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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ODORE CODE Mar 31. 2020

세번의 인수인계, 한명의 사람.

대치동 마케터 일기 ep. 1 : "컨트롤 프릭이 입장하셨습니다."

Chapter 1. 짜릿해, 최고야, 늘 새로워!


문득, 퇴사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날부로 퇴사했습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다국적기업의 인턴과정을 거치고 스타트업에서 정규직으로 일한지, 딱 반년이 넘어가려던 참이었습니다. 탄력근무의 짜릿함에 취하는 것도 잠시.. 그만 물려버렸습니다. 스타트업의 특성상 매일같이 새로운 일들이 발생하고, 하나같이 전례없던 일들이 생겨나기 마련인데, 당시에는 이것이 너무나도 스트레스였습니다.


그날부로 퇴사를 선언해버렸습니다. (퇴사마렵다!) 인수인계 절차를 빠르게, 정말 빠르게 마치고서 대치동의 S 재수종합학원의 조교알바를 시작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평일에, 무려 오후 세시에 출근하면 되는 조건이라니! 3개월차에 접어들면서 이 황홀한 경험에 아늑히 젖어들 때 즈음, 연락을 한 통 받게 되었습니다.


"왜 거기에 있으세요 선생님."

"바로 옆건물인데, 이쪽으로 넘어오시죠."


애써 점잖은 척을 했지만 타이핑을 치는 내내 웃음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넓디넓은 수도권, 아니 하다못해 서울권인 것도 모자라서, 바로 옆 건물로 간다니! 게다가 전문 스카우터가 아닌, 경영관리자에게서의 직통 연락이라니! 너무나도 짜릿했습니다.

아직 죽지않았구만. 아주 좋아. 아주 마음에 들어.


SNS와 리멤버를 통해서 스카웃 제안을 받아오긴 했지만, 대부분 (1)거리상의 이유나 (2)주변 평판 등의 사유로 매번 아쉬운 소리만을 해야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회사는 꽤 가능성이 높았기에 더욱 흥분됐습니다. 그러나.. 알바계약도 하나의 약속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계약이 만료되기 전까지 가지 못한다는 답변을 드렸습니다.

* (1) 대부분 일산과 대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당시 서브크루에서는 도쿄를 격주마다 오가야하던 때라서, 이제는 제발 지박령이 되는게 하나의 소망이었습니다.

* (2) 고액의 연봉을 제시받았어도, 대표이사님이 법정을 자주 오가신다던지.. 평균근속이 짧은 곳이라던지.. 그런 곳에서는 외주사업으로만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Chapter 2. 끝없는 튜토리얼


그리고 약속의 시간이 모두 끝나고서, 지금의 직장으로 이직했습니다. 회사 분위기에 적응하고, 인사드리러 다니기도 정신없던 찰나에 이어지는 인수인계. 사내의 실무적 역할과 책임이 각기 다른, 세명의 선배들에게 경험을 전달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경험을 다시 회상하면서, 마케터의 직분에게 주어진 역할을 되새겨보려고 합니다.


1. 前 브랜딩 팀장님 (feat. 전임자, 갓팀장님)

회사의 전반적인 경영구조와 주력사업 아이템을 설명해주셨습니다. 뭐 기타등등.. 재직 당시 브랜딩팀이 맡았던 업무를 인계해주셨습니다. 예 맞습니다. 인계 당시에는 전임자 분께서 더이상 회사 소속이 아니실 뿐더러, 이직 후 자리를 잡으신 때였습니다. 사실 문서로만 넘겨주시면 되는 것을 직접 대면해서 말씀해주신 것이니 지금도 너무나도 감사할 뿐입니다. 아직도 갖고 있는, 업무인계 필기본을 볼 때마다 그 특유의 푸근한 말투가 느껴지는 기분입니다. 엉엉.. 잘 지내고 계시죠?


2. 現 행정팀장님 (feat. 행보관? NPC?)

꼰머팀장님 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그래도 츤데레 매력으로 밥을 사주시거나, 먹거리를 툭툭 던져주시는 분이라 딱히 꼰머라고 생각한적 없었어요. (이게 정상은 아니겠죠 네..) 회사에 가장 오래 계신 직원 TOP 10에 들어가신 분인 만큼, 배울 점은 엄청 많기도 했습니다. 각종 문서서식을 비롯해서 원장님, 부원장님, 실장님들의 업무특성 및 성격특성까지.. 정말 세세하게 설명해주신 고마우신 분입니다. 사외에서 전임자에게 업무인계를 받았다면, 사내에서는 행정팀장님이 업무인계를 해주셨다고 볼 정도였습니다.


3. 現 총원장님 (feat. 오너원장님)

원장님의 짬바는 확실히 다르다고 느낀 것이, 상담실장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보다 확실히 더 깊이있고 필수적인 정보를 알려주셨습니다. 선생님의 프로필, 회사의 지향방침과 역사, 분기마다 주문하는 아이템 등을 콕 짚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다만 제가 꼰대인지 몰라도.. 어디 감히 막내가 대표이사한테 직접 1:1로 업무인계를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해봐서.. 표정관리를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있었던게 생생합니다.

* 원장님이 부담스러운건 맞지만, 나쁘게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고, 아니 그 부담스럽다는게 정말 부담스러운게 아니구, 확실히 부담스럽긴 한데 그게 꼭 부담스럽지만은 않아요.. 그.. 제 맘.. 아시죠..?



거즘 한주 내내 출퇴근하면서 튜토리얼을 보게될 줄이야. 뭐 어찌되었든,

나름 탄탄히, 든든히, 딴딴히(?) 튜토리얼을 모두 완수했습니다.

그리고서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아니 왜, 저한테 왜, 뭐때문에 저한테?

본래 담당하게 될 계열사로 근무지가 배정나는 것이 아니라, 대표이사님의 바로 옆 자리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동시에, 그동안의 계획과 포부가 와장창 깨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단 사흘만에 제 역할은 "그.. 홈페이지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특강 및 이벤트 배너와 포스터를 끝없이 찍어내기

교재표지와 현수막을 디자인하고 인쇄까지 책임지기

레퍼런스는 없지만 초안을 세개씩 준비해서 보여주기

홈페이지에 등재될 선생님 사진과 프로필을 기재하기

새로 오픈한 홈페이지 버그를 찾아내고 개선사항 듣기

SNS 페이지 홍보집행과 팔로워 유입분석을 같이 진행하기

블로그, 홈페이지, 엔트리페이지의 애널리틱스 경향보고하기


막내버프로 인해서 저녁밥도 얻어먹고, 많이 이뻐해주시기도 하였지만.. 그만큼 업무를 던져주시면서, 잔업과 중요업무가 뒤섞이게 됐습니다. 극도의 혼란과 공포가 잠시 함께했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후 중요성과 시급성, 업무강도, 대체가능성 등에 따라서 재분배를 시작했습니다.

작년도에 입사하자마자 사용했던 시트다. 고등학생부터 써오던 것인데, 올해부터는 그로스해킹 스터디에서 배운 정보를 입각시켜서 새로 리뉴얼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Chapter 3. 주문예약 가능한가요?


맛집에 가면, 늘 웨이팅이 즐비합니다. 사전예약을 하지 않았다면 기본 10분, 많게는 2시간을 기다려야하는 맛집도 있습니다.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전에 "3월 2주차 즈음에 A에 대한 긴급수정이 올꺼야"라고 언질을 받은 것이 있는가 하면, 약속도 안잡고서 사무실에 찾아와서 "이거 디자인 작업 부탁드려요"라면서.. 레퍼런스와 규격설명을 모두 누락시킨 채로 요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에 컨트롤프릭이 가만히 있기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업무에 순위를 매기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중요성, 시급성, 업무강도, 대체가능성, 리워드로 1~5로 나눈 것입니다. 중요하고 시급한 업무는 주로 중간관리자 이상의 직원분들이 가져오신 리스트로 구성되기 마련이었고, 동시에 "거, 우리 막내 일하는게 빠르고 정확하네"라는 평가를 받을 수있는 리워드가 있었습니다. 사담이지만.. 동일한 업무더라도 스타벅스 커피나 생딸기 요거트를 종종 사주시는 경우, 될 수 있는 한 먼저 작업에 들어가는 등의 핑퐁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경우는 반드시 업무강도와 대체가능성을 파악해두었다는 전제가 붙는데, 브랜딩팀의 여력이 남아있는지를 확인한 후에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팀원들이 대부분 저와 같은 컨트롤 프릭(완벽주의+강박증)을 가지고 있던 터라, 업무가 끝나지 않으면 찜찜하다며 퇴근을 하지 않다보니.. 늘 퇴근시간이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때, 업무강도를 예상소요시간으로 견적을 잡아내면, "이쯤하고 내일 진행하시죠"라는 멘트를 당당히 칠 수 있게되면서 칼퇴를 하게 됐습니다.


시각화된 "맛집 주문예약 노트"를 만들어낸 결과는 생각보다 쾌적했습니다. 현재 업무포화량은 어느정도인지, 그리고 주문자는 누구인지가 확실하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당장 오늘 식사를 불러먹어야할 지, 밖에서 회식을 해도 되는 지가 가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업무가 산재해 있을 때에는, 주문자들끼리 자체적으로 작업요청 시일을 조정하기도 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동안 담당자를 찾아 여기저기 떠나야했던 이전과는 다르게, 브랜딩팀이 센터가 되어서 여러 계열사의 업무를 볼 수 있게된 가장 큰 배경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글감 소재는 학교후배를 만나거나 인터뷰를 할 때마다 가져오는 것들입니다. 다음 번에는 '맨땅으로 매거진 만들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에필로그. "컨트롤 프릭"


하루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서 피자를 꾸적꾸적 입속에 집어넣으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있잖아.. 학교 다닐때 주구장창 끄적였던 학습플래너말야. 그리고 동아리사업 할때 트렐로에서 To-do-list 쓰던 습관말야. 사실 그게 이제는 우리가 쓰고 있는 Duty-Sheet(가제)로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빤히 쳐다보던 친구는, 제게 딱 한마디만 해주었습니다.

"그게 컨트롤프릭이다.."


#THEODORE_CODE #컨트롤프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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