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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Jun 30. 2020

29일 단상

돈의 노예가 아닐 수 없지.

1. 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는 매일 밤을 층계참에서 지새운다. 스탈린이 그의 연주 도중에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조용히 사라져가던 시절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에 가슴을 졸이며 언제쯤 본인이 잡혀갈까 생각한다. 가족들 앞에서 끌려가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 

 쇼스타코비치는 살아남는다. 쇼스타코비치는 말한다. '겁쟁이가 되기도 쉽지 않았다'고. 그는 스탈린 정권을 위한 음악을 만들었다. 스탈린이 죽고 나서도 음악을 만들었다.


  이틀 동안 조금 패닉이었다. 4개월간 받아온 CERB(Canada Emergency Response Benefit)를 토해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했었다. 자그마치 8000천불을, 이미 내 통장에 들어온 돈을 다시 뱉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차분해지려고 애써봐도 (겉으로 차분한 척은 가능했다) 속에서 열불이 났다. 

 한인 커뮤니티에 애매모호한 내 상황에 대한 글을 올렸더니 짧은 시간동안 많은 댓글이 달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혼자서 판단하고 돈 받을 생각을 했냐', '걱정 말아요, 글쓴이님과 같은 부적격자의 신청은 반드시 걸려서 내년에 다 빼앗길 거예요.', '왜 신청한 건지 이해할 수 없지만 당장 내뱉으세요.'식의 공격적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댓글이 전부였다. 나는 조금 상처 받았던 것 같다. 도움을 바라고 쓴 글에 달린 댓글들에서 나를 비난하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끓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도 댓글로 싸워댔다. 

'저같은 상황에 처하신 분들이 있을까요? 혹시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하는 게 최선인지 알고 계신 분이 있을까요?' 라고 물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잘 몰라서 지나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잘 알아도 지나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안다고 생각하고 아는 것만 말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안다고 확신하고 아는 것과 함께 가치판단도 내릴 수 있다. 내 글에 달린 댓글들은 자신들이 가진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 나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리거나 비난을 함께 제공했다. 나로서는 이 부분이 상당히 이해가 안 되는데, 그건 바로 그들이 공감할 줄 모르는 댓글들이라는 사실에 있다. 

 짐작컨대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던 사람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일주일치 소비 상한선을 정해서 10월까지는 어떻게든 버텨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 안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까, 이런 저런 고민에 휩싸이던 중이였다.) 연방 정부는 몇 가지 조건을 만들어 covid-19 때문에 일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에게 한달에 2000불씩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그렇게 보조금을 받으면서 정말 오랜만에 주 40시간 노동에서 벗어나는 사치를 만끽하며 쉬고 있던 중에 갑자기 모든 보조금을 뱉어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내가' 처했다고 가정해보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 사람 좆됐네, 어떡하냐 참, 무슨 방법은 없을까, 같은 것이지 않나. 물론 진짜 내가 그 상황에 처했을 때의 좆됐음과는 차원이 다르겠지만, 어쨌든 누군가에게 지금 별로 좋지 못한 일이 생겼을 때, (그 사람이 나쁜 놈인지 어떤 놈인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자신과 같이 노동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안타까운 마음이 생기지 않나.  

 

 월요일이 되자마자, Service Canada에 전화해서 내 상황에 대해서 물었다. 상담원은 100% 확신하는 게 자신의 일이 아니라 확신을 줄 순 없지만, 코로나 때문에 새롭게 시작하기로 한 곳에서 쉬프트가 계속해서 연기되었고 결국 가게 문이 닫으면서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증명해줄 증거물만 있다면 별 무리없이 CERB를 계속해서 받을 수 있을거라고 알려줬다.   


'저기, 여러분들. 당신들의 확신이 틀릴지도 몰라요. 서비스 캐나다 언니가 저보고 you should be fine 이라고 했거든요? 앞으로도 계속 확신을 더하고 공감은 덜어내고 불필요한 판단과 비난을 덧붙이면서 열심히 댓글 활동하시길 바래요.'로 시작하는, 작심한 분개글을 올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소심하게 여기다 일기나 쓴다. 


 그래서 나는 이틀동안 조금 패닉이었고 조금 많이 우울했다. 영학이는 내가 자기가 만난 가장 덜 자본주의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과연 내가? (영학이가 만나 본 사람들은 나만큼 적은 게 틀림없다) 로즈한테 돈이 좀 없어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 있다. 과연? 

 8000불을 잃을 수도 있을 상황에 처해보니까 (정말 나중에 내뱉어야 할지도 모른다. 서비스 캐나다 언니가 100% 확실한 건 아니라니까. 그래도 뭐, 지금은 살만하다) 돈이 좀 없어도 괜찮고 싶다는 내 말은, 좀 덜 자본주의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 내 마음은, 진실로 가식이였구나 싶다. 

 돈이 너무 중요하게 느껴질 때문마다 비참한 기분이다. 내가 너무 초라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내가 너무 작은 사람 같다. 너무 작게 내 것, 내 돈을 지켜내고 싶은 사람. 8000불에 덜덜 떨었다. 영학이한테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척을 했다. 부끄럽다.


 윤주 언니가 통화 중에 '돈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야'라는 식으로 몇 번을 말하길래, 언니 오늘 왜 이렇게 돈 얘기를 많이 해? 라고 물으니까, '너랑 얘기할 때는 네가 돈이 없는 걸 아니까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게 되네.'라고 대답했다. 나는 폭소를 터뜨렸다. 내가 그렇게 없이 보이게 굴었나? 싶기도 하고, 언니는 도대체 내가 얼마나 가난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싶다. ㅋㅋㅋ   


  돈은 권력이다. 나는 돈 앞에서 용감해질 수가 없다. 


 '그러나 겁쟁이가 되기도 쉽지 않았다. 겁쟁이가 되기보다는 영웅이 되기가 훨씬 더 쉬웠다. 영웅이 되려면 잠시 용감해지기만 하면 되었다. 총을 꺼내고, 폭탄을 던지고, 기폭 장치를 누르고, 독재자를 없애고, 더불어 자기 자신도 없애는 그 순간 동안만. 그러나 겁쟁이가 된다는 것은 평생토록 이어지게 될 길에 발을 들이는 것이었다. 한순간도 쉴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고, 머뭇거리고, 움츠러들고, 고무장화의 맛, 자신의 타락한, 비천한 상태를 새삼 깨닫게 될 다음 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겁쟁이가 되려면 불굴의 의지와 인내, 변화에 대한 거부가 필요했다. 이런 것들은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용기이기도 했다. 그는 혼자 미소를 지으며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이러니의 즐거움은 아직 그를 버리지 않았다.'         <시대의 소음> 중에서


 쇼스타코비치는 겁쟁이가 되는 것이 일종의 용기라고 말한다. 겁쟁이인 채로라도 살아남겠다는 것이 용기라는 의미인가. 그럼 가난한 겁쟁이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용기가 필요할까. '내 가난을 변명하고, 머뭇거리고, 움츠러들고, 타락하고 비천한 상태'를 그래도 계속해서 타넘어 가며 살아가는 용기일까. 


 자본주의에서 영웅이 되는 방법은 돈을 많이 벌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영웅이 되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 영웅이 되지 않고도 영학이랑 잘 살 수 있을까, 쓸모없는 회의가 들이닥친다. 물질적으로 고상하게 사는 일도 틀려버렸지만, 정신적으로 고상하고 싶은 내 허영도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것이였다. 

 그냥.. 청소기를 돌렸다. 밀대로 바닥을 밀었다. 침대에 들어가 조용히 잠들었고 다음 날 아침에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아침을 먹었다. 그러다 보면 돈도 고상도 다 지나갈 것이라고 그냥 믿었다. 

 

2. 오늘은 어차피 우울한 날이니까


 우울한 이야기를 더 하자면, 나는 아무래도 좋은 친구가 아닌 게 분명하다.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는 친구한테 연락을 했는데, 꼭 전화를 해야겠냐고, '카톡으로 말하기 어렵니?'하고 물어왔다. 어렵다. 우울증도 어렵고 그걸 업고 있는 그 친구 목소리를 한 번 듣는 것도 어렵다. 너무 바빠서 전화할 정신이 없다는 친구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무슨 말을 하면 분명 배려 없는 말이 나올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친구에게 무슨 말을 하고 무슨 말을 하지 않아야 할지 모르겠다. 내 마음이 편하자고 전화를 하는 일은 만들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하다가, 나마저 전화를 안하고 안부를 묻지 않으면 얘는 우울한데다 외롭기까지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모든 게 귀찮은 걸까 싶기도 하고. 


 아프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너무 많은 말을 했던 적 있다. 

나는 이제 그 친구를 만날 수가 없다. 그 애는 내가 취할 수 있는 모든 연락을 단절했다. 아무도 그 애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 그 친구가 내 인생에서 사라졌는데, 그 친구의 인생에서도 내가 사라졌을텐데, 나는 너무 잘 지낸다. 그 애는 어떻게 지낼까. 


 카톡으로 말하는 것도 카톡 전화로 말하는 것도 어렵다. 왜냐면 나는 너한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카톡을 하거나 전화를 해도 역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끼니까. 우리 둘 다 깨어 있고, 둘 다 급한 일이 없어서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드문 시간에 너랑 연락이 되서 기쁜 동시에 너랑 나랑 너무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다는 거리감 때문에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별로 마음에 안 들 때가 생겨. 그냥 너랑 나랑 가까이 살면, 우리가 서로 만나고 싶을 때 한 시간쯤 차를 타고 가면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살면, 네가 카톡으로 말하기 어렵냐고 되물을 때 내가 맥주라도 한 잔 마시자고 할 수 있잖아. 여기선 그게 안돼. 그럼 너랑 나랑 조금씩 마음이 상해서, 그런 것들이 조금씩 쌓여서, 혹시 우리가 서로를 잃게 되면 어쩌나. 


그 친구 없이 나는 너무 잘 지내지만, 나는 내가 그 친구를 잃고 좀 더 누추한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안다. 

 


3. 무엇에도 길들여지지 않은 김훈, 목놓아 울다/ 윤춘호 논설 위원


"사회의식? 그 무슨 말라빠진 사회의식입니까? 돈 많은 사람들이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어주고 그들로부터 세금을 뜯어내는 것이 나은 겁니다. 저는 인간의 바탕은 개별적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공동체적 존재라는 전제하에서 주장되고 있는 모든 가치가 개별적 존재 속에서 구현되지 않으면 공허한 것입니다." (2007. 4. 중앙일보) 


"나는 되고 싶은 게 별로 없어요.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욕심도 없어요. 그런 목표 자체가 없어요. 글을 통해 여론을 형성하겠다는 목표, 그런 허영심이 없어요. 나의 논리 앞에 남을 대령시키려는 의도가 없어요. 말을 가지고 남과 정의를 다투려는 의도가 없어요. 그저 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의 전부예요" (2014. 10. 한국언론문화포럼) 


"여생의 시간을 아껴서 사랑과 희망, 인간과 영성, 내 이웃들의 슬픔과 기쁨, 살아 있는 것들의 표정에 관해서 말하고 싶다." (2020. 6. 16. 기자간담회) 


출처 : SBS 뉴스  

원본 링크 :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843968&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강섬님이 읽어주는 걸 들었을 땐 이 기사가 정말 좋았는데. 찾아서 읽어보는데 첫 문장부터 거슬린다. '그의 매력은 수컷의 매력이다'? 길들여지지 않는 수컷?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걸 왜 굳이 수컷과 연관시킬까. 그냥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면 안돼?


 어쨌든 윤춘호 논설 위원이 들춰내는 소설가 김훈의 변화는 여전히 흥미롭다. 인간의 바탕이 개별적 존재라고 말하는 2007년의 김훈에게 동의한다. '사랑과 희망, 이웃들, 살아있는 것들'에 관해서 말하고 싶다는 2020년의 김훈을 존경하고 싶어졌다.


그는 아직도 되고 싶은 게 별로 없을까. 되고 싶은 게 별로 없고 단지 내 자신을 글로 표현하고 싶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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