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오는 순간을 기다리며
지난 이야기
인텐스한 아산 프런티어 유스를 지난 후, 학교로 돌아와 이런저런 시도에 방황하다가 별생각 없이 인도 여행을 다녀왔다. 급격하게 얇아진 지갑과 인도에 복잡한 고민들을 훌훌 털고 온 덕분일까. 취업 의지를 불태우게 되는데..
마지막 학기였기 때문에 컴퓨터 공학과 졸업 작품을 만들어야 했다. 친했던 동기들은 작년에 거의 졸업을 했고, 학교 다니는 내내 컴퓨터 공학과 사람들과는 친하게 지내질 않아서 어쩌지 싶었는데 동아리에서 만나서 친해진 동생이 통계학과에서 우리 과 복수 전공을 하고 있어서 같이 하기로 했다. 두 명이서 하기엔 힘들 것 같아 한 명을 더 찾던 중에 우리 과 한 학번 후배인 동생도 올해 졸업을 한다고 해서 셋이 팀을 하기로 했다. 나보다 훨씬 컴퓨터 공학과 학점이 좋은 똑똑하고 착한 동생들을 만나서 다행이었다. 졸업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는데, 동시에 이 친구들은 나의 소중한 취업 준비 메이트가 되었다. 인도에 다녀와서 취업해야겠다는 생각이 있긴 했지만, 여전히 나를 '취업 준비생'으로 두는 것에 어색함이 있던 와중이었다. 그러다 8월 말이었던 어느 날, 졸작 동료 중 한 친구가 함께 저녁을 먹던 학교 지하 식당에서 비장하게 말했다. '언니, 아무래도 나 이번 하반기에 꼭 취업을 해야겠어.' 또 다른 친구와 나는, 그냥 설렁설렁 스펙이나 좀 쌓고 졸작이나 열심히 해볼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그 친구가 비장하게 말하자 왠지 우리 셋 다 취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셋 다 하반기에 취업을 성공했다.
아무튼 졸작 동생들이랑 하반기에 취업을 하자고 마음을 먹었으니, 어디라도 지원서를 내야 하는데.. 정말 영 쓰고 싶은 일이 없었다. 상반기 인턴 불합격과 챗봇 과제의 충격으로 개발자를 지원하는 걸 마음속에서 꺼리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쓸 만한 직무가 없었다. 경영 지원이나, 기술 영업을 써야 하나. 현대 자동차나, LG CNS를 써야 하나.. 도저히 쓸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9월 초에는 거의 매일 졸업 작품 친구들과 공대 1층에 있는 스터디룸에 모여서 졸작을 하거나 같이 자소서를 쓰거나 했는데, 다른 친구들은 지원서를 이미 몇 개씩 써서 냈다고 할 때도 나는 '어어 나도 거기 쓰고 있어..'라고 말만 하고 사실은 안 쓰고 있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보통 하반기 공채는 8월 말쯤부터 공고가 나기 시작해서 9월 초면 서류 접수가 끝났다. 내가 어영부영하는 사이 점점 새로 뜨는 공고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현대 자동차의 'what makes you move?'를 묻는 자소서 질문을 보면서, 무엇이 나를 움직이냐고..? 사실대로 쓰면 받아줄 거냐고..라고 집 거실 바닥에 누워서 생각하던 주말이 떠오른다.
에버노트에 그나마 조금 관심 있는 기업과 직무들을 쭉 표에 적었다. 직무와 분야, 자소서 마감일과 전형 방식 등을 쭉 적고 맨 앞에 '관심도'를 추가했다. 그저 그런 곳은 노란색, 좀 관심 있는 곳은 초록색, 별로 안 쓰고 싶은 곳은 빨간색으로 표시했다. 남는 게 없었다. 관심도 빨강인 것은 안 쓰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내가 빨간색으로 온갖 회사들을 칠하는 사이 졸작 친구들은 이미 퀵 오토바이를 타고 시험장을 옮겨 다니며 정신없이 2차 전형 시험을 보러 다니는 중이었다. 그렇게 9월 셋째 주가 가고 있었다. 9월 셋째 주 어느 날도 다른 날처럼 자소설 닷컴에 올라온 공고들을 영혼 없이 보던 중이었다. 넥슨의 공채가 새로 떠 있었다. 스크롤을 내리다 서비스 기획, 게임 기획과 관련한 공고를 봤고, 좀 더 상세히 읽어보니 그동안 내가 해온 일과 비슷한 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버노트에 넥슨을 추가했고, 드디어 관심도 초록을 받은 회사가 되었다. 어 여기는 써봐도 되겠는데? 나의 취업 시즌은 9월 셋째 주부터 다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