되고 고속도로를 타는 것도 아니어서 강구구가 운전을 했다. 한국이었으면 꽤 먼 거리였으려나? 거기에서는 운전을 안 해봐서 모르겠다. 근데 여기는 뭐 워낙 상업시설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고, 기본적으로 모든 게 멀어서 저 정도면 집 앞까지는 아니어도 자주 갈만한 수준이다. 날씨가 화창하지는 않지만 오랜만에 조수석에 앉아 봄이라고 핀 꽃들을 보니까 기분이 좋았다. 흐린 날의 뉴질랜드는 사진이나 영상으로 찍으면 별로 예쁘지가 않다. (나의 실력 부족 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에 담기에는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더라. 맑은 날에는 하늘이 워낙 채도 높고 쨍한 파란색이라 다른 나무나 꽃의 색깔은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다. 매일 봐도 매번 놀라운 그 하늘과 이글거리는 태양이 눈부셔서 감탄하기 바쁘다. 그런데 하늘이 회색빛으로 톤다운이 되니까 다른 것들이 보였다. 나무도 풀색, 초록색, 연두색, 노란색, 베이지색까지 색깔이 다채롭고, 한국만큼 흐드러지게 핀 벚꽃 거리는 없어도 틈틈이 봄색깔을 가득 입은 꽃나무들도 한 그루씩 끼어 있어서 더욱 볼만하다. 가는 내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구구가 주차까지 완벽하게 마치고, 빵을 고를 시간이 왔다. 나는 아침에 밥을 먹고 나왔기도 하고, 막상 오니까 먹고 싶은 게 없어서 디저트로 먹을 만한 빵 하나만 고르고 말았는데 강구구가 내가 먹고 싶어 보였던 빵까지 다 결제해 갖고 와서 앉았다. 그냥 너무 크고 푸짐해 보여서 먹을 엄두는 못 내고 '맛있어 보인다!' 했을 뿐인데 이걸 왜 샀을까? 나는 '아니 이걸 어떻게 다 먹냐고!' 했지만, 그 빵은 우리가 고른 빵 중에 제일 맛있었다. 이럴 때는 또 강구구의 선택이 현명했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나는 언제나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만큼만 골라서 먹고 끝내는데, 강구구는 늘 '남으면 싸가면 되지!' 하면서 한껏 넉넉하게 고른다. 결국 또 싸왔다. 아, 집에 음식 남는 거 진짜 싫은데! 하지만 맛있었으니까 이번에는 인정이다.


빵이랑 같이 커피도 한잔씩 마시고 다시 출발했다. 이때부터는 이제 한 50km는 더 가야 해서, 내내 내가 운전했다. 왕복으로 한 시간 반 정도 운전한 거다. 왔다 갔다 하는 동안은 피곤한지도 몰랐는데 집에 오니까 진짜 피곤했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는데 가는 동안 날씨가 점점 더 악화됐다. 도착하니까 빗줄기가 조금 더 굵어졌고 슬슬 추웠다. 



양, 돼지, 당나귀, 타조, 오리, 그리고 닭.


Farm은 정말 '농장'이었다. '목장'인가? 아무튼. 그냥 Free-Range 에그는 이런 곳에서 오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2불을 내면 동물들에게 줄 먹이를 살 수 있어서, 그걸 사서 들고 다니면서 먹이를 줬다. 알파카도 있고 양도 있고, 돼지도 있고 당나귀도 있고. 무슨 동물들이 진짜 잔뜩 있었고, 푸르디푸른 뉴질랜드다운 광경이었다. 아기양이 특히 귀여웠어. 근데 비 오고 추워서 금방 돌아보고 바로 나왔다. 중간에 강구구는 막 따라오는 닭을 보며 "닭다리가 저렇게 생겼구나. 이제 닭을 끊어야겠어." 했다. 아니 근데 그게 진짜가 될 줄이야!

직접 촬영한 목장 이미지

"잠깐만 쉬자."

"내가 커피 사 올게! 롱블랙?"

차 안에 들어오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그거 잠깐 걸었다고 춥고 지쳤다. 다시 운전해서 집까지 갈 생각에 막막했다. 이렇게 먼 길은 아마 처음 와본 것 같다. 우리는 정말 외출을 잘 안 하고 나들이도 잘 안 간다. 갑자기 멍해진 나를 보던 구구가 커피를 사 오겠다며 나갔다. 잘 키운 강구구 쓸모 있구나! 커피도 잘 사 오고, 운전도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분담하고!


강구구 생일선물로 아이패드를 사주기로 해서, 그거 보러 백화점에 갔다가 원하는 모델이 없어서 그냥 나왔다. 거기서 집까지 오는 길에는 내가 힘들어하니까 강구구가 운전했다. 다른데 가볼까 하다가 둘 다 너무 힘드니까 일단 집에 가자고 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때가 고작 한시밖에 안됐었는데! 역시 우리는 둘 다 저질체력이다. 한쪽만 저질체력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 한 명이 맨날 나오자마자 집에 들어가자고 했다면 아직 체력이 남은 다른 한 명은 얼마나 불만이 쌓이겠어!



[속보] 고기둥이 강구구 고기 못먹겠다고 선언, 결국 비건 메뉴 주문!


집에 와서 조금 누워있다 보니 힘이 조금 나기도 하고 배도 고파서 네시쯤에 다시 저녁 먹으러 나왔다. 집 앞에 있는 베트남식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거기는 비건 메뉴가 두 갠가밖에 없는데, 강구구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메뉴는 아니다. 강구구는 따뜻한 국물을 좋아하는데 그건 다 고기가 들어간다. 나는 그래서 두부 들어간 볶음 국수 같은걸 시켰고, 강구구는 한참 고민하다가 그냥 두부랑 채소볶음에 밥이 나오는 비건 메뉴를 시켰다. 비건 메뉴라니. 고기고기둥이 강구구가 '비건 메뉴'를 시켰다(ㅠㅠ)! 이 감격! 강구구가 예전에 '나도 채식할까?' 했을 때 내가 '왜 그래? 너는 고기 아니면 안 먹잖아! 큰일 나! 해가 서쪽에서 떠! 그냥 고기 먹어!' 했을 정도로... 강구구는 고기 없으면 못 사는 인간인데!


"뭐야 확실해? 진짜? 왜 고기 안 먹어?"

"아 오늘 동물을 보고 와서 좀 그래."

"뭐야 동물을 보고 왔더니 고기가 안 먹고 싶어?"

"아까 내가 돼지한테 밥 줬단 말이야. 돼지가 나한테 밥 달라고 입 벌렸고."

"돼지가 밥 달라고 해서 돼지 안 먹어?"

"우리는 교감을 했어. 근데 어떻게 돼지고기를 먹어."

"아, 고양이 안 먹듯이?"

"그렇지!"

"아니 그럼 소 먹어. 비프도 있잖아."

"아냐. 소도 아까 거기서 봤어. 야채 먹을 거야."


브로콜리, 컬리플라워 등 강구구 스타일이 아닌 정말 채소들이 가득 볶아져 나왔고, 강구구는 묵묵히 먹었다. 그러고는 '채소도 먹으니까 괜찮네.' 하는 게 아닌가? 되게 신기하고 놀라웠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동물을 보고 오는 게 영향이 있을 수 있구나! 몸에 좋다는 설득도, 올바르다는 설득도 강구구에게는 별로 통하지 않았었기에... 좀 충격적이었다. 아니, 나는 동물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우리 엄마는 맨날 내가 동물을 사랑한다고 오해하는데, 고양이가 있으니까 키우는 거고, 그냥 채식이 올바르니까 하는 거고 그렇다. 사실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게 가장 크다. 공장제 축산업이 너무 잘못됐고 사라져야 하고! 인간이 너무 잔인하기 때문이지! 나는 그냥 개별 동물을 그렇게 사랑하고 동물이 예쁘고 그렇지는 않다. 아까도 동물 밥 주는 체험이 있었는데 그것도 강구구만 했다. 나는 동물 밥 주는 것도 싫어한다. 거기서 비 오는데 왜 내가 비까지 맞으면서 남의 애들 사료를 줘야 해! 돈 안 받고 일하는 기분이다. 타조가 나를 따라와서 싫어서 도망갔고, 강구구는 웃기다고 동영상 찍었다. 나는 야외 활동 싫어해서 기도 빨리고 여기저기 털도 많고 냄새도 나서 거기에 간 것 조금 후회했다. 돼지도 돼지들끼리 둘이 싸우고 소리 지르는데 무서웠다. 오리도 막 날아다녀서 무서웠고 재미없었다. 나는 그냥 진짜 강구구가 잘 놀아서 간 거지! (다년간의 경험으로 강구구가 잘 노는 곳에 가야 둘 다 행복하다는 걸 알았다. 최착착은 싫은 것 조금 참을 수 있지만 강구구는 얄짤없이 표정에 티 난다. 심지어 일어나서 집에 간다.) 근데 강구구는 정말 동물 사랑하는구나. 좀 인상적이다.


어쨌든 강구구가 채식에 긍정적인 입장이 되어서 기쁘다. 그렇지만 온천 가자고 했더니 수영복 입어야 되어서 싫다고 하고, 놀이공원 가자고 했더니 무서운 거 타기 싫다고 해서 다 못 갔는데! 다음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고 놀아야지.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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