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퇴사하는 이상적인 방법이 있을까?

저 퇴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by 한원석

퇴사를 했다.

혹자는 IMF에 버금가는 경제위기, 경제난이라고 하는데 그래도 계속 문을 두드리다 보니 다행히 나를 위한 한자리는 남아있었다. 뭐, 사실 완벽한 이직은 아니다. 엄청나게 파격적인 조건으로 나를 모셨던 것도 아닌 데다, 누가 뭐래도 난 나가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사람이었으니. 모든 조건들이 다 맘에 들었다면 더할 나위 좋았겠지만, 그런 곳은 내가 서류 합격조차 하기 힘든 대기업 경력직이 대부분이었다. 복지, 월급, 위치 등 내가 포기할 수 있는 부분과 절대 내줄 수 없는 기준선 내에서 적당한 곳으로 이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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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퇴사하는 방법이 있을까?

최종적으로 연봉협상과 처우협의, 최종 출근일을 확정 짓고 나서 이제는 전 직장이 된 현직장에게 나의 퇴사 의사를 밝혀야 했다. 기존에 담당하던 프로젝트가 있긴 했지만, 내가 진행까지는 다 마무리 짓고 갈 수 있었기에 그건 끝내고 가겠다고 말씀드리려 했다.


퇴사는 처음인지라,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게 얘기해야 하는지가 궁금했다. 대부분 퇴사를 할 때 처음으로 얘기하는 게 주변 친한 사람이라고 하더라. 그리고 이게 소문이 그 사이에 돌아 팀장등이 알게 되고, 책임권자가 알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이게 최악이라고 했다. 동의했다.


결과적으로 제일 이상향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직속 상사에게 구두로 먼저 알림
2. 그다음 인사팀(HR)에 공식적으로 퇴사 의사 전달
3. 필요시 상위 관리자나 임원에게도 보고 -> 근데 이미 HR팀에서 연락했을 가능성이 높음
4. 그리고 동료 및 현업 부서에게 공유하기


시점에 따라 차이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건 직속상사에게 공유하기다. 어쨌거나 나와 같이 일을 하고 있는 팀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나는 나의 사수와 팀장에게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다음날 나의 퇴사 소식이 채 일주일도 가지 않아 소문이 다 났다. 게다가 가십을 좋아하는 회사답게, 나의 퇴사 소식은 아주 지저분하고 끊임없는 잡음과 함께 며칠간 재미있는 가십거리가 되어주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냐고?

1. 나의 사수와 상사는 나의 퇴사소식을 모두에게 말을 옮겼다

딱 저 둘에게만 공유를 했었는데, 다음날 몇 명이 알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물론 어차피 알게 될 이슈이기도 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오픈할 생각은 없었는데. 맡고 있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시점이라 시끄러워지길 원하지 않았다. 내가 애도 아니고 "내가 말하지 말라"라고 말을 해야만 그들이 인지하고 말을 전파하지 않았을까? 누군가에게는 담배를 피우면서 담화 주제로, 누군가에게는 카페에서 대화주제로 써먹기 좋은 가십에 불과했다.


2. 친한 사람들의 바운더리가 모호했다

나는 사수와 팀장에게 의사를 밝히고, 나의 동기 3명에게 따로 개인적으로 소식을 알렸다. 이들은 나처럼 언제나 사직서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친구들이었기에 내가 소식을 전하자 축하해 주었다. 이미 소수의 사람들은 알음알음 알고 있었으므로 오픈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고 난 뒤, 나에게 소수의 몇 명이 넌지시 다가와 얘기했다. "원석아, 너는 왜 나한테 공유를 안 해? 섭섭하게. 우리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이 말을 듣고 정말 당황스러웠다. 친하다는 기준이 어떤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친하다의 기준은 사적인 얘기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인데 말이다. 하지만 난 전 직장에서 가급적 나의 사생활을 오픈하지 않았다. (오픈할 수 있는 것들만 얘기했다.) 개인적으로 막역하게 저녁 식사를 먹던 사이도 아니고, 그냥 업무적으로 같이 만나던 사이였을 뿐이었는데 몇몇 사람들은 나에게 '따로' 얘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되려 섭섭하다는 식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입장은 강건하다. 저런 사람들까지 친하다고 나의 퇴사소식을 다 따로 말한다면, 스스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이다. 다만, 나 같은 경우가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3. 입퇴사가 빈번한 곳이 아니다.

특히 경력채용 등 입사가 자주 있거나, 입퇴사가 많다면 이런 소식도 그러려니 할 텐데. 전 회사가 조금 특이해서 한번 들어오면 거의 잘 나가지 않는 붙박이들이 모여있는 회사였다. 그만큼 고용안정성이 대단한 회사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돌이켜보면 오랜만의 나가는 퇴사자에 대한 반응들이 심상치 않았다.


내 딴에도 아쉬운 건 있는 법. 기왕 퇴사까지 말한 마당에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있을까? 그냥 잘 지내라고 안녕을 빌어주면 안 되는 거였을까? 하지만 몇 명은 그 이후 나를 본체만체하는 상황도 생겼다. 직감이라고 하기엔, 어제까지 대화를 잘만했는데 오늘은 나를 보고 쌩까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나보다 어린 사람들도 아닌데,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들이 속 좁게 나오자 나로서도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중에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모른다는데, 이런 식이면 나도 나중에 만날 때 미소 지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꼭 이런 사람들은 언젠간 부딪히던데. 알아서 잘 피하시길.


이렇게 보니 내가 회사생활을 잘 못한 거 아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물론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름 척을 진 사람 없고 인사도 잘하고 업무적으로도 내 할 일은 다 했던 사람이라고 100%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아쉽다. 나름 정이 많이 든 회사였는데. 애정을 많이 갖고 부푼 기대감을 안고 입사했던 나의 첫회사였는데, 끝이 이렇게 되다니 말이다. 꼭 내가 이 직장에서 말년까지 잘 다녀야만 나의 존재감을 확인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 그럴 수 없다.


결과적으로 퇴사하는 당일까지 시끄럽고 지저분했다. 왜 본인이 있는 곳까지 인사하러 오지 않았냐는 말까지 듣고 나니 전 직장에 대한 애정이 다 떨어져 버렸다. 그래, 내가 이래서 이직을 결심했던 거였지. 다들 잘 지내시고 안녕히계십쇼. 어차피 조직에서 나온 이상 처음만 반짝 화제가 될 뿐, 잊힐 것이다. 그렇게 나의 퇴사는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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