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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Oct 20. 2019

한밤의 택시 드라이브

떠남의 취향#4. 일상에 치이던 나에게 청량한 위로가 되는 밤이었다.




 밤에 하는 일들은 낮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준다. 산책과 드라이브가 특히 그렇다. 낮의 익숙한 길과 풍경이 캄캄해지면서 낯설게 느껴지고, 발견할 수 없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이유로 어둠속에서 빛을 따라 걷는 밤 산책이나 밤 드라이브를 좋아한다. 새로운 풍경을 준다는 점에서 밤이라는 시간은 마법 같은 묘한 매력이 있다.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밤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지만, 요리 전공 대학원을 다니던 때에는 꿈꿀 수 없던 일이었다. 차도 없었고 매일의 시간이 빠듯하고 팍팍했다. 주중 낮에는 대학원 부설 연구원에서 조교로 일하고 그 중 이틀 저녁은 3시간짜리 수업을 듣고 주말에는 하루에 12시간씩 알바를 했다. 연구원, 대학원수업, 주말 아르바이트가 일정의 전부였다. 일과는 단출했지만 쉴 틈은 전혀 없었다.


 매주 일요일 밤 9시, 알바 퇴근 시간에 맞춰 차를 대기하고 있던 아빠가 부리나케 터미널로 데려다주면 서울 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 시간 동안 자고 일어나 시내버스 막차가 끊기기 전에 부지런히 자취집으로 향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적응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피곤이 쌓여 점점 힘들게 느껴졌다.

 몸도 피곤한 상태에서 엄마가 싸준 김치나 반찬거리, 혹은 계절이 바뀌면서 챙겨가야 할 옷이나 이불을 가져가는 날이면 발걸음은 더 무거워졌다. 처음에는 짐이 많아도 미련할 정도로 무식하게 버스나 지하철을 고집했다. 힘들게 번 돈을 택시비로 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생각보다 쉽게 결심은 무너졌다. 고단한 일정을 소화한지 두 달 반쯤이 지났던 날이었다. 그날은 아예 작정하고 서울 집에 짐을 챙겨오기로 마음먹었던 날이었다. 가장 큰 크기의 캐리어 가방을 챙겨가서 미리 짐을 꾸려두었다. 알바가 끝나자마자 집에 잠시 들러 미리 싸둔 가방에 반찬까지 담았다. 얼마나 많이 넣었는지 가방지퍼가 잘 닫히지 않아서, 캐리어를 눕히고 반쯤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닫으면서 지퍼를 겨우 닫았다.


 “정말 다 가져갈 수 있겠어? 엄청 무거워 보이는 데.”


 엄마는 큰 가방의 크기만큼이나 나를 걱정했다. 차마 캐리어에 다 못 넣은 짐은 백팩에 쑤셔 넣었다. 당장 다음 주에 필요한 것들을 가져가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깨에는 백팩을 메고 한 손으로 캐리어 가방을 끌려 하니 쉽게 끌어지지 않았다.

 

여차저차 아빠의 도움으로 서울행 버스는 탔다. 문제는 서울에 도착해서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청파동 자취집까지의 여정이었다.

고속버스 옆구리에 실린 캐리어를 기사님의 도움을 받아 바닥에 내려놓는 순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내가 캐리어를 끄는 건지. 캐리어가 날 끄는 건지. 엎치락뒤치락 씨름하듯 겨우겨우 터미널 밖으로 나왔다. 어깨에는 행군을 위한 완전 군장을 닮은 배낭도 메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지지 않으려면 철저히 계획하고 움직여야했다.


우선 지하철과 버스 중 무엇을 타야할지 선택해야했다.

지하철은 한번 환승한 뒤 집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환승을 위해 이동해야하는 긴 거리와 수많은 계단을 생각하니 일찌감치 포기하게 되었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지하철은 타면 안됐다.


 그렇다면 버스? 버스는 지하철보다는 덜하지만 백팩을 메고 30kg에 육박하는 캐리어를 두 번씩이나 싣고 내려야하는 게 부담이었다. 마침 전통주 수업의 조교를 맡고 있어서 큰 항아리를 자주 옮겨야했었다. ‘어깨가 빠지면 어떻게 하지? 캐리어를 싣고 버스카드를 찍는 순간, 잠시 방심한 사이에 가방이 혼자 굴러가면 어떻게 해?’ 슬랩스틱 시트콤 같이 망신당하기 딱 좋은 웃긴 상황이 상상됐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아찔했다. 타야 할 버스가 정거장에 도착했지만,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 도로 반대편에서 손을 흔들며 택시를 잡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아, 택시! 택시는 집까지 얼마나 나올까? 한번 알아보고. 괜찮으면, 이번 한번만 타볼까?’

 서둘러 지도 앱을 켜서, 자취집까지의 경로와 비용을 검색했다. 알바 시급으로 치면 2시간 정도 일 한 비용이었다. 한 세배쯤은 나올 줄 알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금액이었다. ‘택시비는 무조건 비싸다.’는 공포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아깝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버스를 타게 될 것 같아서 택시 타는 곳으로 움직였다. 요란하게 캐리어 바퀴 소리를 내면서 택시로 다가가니, 기사님이 내려서 직접 가방을 트렁크에 실어주셨다.






 돈이 주는 편안함은 달콤했다. 타자마자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백팩을 옆자리에 내려두었다. 몸이 가벼워진 것만으로 이미 택시비의 세배는 더 줘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망설이지 않고 택시를 잡아 탄 내가 기특했다.


 “기사님, 청파동이요.”

바로 출발한 택시는 반짝이는 불빛들로 장식된 도시의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도시의 야경을 처음 본 사람처럼 설렜다. 줄지어 선 가로등 불빛이 유난히 반짝거리는 것 같았고, 캠프파이어 불빛을 본 것처럼 마음이 뭉클해졌다.


 늦은 밤 귀가하는 사람들을 태운 차들은 뭐가 그리 바쁜지 서로 앞 다퉈 달려 나갔다. 그 무리 안에는 내가 탄 택시도 끼어있었다.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 번잡한 고속터미널 부근을 지나 반포대교에 이르렀을 때,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반쯤 내린 차창 밖으로 서늘하면서도 상쾌한 밤바람이 밀려들어오고, 좌우로는 도시가 내뿜는 각양각색의 불빛들이 찬란했다. 택시의 앞 유리 너머로는 세련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서울N타워가 보였다. 고개를 돌려 다리 건너를 바라보니 어린 시절부터 한번쯤은 가봐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63빌딩이 보였다.

 서울의 상징인 두 건물이 밤이 되니 남다른 화려함과 위용을 자랑하며 서있었다. 선명하게 달려들던 반대편 차선의 불빛들이 다시 옅어지며 멀어져갔다. 아련한 기분마저 들었다.


 한 주가 마무리 되는 일요일 밤, 반포대교 위에는 차들이 많지 않았다. 다른 차들의 방해 없이 야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창문에 달라붙어서 밖을 구경하는 내 모습을 눈치 챈 기사님이 이내 4차로로 차선을 바꿔주셨다. 그것도 잠시. 빠르게 달리는 차의 속도만큼 다리 위의 멋진 야경은 금세 끝나 버렸다. 한밤의 도심 야행이 못내 아쉬웠다.




 한 밤에 한강 다리 위를 건너는 기분은 밤하늘에 놓인 다리를 건너는 것 같았다.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까만 강물과 깜깜한 밤하늘 사이에 놓인 빛의 다리를 건너는 기분이었다. 동동 떠있는 도시의 불빛을 따라 달리는 것 같았다. 아찔하면서도 선명한 야경에 넋을 잃고 걷다보니 어느새 끝나버렸다. 어찌나 아쉬운지 애틋한 마음마저 들었다.







 무거운 짐과 일상에 치이던 나에게 청량한 위로가 되는 밤이었다. 무사히 청파동에 도착해 무거운 가방을 끌며 터덜터덜 집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잠시 야경에 취한 듯 몽롱한 기분이 계속되었다. 덕분에 무거운 짐의 무게도 잊은 채, 무사히 언덕위의 집까지 짐을 옮길 수 있었다.


 화려한 도시의 밤풍경에 일상의 고단함을 잠시 떨쳐버렸다. 뺨을 때리는 차가운 바람에 한껏 오른 마음의 열도 차갑게 식힐 수 있었다. 그날 밤의 택시 드라이브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 후로 종종 ‘택시 드라이브’가 고단한 한 주를 마무리하는 나의 낙이 되었다. 열심히 한주를 활활 태우며 살고 서울로 향하는 일요일 저녁에는 짐과는 상관없이 택시를 잡아탔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반포 대교 위의 화려한 야경에 시선과 마음을 빼앗기고 차가운 바람에 한 주가 할퀴고 간 상처를 털어내다 보면 다시 다음 주를 살아갈 힘을 얻었다.

 그때의 좋은 잔상이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긴 건지 가끔 볼일이 있어 서울에 가게 되면, 이따금씩 밤의 택시 드라이브가 하고 싶어진다.


 “기사님, 반포대교로 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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