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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Jul 06. 2020

허영, 개인적인

7월 5일 단상

1. 허영

 나는 내 글에서 허영을 본다. 너무 싫었다. 감추고 싶은 것을 아무리 감춰놔도 드러나는 것은 드러났다. 내가 뱉는 말들은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었지만 내가 쓰는(쓰기 위해 고른) 글자들은 뻔뻔하게 남아있다. 거기서 빈 소리가 났다.

 허영을 감추는 일을 덜 하고 싶다. 허영을 그만두겠다는 다짐은 불가능하다. 내게 허영이란 벗고 싶다고 벗고 입고 싶다고 입을 수 있는 옷 같은 게 아니다. 허영은 피부고 살이다. 코르셋을 입고 감쪽같이 감췄다고 믿었는데 방심한 틈을 타서 삐져나오고야 마는 옆구리살 같은. 딴에는 파운데이션을 여기저기 꼼꼼히 두드려댔는데 백열등의 화장실 조명 아래서 치명적으로 누렇게 드러나는 내 인중 같은.


 내가 가지고 있는 빈 소리로 할 수 있는 말과 글을 하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지 않는 빈 소리의 말과 글로 지껄이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빈 소리가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안타깝게도 나는 그냥 허영이고 만다. 허영을 벗겠다고 말하고 벗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언제나 부자연스럽다. 살과 피부를 벗겨낼 수는 없는 법이므로.

 허영스럽지 않은 사람이 정직한 글을 쓰는 것과 같이,

벗을 수 없는 허영을 타고난 사람은 그 사람이 풍길만한 치졸하고 불안하고 문란한 글을 쓸 것이다. 그 글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사람의 역사다. 세상에는 정직에서 태어난 인간이 있는 것처럼 허영에서 태어난 인간도 있다. 허영은 허영을 쓴다. 


 허영대로 쓴다. 부끄럽다. 부끄럽지만 쓴다. 세상에는 가난과 허영과 노동과 혼란에서 태어난 인간도 있다고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그 인간은 그가 목격한 이야기를 쓸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그의 이야기. 

 

  <팡세>에서 파스칼은 말했다. 인간은 허영 덩어리라고. 강신주는 이어 말한다. 예쁜 사람은 더 아름답고자 하는 허영을 예쁘지 않은 사람은 예쁜 것 대신에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허영을 이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쓴다는 허영을 갖고 살아간다고. 비어 있는데 꽃인 척 한다고.

 <이동진의--독서법>에서 이동진은 말한다. '자신의 정신의 깊이와 부피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래서 영화든 음악이든 책이든 즐기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빈 부분을 메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적 허영심일 거예요.'


 한 명의 허영 덩어리로써 내 빈 부분을 메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싶다. 부끄러운 것을 부끄러워하는 시간을 가지되 그것에 매몰되고 싶지 않다. 부끄럽게 나의 빈 소리를 인식한 뒤에는 내 소리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그리하여 쓴다. 


2. 가장 개인적인


 나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세상에 태어나서 부모와 사회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장인 동시에 억압이였다. 돈과 권력, 여자와 남자, 인간과 동물, 사장과 노동자, 가족과 결혼 사이에서 생겨나는 온갖 규칙과 꿈과 차별과 세뇌들. 

 자신이 성장해왔다고, 앞으로도 성장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절대적인 것에 대해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시야에서, 자기 뇌의 범위에서, 배제된 것들을 계속해서 배제시키면서 미래가 가져다줄 환희를 기다린다. 그는 그 자신에게서 억압의 흔적을 찾기보다는, 환상을 만들어내기로 한다. 그래서 멋진 인간이 되기로 한다. 그는 (의도하건 의도치 않건) 켜켜이 환상을 쌓고 깊숙이 억압을 묻는다. 억압이 공기인 세상에서 자유의 공기를 마시는 코스프레를 한다.


 자신이 받아왔던 억압에 대해서 뒤늦게 발견하고, 거기에 치를 떨고, 슬프다고 우는 사람들을 오래도록 만나보지 못했다. 자기 몸과 마음에 새겨진 억압의 그림자를 인정하는 슬픈 사람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안부나 물으면서 맥주를 같이 마시고 싶다.  

 내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지 알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수 밖에 더 있냐고, 담담하게 말하는 사람. 우리는 각자가 짊어지고 있는 억압의 그림자에 대해서 잠시 생각한다. 할 수 있는 한 그것을 벗겨내자고 작게 다짐한다.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럴 수 없을 때까지 새로이 태어나고자 애쓰고 싶다는 허튼 소망을 주고 받는다. 그와 맥주 잔을 앞에 놓고 시선을 마주 하면서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도저히 혼자서는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을 때, 나만큼이나 용기가 없는 사람들과 작고 허튼 다짐을 그렇게 주고 받고 싶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 한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말을 인용하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들뢰즈는 조금 다르게 말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고(<차이와 반복>).  

내가 내 삶을 '진솔하게' 살아낼 때 나는 나다. 나는 아무와도 같지 않다. 진솔하게 사는 게 뭔지를 생각해본다. 진솔하게 사는 것은 내가 나라고 믿는 것에, 내가 나로써 옳다고 믿고 싶은 것에 작은 틈새라도 생겼을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부숴버릴 수 있는 것, 그래서 내가 나라고 부르기 위하여 나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였다고 믿었던 것들을 부숴버리면서 나를 '생성', '새롭게 태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내가 (다른 누구의 삶도 아닌) 내 삶에서 마주하는 것들을 진솔하게 살아낼 때 나는 가장 개인적일 수 있다. 그것은 물론 가장 창의적일 테지만 무엇보다 가장 보편적일 것이다. 가장 진실할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두 번 태어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엄마의 자궁에서 한 번 태어나고 자신에게서 다시 한 번 더 태어날 수 있다면. 

 엄마의 몸 밖으로 나온 작은 아이는 부모와 사회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그랬던 아이가 타자들의 욕망과 나의 욕망을 구별하려고 시도할 때, 내가 살던 집과 세상을 안락한 공간으로 보는 렌즈를 벗겨내고 맨 눈으로(물론 맨 눈 마저 맨 눈이라고 믿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컬러 렌즈보다는 맨 눈 일테니까) 내 자신과 내 바깥을 응시하려고 할 때, 나는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미 내게 주어진 구조(억압)에 대한 인식 이후에야 우리는 (사르트르가 말하는) 무의 순간을 계속해서 맞이할 수 있다. 나는 인간이 자유롭기 위하여 태어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구조를 부수기 위해서 태어나야 하는 존재다.


 그래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말은, 어떤 권력에 대해서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나로써 가장 개인적인 사람이, 너는 너로써 (나와는 다르게) 가장 개인적인 사람이 될 뿐이다. 

 내가 개인적일 때 상대를 개인적으로 볼 수 없다면 폭력이 시작된다. 내가 보편적이라고 믿고 상대를 개인적 주체로 보지 않을 때에도 억압이 생겨난다. 내가 개인적이라고 믿지 않고 상대가 보편적이라고 믿는다면 자발적 복종이다. 

 오직 가능해야 하는 관계는 개인적인 개인들의 만남이다. 


'우리의 삶이나 우리가 만든 작품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의 본질이 '차이'이니 우리가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살아내면 타인과는 다른 '차이'를 보이게 된다.---- 결국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의 단독성, 나만의 차이를 반복해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나의 삶과 나의 작품은 단독성을 가질 수 있고...--단독성의 깊이가 바로 보편성의 척도였던 셈이다.'       

                          <철학 대 철학(강신주 저)/ 가장 단독적이어야 가장 보편적일 수 있다는 역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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