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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Jul 30. 2016

국가와 부모

 막걸리에 파전이였다. 친구는 쥬얼리 매장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생뚱맞게 왠 쥬얼리야? 나 원래 관심 많았어. 그래? 그럼 해봐. 친구는 한숨을 내쉰다. 엄마가 그런 일이나 하라고 나 서울까지 학교보낸 줄 아냐고 하는데, 많이 속상하더라. 그런 일이 뭐길래. 그렇지 않은 일은 또 어디있고. 

 건축 설계 공부를 해오던 친구였다. 서울 생활에 지쳐 잠깐 돌아온 광주에서 (돈과 마음과 체력을 회복하여) 편입준비를 하고 있었다. 피어싱이 하나씩 늘어나더니 결국에는 생뚱맞은, 그런 쥬얼리같은 일,이 해보고 싶어진 우리 범씨. 


 친구는 모든 게 흐릿해졌다고 말한다. 웃길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나는 그것이 그녀의 다이어트 때문일거라고 생각했다. 먹어야될 것을 제대로 못 먹으니 기운도 없고, 없는 기운에서는 들어오는 훅 몇 방에는 앞이 흐려진다 진짜로. 

 야 너는 다른 사람들한텐 열라 예의바르게 굴면서 너한테 먼저 예의를 갖춰줘야 한다는 생각은 못해? 나 자신한테 예의를 갖춘단 건 말이야, 나를 끝----까지 믿어주는 거라고. 누가 뭐라든 개뿔, 엿먹어. 무너져도 내가 무너져. 일어서도 내가 일어서고. 피해 안 줄게, 멀리 떨어져 있어. 그리고 그냥 가는 거라고. 괜한 소리를 했다. 막걸리 때문이였다.

 그게 고집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어? 피해를 안 준다고? 언니 때문에 언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음 아픈 것도 이미 피해인거야. (얘도 막걸리를 마셨으니까.)


 내가 내 길을 가는 것 때문에 마음 아픈 사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해의 소지가 큰 말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은 정말 어쩔 수가 없다.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거나 엄마가 해주는 빨래를 입거나 아빠가 해주는 돈을 받아먹는 어른아이 행세를 포기한 이후로 나는 내 이름만으로 살아가는 연습 중이다. 내가 박가영으로 살기 시작한다는 것이 박대용과 김주심의 딸인 것을 지워내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모의 밥과 빨래와 돈과 헤어지는 것이 그들과의 단절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건 관계의 숨막히는 촌스러움 아닌가. 

 관계의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내가 부모를 벗고 집 아닌 다른 곳들로 걸어나감으로써 엄마와 아빠 또한 나를 벗고 다시금 자신들의 이름표를 달아보려는 애씀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라 믿는다. 내게 필요한 것이 부모로부터의 물질이 아니라 부모라는 존재가 될 때, 그들의 존재만으로 안정감을 느낄 때야 우리의 관계는 비로소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행사해야 할 결정권을 그 누구에게 양도해버리는 무지함은 아직까지 내가 유아기에 머물러있다는, 어쩌면 영원히 애기 짓만 하다가 뒤질 수도 있다는 반증이다. 내가 갇혀 있는 유리창이 수백 번은 깨부숴지길 바란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 아플 거라는 착각의 유리창도 산산이 부서져야 한다. 부모라는 첫번째 유리창이 깨지지 않을 때 우리는 언제나 사회의 인형, 부모의 인형으로서만 살아질테다. 나는 춤을 추겠다. 처음을 해보면 한 번 더 깨볼 용기가 생긴다. 다음으로 뭘 깨볼까. 내 몸 속 알알이 가득 차 있는 생명력이 활개칠 수 있도록  춤을 출 것이고, 그러다 부숴버려야할 것들을 만나면, 국가도 돈도 권력과도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라. 

 범씨가 쥬얼리 일을 해보면 좋을텐데, 그걸 피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으로 시작한 타자질이 희한하게 흘러왔다.


 내가 내 삶을 결정해나갈 때 주변인들이 짊어진다는 피해란 것의 실체가 뭔가. 


  우리 은주 아직 티오 기다리고 있어요. 언니 부모님은 친척들을 만나서 언니가 임용에는 붙었지만 자리가 안 생겨 계약직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거짓말이다. 은주 언니는 임용에 떨어졌으니까. 그리고 언니 부모님한테는 그것이 남들한테 내비치기에 부끄러운 사실인 것이다. 누굴 위한 거짓말인가. 

 언니는 지금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준비 중이다. 다시 임용 시험을 쳐야할지, 캐나다에 한 번 가볼지 한참을 고민하더니 가겠다고, 그렇게 결정이 났다고 말했다. 언니 아빠가 뭐라셔? 응, 아직 말 안 했어. 근데 나 갈거야. 언니가 캐나다행을 결정함으로써 언니 부모님은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또 다시 거짓말을 해야할 것이다.  

  내가 내 삶을 결정해나갈 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사랑하는 게 맞을까) 짊어지는 피해란 것은 타인들의 시선에 밑보이지 않기 위해 말 맞춰 하는 거짓말쯤 되지 않을까.  


 한국 사회의 부모들은 자식을 소유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구분할 줄 모른다. 본인이 살아온 인생으로만 판단했을 때, 그것이 (개인적 자유를 향하는 대신) 위험한 일이고, 자식이 그 위험을 감수하려 들 때, 이 사회의 부모들은 불통이 된다. 불통은 대한민국에 깔려있는 기조같다. 대화가 필요없는 것이다. 높디 높은 대통령 말이니까 함부로 토달지 말아라, 경험 많은 어른들이 하는 말은 옳은 말이니 따르라, 부모는 자식이 잘 되는 것만 바라니까 부모 말만 잘 들으면 된다 식의 무논리의 믿음들은 오가야할 대화를 말살시킨다. 대화가 없으면 (대통령은 국민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없고) 부모들은 아이들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없다.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내버려두는 자유줌에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내 마음대로 행동하길 원하는 것은(많은 경우 폭력적인)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는 것이고, 상대를 소유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짓밖에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부모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짓을 하기 위해 자녀의 성공을 바라서는 안된다. 혹은 그렇지 않은 척, 자식을 위한 척하는 위선을 뽐내서도 안된다.   


 덧붙여, 

 정치가, 복지가 잘 되어있는 나라의 부모들은 그렇지 않은 나라의 부모보다 자식들의 진로 결정을 자식들의 몫으로 내버려두는 자유줌을 잘할 가능성이 크다. 

 고학력자일수록 연봉이 큰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 당연하고, 정치에 철학이 없어서 돈 밖에는 아무것도 없어진 한국사회 속에서의 부모들은 자식들이 돈을 많이 벌거나 먹고 살기 안전한 일자리를 구하도록 종용한다. 내가 뼈빠지게 고생하여 너를 일으킬테니 너는 내가 늙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어딘가에 버림받을 일만 남았을 때 효도를 다 해다오. 얼마나 불안할까.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이 뼈빠지게 일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임을 몸으로 체험한 부모들이 본인이 늙어가는 와중에, 혹여나 내 자식이 한쪽 눈으로 뭘 자꾸 흘끔거리더니 남은 인생을 별이나 쳐다보는데 쓰겠다고 굴면 말이다.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별 같은 건 허상이라고 억압할 줄 알고, 그 젋은이의 부모들에게는 약육강식 사회의 진면목을 체험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더 강하고 독한 아이를 키워내도록 홀릴 줄 안다.

 순이 남자친구 쥴랑(프랑스인)은 한국에 와서 지내는 몇 달 동안 한국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지켜보면서 불쾌함을 느꼈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국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어떤 계약 관계같다는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심지어 우리 할아버지도 내가 세계를 여행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축복해줬어. 그리고 떠나보라고 말했어. 왜냐면 우리 부모님은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나를 키워주는 게 자기들 역할을 끝이라고 생각하거든. 그 이후로는 내가 선택해야하는 삶이라고 생각하셔. 한국부모처럼 자식이 뭐가 되어야하며, 자신들 부양까지 책임져야한다는 사고 자체를 안해. 그건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잖아, 계약관계지.'

 그가 저렇게 말했을 때 나는 우리나라 복지가 똥 같아서 그렇다고 말했다. 늙어서 기댈 곳이 자식 밖에 없는 나라라서 그렇다고. 너희 똥은 훨씬 굵고 바람직하여 좋겠다고. 

 가만있어도 더운 여름날 폐지를 줍는다고 비쩍 마른 몸으로 수레를 끌고 다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스쳐지나가며 괴로운 적 있다. 국가가 왜 필요한가. 강자만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약자들은 어떻게되든 전혀 상관치 않는 국가라면 나는 국가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 이런 사회 속에서 계속해서 살다가는 어느 날엔가 어떤 이들이 노인복지, 사회보장제도같은 건 국가의 악이니 없애버리자며 봉기할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내 나라에 비관적이 되었을까. 



 선택할 줄 아는 것,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의 무구한 다양성을 인지하는 것,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하고 한 번 쯤 해보다 때려치고 또 뭘 해보고 해보다 다시 때려쳐가며 재미를 보는 것, 재미만큼 내가 별 것 아니라는 확인하는 것, 세상도 별 것인 게 없다는 확인 하는 것, 선택한 것에 재미를 보다 풀이 죽고 가라앉다가 다시 일어서는 책임을 지는 것이 나의 일인 것을 아는 것, 아 씨발 너무 힘든 날이 있다는 것과 또 있을거란 걸 직감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감에는 오르가즘(만큼)보다 가치있는 벅참이 있다는 것. 정말 혹시나 죽는 날까지 사랑하며 살거란 것. 

 이 모든 게 나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 살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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