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다음 스테이지로

by 업무자동화Theo

업무개선 학습동아리를 만들고, 자체 개발 역량을 키우기 위한 홍보 활동, 교육을 진행하며

동료들과 함께 프로세스를 바꾸기 위해 애썼다.


반복 업무는 확실히 줄었고, 그 효과도 분명했는데

그만큼 고부가가치 업무에 시간을 쏟아 성과를 낸 게 있냐? 하는 질문에는 자신있게 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시작된 게 조직문화 활동이었다.


우리 회사에는 전사 차원의 조직문화 담당자, 즉 'CA(Culture Agent)', 조직이 있었고, 각 본부의 대표 CA들이 모여 전사적인 프로젝트를 함께 기획하고 추진했다. 전사 CA들은 CEO 간담회에 초대되어 의견을 개진하거나, 전사 차원의 조직 문화 프로젝트를 기획/추진하는 등 주요 소통 창구 역할도 수행했다.


앞서 언급한 여러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회사에 내 이름이 퍼졌다. 사실 자동화나 동아리 뿐만 아니라 시스템을 새로 개발한 것도 있었고, 이런저런 다양한 활동을 많이 했었다.

'뭔가를 바꿔보려는 사람 같다', '정말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그 결과, 매년 한 번씩 선발되는 본부 조직문화 담당자에 추천되었다. 전년도에 전사 CA를 맡았던 분이 나를 추천해줬고, 나도 자원을 했다. 이 역할은 수 백명 규모의 본부를 대표해 전체 조직문화 활동을 총괄하는 자리였다.

당시 조직은 구매외 다른 조직까지 함께 묶인 본부로 개편되었다.


나는 이 중 구매 본부를 대표하는 CA였고, 다른 부서에서 뽑힌 6명의 CA를 대표하는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2023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본부 대표 CA로 활동을 시작했다.


하필 그 시기에 암울한 상황이 닥쳤다. 그룹사 내 회사 간 성과급이 차등 지급이 된 일이 생겼고, 회사 내부 분위기가 정말 안 좋았다. 우리 회사의 노조는 본사에 와서 사장실을 점거하고 삭발식을 진행헀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노조를 지지했다.


보상 뿐만 아니라 승진제도에도 문제가 터져나왔다. 회사에서는 성과 기반 보상을 하겠다고 했으면서도, 여전히 연공서열 중심의 문화가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 연도만 채우면 자동 진급이고, 아무리 성과가 뛰어나다 해도 '이번엔 네가 좀 참아라' 하면서 높은 선배를 승진시키는 게 관행이었다.


게다가 회사는 고령화되면서 과장 이상의 인력 비중이 높았고, 진급이 정체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당시 사장도 소통 Function이 없는 분이었는지, 사내/사외 익명 게시판에는 매일같이 사장을 욕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조직 문화가 거의 뭐 파탄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조직 문화 담당자가 되었다.


더군다나 우리 회사의 임원단의 대부분이 모회사 출신 인사들로 채워지면서 내부 출신의 진급 한계가 명확해지는 상황이 되었고. 이런 구조적인 한계 속에서 직원들의 불만은 날로 갈수록 심해졌다.


내가 생각한 조직문화의 시작은 '일에 대한 몰입'이었다. 아무리 회사가 잘못해도 내가 일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시간을 돌려주는 건 아니니, 내 실력을 키워서 내 가치를 높이는 게 현명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반복 업무를 줄이고 자동화를 통해 시간을 절약한 뒤, 그 시간만큼 더 의미 있는 일을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미 화가 나있는 사람 앞에서는 그런 제안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리더들의 신뢰부터 회복하자는 의미로 <러브레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높은 직급이 바로 아래 직급에게 직접 손글씨로 감사와 인정의 편지를 전하는 방식이었다. 윗사람이 자기가 한 일을 알아봐주고 독려해줄 때 자기 일에 더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부사장님께 계획을 말씀드렸고 통과됐다.

가장 먼저 부사장님이 전무님께 편지를 쓰고, 전무님이 상무님에게, 상무님이 팀장님에게...

내용은 간단했다. 실력을 인정해주고, 고마움을 표현하며, 함께 잘해보자는 격려를 담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구성원 간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그 중 하나는 꽂꽂이 원데이 클래스였다. 남자만 가득한 그 딱딱하고 사무적인 분위기에서 조금이라도 유연하고 일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는 경험을 만들고 싶었다. 꽃이 주는 그 몰랑몰랑한 느낌이 있다.


4~50대 형님들이 직접 꽃을 다듬고, 이를 가족에게 선물하며 평소와는 전혀 다른 감성을 경험했다.

참여 소감을 메일로 보내주시는 분들이 종종 있었는데, 꽂꽂이를 평생 처음해보는데 덕분에 좋은 경험했다고 감사하다는 내용이 많았다.


신입사원 온보딩 채널이 성공한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천여명 되는 전체 구성원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커뮤니티도 만들었다. 커뮤니티 이름을 짓기 위한 공모전도 열었고, 포토제닉 상 포상을 하며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이벤트도 열었다.


물론 업무자동화 교육도 빼놓을 수 없다. 이제는 통폐합된 부서 전체를 대상으로 자동화 교육을 열고 템플릿을 만들어 배포헀다. 개발자를 통해 실시간으로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시간도 만들고, 못보는 사람들을 위해 녹화본도 공유했다.


개별적으로도 편지를 많이 받았었다.

'이런 활동을 열어주셔서 감사해요',

'같이 일하는 책임님과 꽂꽂이 함께 해서 직장 이상의 좋은 순간을 보냈어요. 감사합니다.'


개별적으로 행복하고 좋은 순간은 남겼지만, 그게 전부였다.

여전히 사람들은 회사에 불만이 많았고, 내가 기대한 만큼 문화가 퍼지지도 바뀌지도 않았다.

회사가 갖고있는 구조적 환경은 내가 바꿀 수 없다. 그룹사의 정책적인 방향은 이미 있는거고, 회사원들은 그 안에서 함께 으쌰으쌰하며 회사일에 몰입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근데 딱히 성공한 것 같지 않다. 그냥 직원분들에게 좋은 기억을 많이 남겼다 정도인 것 같다.


이런 답답함을 안고, 어느날은 책임님에게 여쭤봤다.


"이런 저런 활동들을 했었는데 제가 생각했던 대로 이루어진 것 같지가 않습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떼오야, 회사원들이 직장을 다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음.. 열심히 일하고, 자기 실력을 키우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 아닐까요?"

"아니, 회사원들은 퇴근 일찍하려고 와."


그 말을 듣고 잠시 띵했다.


'아, 회사원들은 내가 하는 활동들을 원하지 않는구나. 그분들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구나.'


내가 꿈꿨던 조직문화는 사실 직원들이 원하지 않는 것이었고, 회사 또한 구성원에게 그런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 그룹사는 이미 완성된 시스템을 가진 조직이었고, 평균적이고 무난한 성과를 내는 구성원이 가장 이상적인 인재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자동화, 딱 거기까지 였다.


이 때쯤 나에게도 어떤 변화가 있었는데, 자동화 과제를 끊임없이 발굴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일까지 자동화하려 하고 있었다. 실적이 되기 때문에 억지로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나 자신을 바라보며, '여기서 내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는데, 그럼 다른 스테이지로 가는게 맞지 않을까.'


회사를 다닌 6년 동안 연차도 거의 쓰지 않았고, 해외 여행은 한번도 가지 않았다.

23년 12월, 나는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갔다. 푹 쉬고 올 생각으로 휴양 리조트로 유명한 푸꾸옥으로 향했다.


거기서 6년만에 처음으로 석양을 봤다. 해가 져도 내 위에는 늘 형광등 뿐이었는데.

내 눈 앞에 눈부시게 펼쳐진 석양을 오랜시간 바라봤다.


'앞으로는 이런 것들을 더 많이 보면서 살고 싶어.'


신입사원 때 자동화를 처음 성공시켰을 때의 짜릿함을 나는 아직도 잊지 않는다.

단 3시간만 일했지만, 그 3시간이 정말 가치 있고 누군가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남은 시간 동안은 멋진 풍경을 보고, 내 삶을 온전히 즐기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퇴사를 밝혔을 때 3가지 반응이 돌아왔다.


'회유', '협박', '응원'


'떼오씨, 일단 휴가를 쓰고 쉬면서 생각해봐'

'너 같은 사람 한 두명인 줄 아냐, 나가면 다 망한다'

'전 떼오씨가 언젠간 자기 사업할 줄 알았어요'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여전히, 단순 업무를 줄이고 본질적인 가치에 집중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일을 꿈꾸고 있다.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곳으로 움직이는 것 뿐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퇴사 이후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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