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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Jul 14. 2020

건물은 무너지고 춤을 추고

1. 책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원숭이도 이해할 수 있을만큼 쉽다는 말 같길래 읽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싶었다. 

 책은 상당한 도움이 됐다.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을 먼저 읽었다면 첫페이지를 읽자마자 나를 질겁하게 만들었을 용어들을 저자 임승수는 쪽집게 강사처럼 친절하고 쉽게 알려준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펴내면서 왜 '상품'에 대해서 먼저 말했는지, 돈과 자본이란 어떻게 다른지, 자본가가 주물럭 거려서 만들어내는 두 가지 잉여가치('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란 무엇이고 둘은 어떻게 다른지, 노동자를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성과급제'는 얼마나 악한 취지를 내포하고 있는지, '착취율'과 '이윤율'을 어떻게 계산할 수 있는지, '자본의 회전시간'은 연간 이윤율에 어떤 달콤한 가치를 부여하는지, '자본의 분파'는 어떻게 나뉘고, 그 모든 분파의 근본적인 원천은 누구인지, '독점자본'과 '공황'은 왜, 그리고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노련한 제국주의'는 어떤 방식으로 '말 잘 듣는 나라'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에 대해여, 내신 공부를 하는 고등학생이라도 된듯이 '공부했다'.


 마르크스는 1818년에 태어난 독일 사람이다. 그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젊은 시절부터 철학 공부에 몰두했다. 자본론 1권은 마르크스 본인에 의해 1867년에 출간되었고, 나머지 2권과 3권은 그의 사후에 친구 엥겔스에 의해 편집되어 출간되었다. '원숭이-자본론'을 읽었으니까 이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을 차례다. 조심스럽게 예상하길,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자본주의를 굉장히 수학적이고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사고한 책일 것 같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나 스스로 해석해내고 싶어졌다. 


 마르크스가 '19세기 후반의 사회 민주주의자들'과 '(스탈린 같은) 일국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 철저히 왜곡당해왔다고, 강신주는 말했다. 

 사회 민주주의자들은 개인을 수동적인 존재로 봤다. 개인들은 국가로부터의 재분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위계구조를 철저하게 인정하며(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 얻는 잉여가치는 불가피하다), 자본과 국가가 상부상조하는 구조를 만들고 싶어했다. 

 스탈린 같은, 쳐 죽여야 하는 인간들은 더 심했다. 사회 민주주의가 '국가와 자본가의 결혼'이였다면, 일국 사회주의는 '국가가 곧 자본'이기까지 한 사회였다. 국가 자체를 유일한 자본가로 만들어 모든 걸 통제하는 국가 독점 자본주의. 국가가 모든 것인, 결국 스탈린 본인이 모든 최고 권력인 사회. 스탈린이 마르크스를 부르짖으면서 착취와 자본을 독점하고자 했던 건 아이러니다. 소설 <시대의 소음> 에서 쇼스타코비치가 그의 음악을 지키기 위한 생존 방식 또한 아이러니였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때는 위장을 해야했다.. 그래서 진실의 위장은 아이러니였다.' 모순 가득한 세상 속에서는 모순을 가득 품고 살 수 밖에 없나.

  

 위의 두 경우가 마르크스를 왜곡한 경우라면, 후대 철학자 '보드리야르'는 자본주의의 작동 비밀이 생산이 아니라 '소비'라는 걸 통찰하면서 생산력의 필연적인 발전을 언급했던 마르크스를 비판했다. 

  (강신주의 해석대로라면) 마르크스가 생산력의 필연적인 발전을 강조했던 것은 소비가 중요하다는 걸 몰라서가 아니였다. 그는 혁명을 주저하는 노동자에게 혁명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음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이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실어 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마르크스는 굉장한 이상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가 말하는 '코뮤니즘'은 인간 개개인들이 만들어내는 자유로운 공동체다. 사회 민주주의자들처럼 잉여가치를 옹호하며 개인을 국가 아래의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지도 않았고, 스탈린의 파시즘과는 가장 멀리 있는 세상을, 마르크스는 꿈꿨다. 

 철학자 고병권은 마르크스의 '코뮤니즘'을 "국가와 자본에서 벗어나는 삶의 시도"라고 정의했다. 강신주의 해석과 고병권의 정의를 토대로 지금까지 내가 이해한 마르크스의 코뮤니즘이란 이런 식의 꿈일 것 같다. 

'개인적이고 다양하고 자유로워야 하는 개인들이 국가와 자본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그것과 맞서는 싸움을 끊임없이 시도하기 위해 우리들만의 자유로운 연대를 만들어 내는 꿈.' 그렇다면 그건 너무 멋진 연대인데, 가능한 연대일까. 


 자본과 결혼한 국가, 자본으로 고른 땅 위에 세워진 학교, 자본으로 주조된 가정 안에서 태어나고 길러진 사람들에게 자본주의란 물과 공기와 흙처럼 마땅한 현실이다. 학교와 대학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들은 주류를 가르친다. 이 세상의 주류, 자본을 긍정하게끔 가르친다. ('돈'과 '자본'은 다르다. 내게 자본을 긍정한다는 말은 착취를 긍정한다는 의미다.) 주류 경제학이 말하는대로 가격은 단지 수요와 공급의 변화에 의해서 책정되는 것일까. 과연 우리는 노예제 사회의 노예나 봉건제 사회의 농노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들일까. 


2. 코뮤니즘


'약자요, 약자에 대해서 말하는 거예요.' 

'약자가 누군데요?' 

'당신이나 나 같은 노동자고요, 보따리 싸매고 땅을 건너는 난민들, 아직도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 우리에서 죽어가는 동물들, 아직도 독재 권력 아래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 자본주의 세상의 1%들을 우러러보고 그들의 게임에 놀아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요, 너무 많은 노예 같은 사람들이요.'

'노예요? 하하. 가영씨는 본인을 노예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을지 몰라도 저는 저 자신을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 없어요. 전 노예가 아니거든요. 제 삶은 제가 만들어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날씨가 좋은 날 도시락을 싸서 트레킹에 나섰다. 하이웨이 1번을 타고 밴프로 가는 길은 끝내준다. 블루투스에서는 친구가 튼 노래가 들려왔다. 가진 것도 없고 별 볼 일도 없는 나를 사랑해줄 거냐는 남자 파트와 사랑은 그런 게 아니라고 대답하는 여자 파트가 번갈아 들려 왔다. 우리 다섯 사람은 별 말 없이 주어진 좌석에 앉아 들려오는 노래를 듣고 끝내주는 풍경을 봤다. 우리는 서로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멋쩍게 웃고 만다. 우리는 궁금하지 않고 궁금증으로 피곤해지고 싶지도 않다. 힙한 가수들의 노래를 듣고 힙한 TV 프로그램 얘기를 하다가 웃고 만다. 서로에게 궁금한 게 없는 것처럼 자기 자신들에 대해서도 물음표를 던지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우리는 말하기 위하여 말하고 반응하기 위하여 반응한다. 우리는 주어진 임무를 끝낸 일꾼들처럼 지친 몸을 거둬들이고 주어진 집으로 돌아왔다. 끝내주는 트레킹이였고 암담한 사람들이였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었다. 그들이 책을 읽는 사람이든, 축구를 하는 사람이든, 컴퓨터 게임을 하는 사람이든, 나와 가까이 있기 때문에 '연대'하고 싶었다. 코뮤니즘은 너무 멋진 연대인데,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연대에서 나는 자주 한계를 느낀다.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쉽다. 사회가 정해진 기본적인 규칙과 예의범절을 잘 지킨다면 누구나 nice guy다.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어렵다. 나나 너나 노예인 게 분명한데, 단언코 자신은 다른 사람이라고, 노예보다는 나은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나는 무엇을 나누어야 할까.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야 할까, 나와 다르기 때문에 지나쳐야 할까.  


 사랑과 연대 없는 삶은 살고 싶지 않다. 연대는 사랑보다 훨씬 어렵고 만다. 

 사랑을 할 때 나는 그 사람에게만 나를 던지면 된다. 서로 눈알을 부라리며 잡아먹을 듯이 싸우다가도 금세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상대방을 끌어안는 일이 사랑에서는 가능하다. 물론 이 가능한 일도 많은 경우에 힘에 부치지만. 

 연대에는 그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한 사람이랑 사이좋게 지내는 데에도 몰이해와 오해와 불신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끼어드는데, 나와 같이 불완전할 개개인들의 관계들에는 얼마나 많은 마이너스들이 끼어들까. 그것들을 극복할 애정 전선이 우리들 사이에 채 만들어지기도 전에 말이다. 나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연대 앞에서 대부분의 경우에 재빨리 도망쳐왔다. 조금이라도 대화가 안될 것 같으면 말을 멈추고 그 자리를 떠났다. 누군가를 설득하고 싶지 않았고 설득을 위한 에너지를 쓰고 싶지도 않았다. 나와 마음 맞는 아주 적은 사람들과 작게 속삭이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근데 말이다, 코뮤니즘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 나는 조금 다른 액션을 취하고 싶어졌다. 스스로를 노예라고 칭하는 패배주의자가 되지 말라는 상대방의 조언을 듣고 가짢은 웃음을 삼키며 방을 떠나는 대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의 의도가 무엇이였는지 다시 한 번 설명하기 위해 애쓰는 액션. 내가 비건인 걸 밝혔을 때 자신은 고기를 너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흘러보내지 말고 우리들의 혀를 위해 동물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죽임 당하는지에 대해서 한마디라도 남기는 액션. 손도 있고 발도 있고 집도 두 채나 있는 친구가 밤늦게까지 컴퓨터 게임은 할 수 있으면서 도시락은 싸올 수 없다고 할 때, 진짜 이해할 수 없다고 딱 한 번만 말하고 그 친구 도시락도 챙겨가는 액션. 

 조금 다른 액션이란 나와 다른 생각,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단번에 외면하지 않는 일이다. 나도 누군가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일 수 있으니까. 잠시 쉬었다가더라도 언젠가 다시 가닿을 수 있는 연결고리들을 남겨놓는 일이다. 그 사이에서 조금씩 더 시도하고 눈꼽만큼 이해하면서 작고 보잘 것 없는 공통점에 머무는 일이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너도 나도 별다를 것 없는 인간이란 사실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서로를 들어주고 아껴주면서 살다가, 혹시 누가 괴롭힘을 당했을 때 함께 열심히 싸워주는 '꿈'이 정말 일어날지도 모른다. 

 너무 꿈같다.


 

3. 진실의 문제


'You take the  blue pill, you wake up in your bed and believe whatever you want to belive. But you take the red pill, you stay in wonderland, and I show you how deep that rabbit hole goes.'

 영화 <매트릭스>에서 Neo는 빨간약을 삼켰다. 대가는 진실이었다. 

 

 요즘 나는 자주 한숨을 쉬었고 세상이 너무 좆같다는 말을 내뱉었다. '검은 세상'에 살고 있는 거냐고 남자친구가 물었다. 그는 내가 좀 더 단순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까지 심플하자는 쿨함에 끼어야 하냐고 되물으면서 그와 싸우고 싶었지만 또 한 번 더 큰 싸움을 낼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단순하게 산다는 건 오늘 밤에도 내 포근한 침대 속으로 돌아가 달콤한 꿈을 청하고 그저 믿고 싶은 대로 믿기 위하여 눈뜨는 아침을 의미한다. 단순하기 싫은 것만큼, 검은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다. 단지 나는 rabbit hole로 떨어지고 있는 중이지 않을까.    

 매트릭스가 그려낸 거짓 세계가 완벽한 현실 세계처럼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 또한 누군가가 주조한 거짓 세계일지도 모르잖아. 

 어떤 상상을 하든, 나는 여기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내 옆에 있고 우리를 둘러싼 건물들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모든 문제는 내가 서있는 곳에서 나왔으므로 여기서 풀어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문제를 풀 수 있을지 없을지 따져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견고한 표면들을 한번 와해시켜 보는 일이다. 세상이 너무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게 떴다가 지는데, 인스타에서는 결점 없는 사진들이 이데아처럼 찍어져 나오는데, 캘거리에 사는 홈리스는 -30도의 겨울을 집없이 나야하고, 7살 때부터 홈리스로 살아야 했던 마이클은 남을 등쳐먹는 일을 하지 않는 게 룰이라고 말하면서 웃고, 잘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움츠린 채 살고 있던 잘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슬그머니 누출되서 내 눈과 귀로 흘러 들어오게 되었을 때 나는 갑자기 내가 마시는 4불짜리 커피가 역겨워서 나를 증오하고, 그만큼 내가 잘 모르는 세상을 증오하고 싶어진다. 

 

Neo는 빨간약을 먹었고 V는 피의 복수를(영화 V for vendetta) 시작했다. 

 

'A revolution without dancing is a revoution not worth having.'

 V는 Evey에게 대답했다. 춤이 없는 혁명은 꿈꿀 가치가 없다고. 혁명의 전야에 두 사람은 함께 춤을 췄다. 


 영화 V for Vendetta는 절대 권력에 대한 V(우리 모두에게 있는 V)의 투쟁을 그렸다. 

독재(라고 쓰고 자본을 덧붙인다)는 내 이상을 마비시키고 내 상식을 훔쳐갔다. 나는 일상의 편안함을 사랑한다. 익숙한 것의 안전함, 반복되는 평온들을. 그것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나는 함부로 저항하지 않는다. 안전하고 포근한 세상 속에서 그 시대의 표준으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국가가 내게 원하는 일이다. 국가가 내게 원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건 너무 두렵다. 내가 나로서 사는 일이 너무 위험해질 때 우리는 가면을 쓰게 된다. 권력은 조용하고 순종적인 끄덕임을 요구하고, 명령을 따를 때에만 밥과 안전을 보장한다. 오래도록 가면을 쓰고 살면, 가면 아래에 있었던 나란 사람은 잊혀지게 된다. 국가는 말 잘 듣는 빈 개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국가는 두려움을 이용한다. '그들은 두려움이 얼마나 잘 먹히는지 알고, 어떻게 해야 잘 먹히는지 안다. 그들이 모르는 것은 개인들이 느끼는 두려움이란 게 어떤 느낌이냐는 것이다.(소설 '시대의 소음'중에서)' 

 그래서 V는 Vendetta(피의 복수)를 감행해야 했다. 가면을 벗기 위해서, 자신을 괴물로 만든 괴물들을 벌하기 위해서,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 개개인들의 자유와 정의과 공정을 위한 연대를 위해서.


'You cannot kiss an idea. they do not love....It's not an idea that I miss. It is a man.'

(신념에는 입을 맞출 수 없다. 신념들은 사랑을 하지도 않는다. 내가 그리운 것은 믿음이나 신념같은 것들이 아니다. 나는 한 사람이 그리울 뿐이다.)

 영화가 혁명을 말하면서 춤이 없는 혁명의 무용함에 대해서 말하는 게 좋았다. 영화가 신념을 말하면서 정작 그리운 건 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좋았다. 같이 떠나버리자는 Evey의 제안에 V가 주저하는 게 좋았고, 다시는 사랑같은 걸 할 줄 몰랐는데 Evey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V, 자기 나무를 찾지 못했으면서 Evey의 나무를 위해 멈출 수 없는 V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그가 누구였냐는 핀치 형사의 물음에 E-vey(이-브이(V))는 대답한다. '그는 내 아버지였고, 어미니였고, 동생이였죠. 그는 나였어요. 그는 모든 사람들이였어요.' 브이는 하나의 상징으로써 모든 사람들이다. V는 Evey고 계란빵을 구워주던 오든이고 핀치고 가이 폭스의 가면을 쓰고 거리로 나온 모든 사람들이다. 그들이 억압된 자들이라면, 그래서 자유를 되찾아야 하는 존재들이라면.   

  사람들은 무너지는 건물과 터져나오는 불꽃을 응시했다. 그들은 이 날을 기억할 것이다. Evey는 V를 기억할 것이다.

 브이 포 벤테타는 권력에 대항하는 집단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권력에 맞섰던 한 개인의 신념에 대한 영화도 아니다. 혁명의 전야에 사랑하는 사람과 춤을 추고 싶은, 그녀를 사랑하고 싶은, 두려움은 이길 수 있었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지울 수 없었던 V의 영화, V를 품은 사람들의 영화였다. 아, 너무 좋았다. 



4.  

 나를 추스릴 필요가 있다. 내가 소화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답답함을 저기 선반 한 켠에 올려다 두고 조금씩 떼어 먹기로 했다. 내 모순 덩어리를 남자친구에게 던져서도 안되고 룸메이트에게 던져서도 안된다. 

 

 조용히 자본론을 주문하고, 영학이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오늘 내가 Parchment paper를 샀어야 하는데, 바보처럼 Wax paper를 사오는 바람에 고구마를 굽다가 불이 날 뻔 했다는 얘기를 해줘야 겠다. 그리고 좀 안고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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