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프로젝트, '발주서 자동으로 보내기'

by 업무자동화Theo

업무자동화 담당자로서 나는 우리 팀에서 자동화할 수 있는 업무 프로세스를 조사해 개발팀에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개발자들은 우리가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에, 최대한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설명하는 게 중요했다.


예를 들어, ERP에 접속해서 로그인 버튼을 누르고,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한 다음에 ERP 트랜젝션 코드로 들어가 어떤 버튼을 누르고, 또 어떤 값을 입력하고, 엑셀 파일을 어떤 양식으로 만들고 생성할지 등.

이 일련의 동작들을 빠짐없이 문서화한 것을 '요구사항 정의서'라고 한다.

나는 이 정의서를 작성해 개발자에게 넘기는 일을 했다.


아무것도 모른채 덜컥 자동화 담당자가 되었으니, 내가 뭘 알았겠는가?

처음엔 당연히 사람들한테 '업무 프로세스 별로 작성해서 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그렇게 받은 내용을 정리만 해서 개발팀에 넘겼더니 바로 빠꾸 받았다.

클릭 하나, 조작 하나까지 거의 업무 하나를 해부한다는 수준으로 조사를 해야했다.

몇 번을 빠꾸당하면서 조금씩 감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모든 회사가 그렇듯, 같은 팀에 있어도 대부분은 내 업무만 잘 알지 다른 사람이 하는일은 모른다. 사실 회사라는 그런 곳이다.

남의 일을 몰라도, 각자 맡은 일부만 잘 수행해내면 굴러가는 곳.


나는 직접 자리에 찾아가 하나하나 물어보며 기록했다. 사람의 손이 타는 작은 조작 하나까지 전부 눈에 담고 익혔다. 그 때 세부 프로세스를 분석하는 능력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우리 실에는 6개 팀이 있었는데, 그중 우리 팀의 자동화 프로젝트만 월등히 잘 나갔다. 다른 팀에도 자동화 담당자가 있긴 했지만, 진행이 지지부진했던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다른 팀의 자동화도 맡기 시작했다.


대기업은 R&R, 업무 매뉴얼, 프로세스 문서가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는 편이다. 타 팀 업무는 아예 몰랐기에, 처음엔 내부에 축적된 기존 문서 파일을 기반으로 세부 프로세스를 공부했고 그 다음엔 현장에서 실제로 적용되는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배웠다.


1년 차였던 2019년에는 내가 속한 조달 업무에 한정해 그렇게 조사를 해왔다. 그러니까 사실상 조달 업무 팀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다 파악한 셈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달 업무의 전체 구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체가 보이니 세부 프로세스의 맥락이 하나하나 연결되기 시작했다. 요구사항 정의서도 훨씬 명확하게 작성할 수 있었고, 개발자들은 내가 만든 문서를 보고 쉽고 빠르게 개발을 완료할 수 있었다.


그 때 내가 실 내에서 처음 만든 프로젝트가 <발주서 발송 자동화>였다.

내용은 이렇다.

ERP 시스템에는 공장에서 요청하는 '발주 요청서'라는 게 올라온다.

'이 부품, 이 부품, 얼마만큼 사주세요' 와 같은 요청이다. 그 요청서를 바탕으로 구매 담당자들은 구매 발주서를 만들고, 그 문서를 각각 협력사한테 PDF 메일로 발송한다.

그 요청서가 매일 수백 장씩 날라온다.


매일 아침부터 반복적으로 해오던 일이었다.

누군가 한명이라도 휴가를 가면 금방 업무가 밀리거나 누락되곤 했다.

딱히 어렵진 않지만 꼭 해야 하고, 근데 또 거추장스러운 그런 종류의 일이었다.


그 일이 자동화되었다.

수백 개의 발주 요청서를 수집하고, PDF를 첨부해 지정된 메일로 발송하기까지 버튼 몇 번 이면 됐다.

기계는 휴가 같은거 안 간다.

우리가 퇴근한 후에도 그 일은 24시간 내내 돌아갔다. 그야말로 성공적이었다.


'이게 되네?'

모두가 해피해졌다.


그리고 코로나가 터졌다.


여담 (재미로 보는 사람의 심리)

'요구사항 정의서'를 적으며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을 하나 발견했다.

요구사항 정의서를 썯달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싫어한다.
책상에 앉아 자기 업무를 하나하나 글로 정리한다는 게 꽤나 귀찮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일을 내가 쓰는거라, 대충 적거나 생략하기 십상이다.
담당자인 나조차도 내 업무를 적는 게 여간 귀찮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누군가에게 설명해주는 상황에서는 말이 달라진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걸 누군가에게 알려줄 때 뿌듯함을 느낀다.
자신의 전문성을 인정받는 느낌, 묘한 만족감 같은 게 충족되는 거다.

그걸 깨달은 뒤부터 나는 절대 혼자 적어달라는 요청을 하지 않았다.
대신 직접 자리에 찾아가거나 화상 회의를 잡아서 인터뷰 하듯이 물어봤다.
그러면 상대방도 설명해주는 걸 즐기고,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을 해줘야 하니 세부 프로세스도 훨씬 정교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이전 03화업무자동화 담당자가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