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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앤온리 Jun 20. 2023

회삿돈을 대하는 태도

- 법인카드 사용에 관하여

High Metabolism. ‘활발한 신진대사’라는 뜻이다. 


뜬금없이 등장한 이 영어 표현은 대학생 시절 어학연수 갔던 캐나다에서 선생님이 나에게 썼던 표현이다. 먹기는 엄청 많이 먹는데 몸매는 삐쩍 마른 것을 보니 High Metabolism을 가진 것 같다고 말했었다. 


그렇다. 당시 나는 몸무게 43kg 정도의 마른 체구였다. 하지만 먹는 것은 정말 많이 먹었다. 큰 피자 한판을 시키면 반 이상은 금새 먹을 수 있었고, 친구들과 식당을 가도 1인분 이상은 거뜬히 먹어제꼈다.


이러한 식성은 직장생활 하면서도 바뀌지 않았다. 회사에서 밥을 먹을 때도 체구에 비해 많이 먹었다. 신입사원으로 전자회사에 입사했을 때 본부 사장님과의 신입사원 간담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사장님께서 신입사원 몇 명을 데리고 회사 지하에 있는 양식당에서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메뉴를 주문하라고 하길래 양이 많은 음식을 시켰다. 그러자 사장님을 보좌하며 따라왔던 실무자가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사장님께서는 음식을 남기는 것을 정말 싫어하십니다. 그러니 양이 적은 다른 메뉴를 시키십시오.” 


라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남기지 않을 것이니 걱정 말라고 대답했고, 그 말대로 음식을 깨끗이 싹 다 먹었다. 


나중에 화학회사에 다닐 때도 많이 먹는 식성은 바뀌질 않았다. 하루는 팀장님이 나를 보고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이야기한 적도 있다.


 “정말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인데, 병원에 한번 가보는 게 어때? 이렇게 많이 먹는데도 그렇게 살이 안 찌는 걸 보니 몸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야.”


이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잘 먹었지만 그 와중에도 특히 많이 먹는 날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회사 법인카드로 회식을 하는 날이었다. 그날은 공짜라는 생각에 맛있는 것을 마음껏 시켰다. 인당 1인분 이상은 기본이었다.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마구 주문해댔다. 식탐 부리지 말고 적당히 시키라는 팀장님의 말에 이렇게 대꾸하면서 말이다.

 

“팀장님, 많이 시켜놓고 다 못 먹으면 식탐이 맞아요. 하지만 저는 시킨 건 다 먹을 수 있으니 식탐이 아니라 식욕이라고요!”


사실 개인 돈으로 밥을 먹을 때는 그렇게까지 많이 시켜 먹지는 않았다. 하지만 회삿돈으로 회식할 때는 욕심쟁이 놀부처럼 음식을 주문했다. 다 먹을 수 있다고 공언하며 시켰지만 실은 음식을 남기는 날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내 돈이 아니니까 그렇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회사를 퇴사하고 나서 아쉬웠던 점 중에 하나도 회삿돈으로 하는 회식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내 돈 내고는 그렇게 부담 없이 푸짐하게 주문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퇴사 후 한참 뒤 김승호 회장의 ‘돈의 속성’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그 책에서는 돈이 인격체와 같으며, 남의 돈을 대하는 태도가 내 돈을 대하는 태도라고 말한다. 책의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돈은 법인보다 더 정교하고 구체적인 인격체다. (중략)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붙어 있기를 좋아하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겐 패가망신의 보복을 퍼붓기도 한다. 작은 돈을 함부로 하는 사람에게선 큰돈이 몰려서 떠나고 자신에게 합당한 대우를 하는 사람 곁에서는 자식(이자)을 낳기도 한다. (중략)


내 돈은 엄청 아끼고 절대로 함부로 사용하지 않으면서 공금이나 세금의 사용에 대해선 무심한 사람들을 간혹 본다. 가볍게는 친구가 밥을 사는 차례에는 비싼 것을 주문하거나 단체 회식비용이 몇 사람의 과한 술값으로 지불되는 경우가 있다. (중략) 공금, 세금, 회비, 친구 돈, 부모 돈은 모두 남의 돈이다. 남의 돈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 내가 돈을 대하는 진짜 태도다. 친구가 돈을 낼 때 더 비싼 것을 시키고 회식 때 술을 더 주문하는 행동은 내가 돈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척도다. (중략) 남의 돈을 함부로 하지 않을 때 내 돈도 함부로 취급받지 않는다. 


이 부분을 읽고 엄청 뜨끔했다. 여기서 말하는 ‘회식 때 술을 더 주문하는 행동’이 ‘회식 때 음식을 더 주문하던’ 나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남의 돈이라고 함부로 생각했던 나 자신이 떠오르며 저자가 마치 나를 보고 쓴 글인양 느껴져 정말 부끄러워졌다. 


회사 다닐 때 법인카드를 유용해서 징계를 받은 직원이 있었다. 해외출장 가서 법인카드로 값비싼 외제 스포츠카를 렌트해서 다니던 사람이었다. 사실 출장 가서 법인카드로 렌트하는 것은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도에 맞는 수준의 차를 렌트해야 하는데 본인 욕심으로 과한 차를 렌트한 것이 문제였다. 그 당시에는 그 직원의 징계소식을 듣고 참으로 뻔뻔한 사람이라고 욕을 했었다. 그러나 책 ‘돈의 속성'을 읽고 나니, 징계받았던 직원이나 나 자신이나 별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규정상 문제가 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떳떳해 할 일이 아니었다. 남의 돈 귀하고 무서운 줄 몰랐다는 점에서 나의 행동도 지탄받을 법 했다.


내가 회삿돈을 대하는 속마음과 행태를 남들이나 회사는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돈은 알고 있다. 김승호 회장의 말대로라면 ‘돈 자체가 인격이 있기에’ 내가 돈을 대하는 태도를 돈은 다 알고 있다. 내 돈 만큼이나 회삿돈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아니 어쩌면 내 돈보다 회삿돗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 내 것이 아니므로 더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아직도 큰 돈 모으지 못하고 궁상맞게 살고 있나 보다 싶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회사 다닐 때 회삿돈 귀하게 써서 후에 큰 부자가 되길 바란다. 




그림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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