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부터는 감사하게도 PCB구매까지 맡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조달만 했는데, 이제는 조달과 PCB 구매 업무를 같이하게 됐다.
그 때 코로나가 터졌다. 설상가상으로 현대오트론이 우리 회사에 합병되면서, 오트론에서 담당하던 반도체구매 업무가 전부 우리 실로 넘어왔다.
우리 팀의 업무량만 30%가 증가했다.
근데 코로나가 터진 것이다. 우리 팀은 반도체부품구매 팀이다. 나는 그 유명한 '반도체 수급 대란'의 한복판에 있었다. 당장 언제까지 부품 몇 개가 필요하다는 요청은 계속 들어오는데, 구할 수 없었다. 그런 경우엔 보통 다른 대체 부품을 찾거나, 미리 땡겨서 받거나 일정을 조정하는 업무에 투입된다. 평소에는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났고, 긴급 회의가 하루에도 몇 번씩 잡혔다.
구매 담당자들은 매일 회의만 하기에도 버거운 상황이었는데, 그와중에 원래 하던 루틴 업무까지 하려니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합병으로 일의 양까지 늘어난 상황.
그때, 내가 만들어둔 <발주서 발송 자동화>가 빛을 발했다.
새로 들어온 직원도 내가 미리 세팅해둔 매뉴얼만 따라하면 금방 업무에 익숙해질 수 있었고, 발주서 메일은 컴퓨터가 알아서 보내고 있으니, 팀원들은 비상 대응에 충분히 집중할 수 있었다.
PCB구매라는 새로운 업무를 맡은 후에도 똑같이 자동화 프로세스 조사에 나섰다.
팀원들 하나하나 찾아가서 물어보고 기록하고 익혔다.
공장도 직접 찾아갔다. 우리가 쓰는 구매 시스템과, 공장에서 쓰는 생산 계획 시스템이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장 시스템도 이해해야 하는 건 당연했다.
생산관리팀, 물류관리팀, 자재운영팀, 입고품질관리팀의 각 담당자들을 찾아가서 프로세스를 알려달라고 했다. 택배차가 공장에 도착하고, ERP에 입고확인서를 찍고, 입고 품질을 승인하는 등 모든 과정을 몸으로, 눈으로 익혔다.
화상회의, 전화, 메일을 동원해 전방위적으로 프로세스를 조사했다.
계약직 직원이 하는 업무까지도 싹 다 조사했는데, 그 중 하나는 BL, invoice에서 지급할 물품 구매 대금, 지급할 회사, 지급할 날짜를 추출하는 업무였다. 하루에 PDF 문서를 수백 장씩 보고 데이터를 엑셀로 옮겨야 했다. 그야말로 반복 업무의 끝판왕. (나중에 이 일이 자동화되고 나서 계약직 분들은 덕분에 야근이 줄었다고 내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핫)
내가 다룰 수 있는 반복 업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자동 반복이 있는 모든 곳에 내 손이 닿았다.
자연스럽게 나는 팀 담당에서 실 전체 담당이 되었다.
내 업무, 팀 업무, 타 팀 업무까지 프로세스를 전부 조사하면서 실 전체 프로세스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시스템은 제법 잘 굴러갔다.
그러던 2021년 어느날,
내 안엔 또 다른 갈증이 스믈스믈 올라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