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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Jul 27. 2020

유일하고 뻔뻔하게 의심하는 인간

7월 26일 메모들


1.  슈티르너와 양주의 '유일자'


 슈트르너는 '유일자'에 대해서 말했다. 유일한 사람이 되지 않은 채 세계에 (내가 믿는) 좋음을 덧붙이고자 애쓰는 행동이란 결국 무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일자. 혼자 떠있는 별이 생각난다. 밤하늘의 별들은 제각기 아주 멀리 홀로 떠있다. 아주 많은 별들이 다닥다닥 뭉쳐서 타는 듯한 빛을 발사할 것을 상상해본다.전혀 별스럽지 않다. 내가 밤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이유는 제각기 '떨어져서' 빛나고 있는 유일한 별들이 '함께' 빛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양주는 전국 시대의 무질서의 원인이 국가 지향적 이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국가를 위해서 개체의 삶이 존재하는가, 개체를 위해서 국가가 존재하는가.' 절대적인 수단(당연히 개체를 위해서 국가가 존재하지, 그러나 국가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해)은 절대적인 목적으로 변질되기 너무나 쉽다. 

 '가장 큰 이익이라는 천하를 준다고 해도 그걸 털보다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국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국가는 소멸할 것이다.'

 양주 또한 '유일한 인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빠졌다가 다시 자라날 내 신체의 털 하나의 가치를 국가 앞에서 주장할 수 있을 때, 이 털이 천하보다 가치롭다고 목소리 낼 수 있을 때 인간은 유일할 수 있다.


2. 인정 투쟁


 '..그래서 말 잘 듣는 아이, 모범생, 믿음직한 후배, 충실한 신도, 능력있는 직장인, 선량한 시민이 되어도 우리의 내면에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자기만의 사유와 욕망을 관철하려는 주체적 당당함, 혹은 위풍당당한 뻔뻔함이 너무나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디오게네스(BC412- BC323)는 인정 투쟁 자체를 초월했던 철학자다. 'King Alexander, the Great'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알렉산더 앞에서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Diogenes, the Dog.' 나는 디오게네스, 개요! 칭찬과 모욕으로 부릴 수 없는 사람 앞에 권력은 무용해진다. 유일한 인간이 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뻔뻔해지는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인정받지 못하는 삶은 외롭고, 인정 받기 위해서 애쓰는 삶은 가소롭다. 가냘픈 인정이라도 얻어내기 위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떠벌리고 있는 자신을 목격할 때 나는 내가 정말 가소롭다.    

 


 3. 쓸데없는 억지

 

 영학이는 내가 자기 가족들을 싫어하는 것, 자기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것, 룸메이트와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것이 자신을 불편하게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는 큰 불화를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예의라고 말했다. 

 나는 (불화를 만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대의 말에는 해야할 말을 하는 것이 오히려 예의일 거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여럿이 모여 있는데 항상 하하호호 웃고 즐겁기만 한 게 더 비정상적이라고 말했다. 생각이 다른 부분에서는 말다툼을 할 수도 있고, 인간인지라 전혀 논리적이지 않고 감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는 법이라고. 내가 가진 어떤 캐릭터 때문에 네가 불편하다면 그건 네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야. 네가 그걸 도저히 참을 수 없으면 나랑 안 만나면 되는 거 아냐?  


 그는 잠시 생각이 잠긴다. 소가 음식을 되새김질 하듯이 그는 내 말을 되새김질한다. 

'만약에 우리가 같이 늙어간다면 아무래도 내가 너보다 며칠은 더 살다 죽어야겠구나 싶다. 내가 네 옆에 없으면 진짜 아무도 네 옆에 없을 것 같거든.'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마. 나라고 그걸 모를까봐. 심신단련 중이야. 혼자서 어디 내팽겨쳐진 채로 죽더라도 너무 비겁하게 죽지만 말자고.'  


  나는 끝까지 억지를 부렸는데, 그는 나에게 억압의 그림자를 던지지 않는다.

 나같은 사람 옆에 영학이가 왜 있어주는지 의문이다. 분명 그가 느끼는 좋음이랄 게 있으니까 떠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고 지나가려는데 가끔씩은 고맙다는 마음이 든다. 그는 내 가치를 알아봐주고, 그 옆에 달린 거대한 못남도 말없이 잡고 가는 유일한 사람이다. 

 사랑에 운명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그의 빛남을 내가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의 빛남을 알아차린다는 건 사랑의 반만 얘기한 경우다. 나머지 반은 그의 못남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있을 것이다. 그의 못난 모습에 화가 나서 머리를 들이박고 싶을 때가 생기더라도 억압의 주무름 없이 그것을 그냥 인정할 수 있을 때, 두 사람의 사랑은 생성을 지속할 수 있다.  

 

 사랑하게 되면 복종하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서로를 사랑하는 동안 나는 그의 발가락에도 입을 맞춘다. 

 그러나 그가 억압의 카드를 꺼내들려고 하는 순간, 나는 누구보다 그에게 뻔뻔하고 당당하게 엿 먹으라는 소리를 내질러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사랑이 망하는 이유는 사랑에의 복종이 억압에의 복종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3. 중도은 의심에서?


 '만일 누군가가 절대 불변의 행성에 살고 있다면, 그가 할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아예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에서는 과학하려는 마음이 일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또 하나의 극단인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변화가 지극히 무작위적이거나 지나치게 복잡해서 생각해 봤자 별수 없는 처지라면 그런 세상 역시 과학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두 극단의 중간 어디쯤엔가 있다. 사물의 변화가 있되 그 변화는 어떤 패턴이나 규칙을 따른다.---' 

  (코스모스 4장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 중에서)


  이 부분을 읽는데 싯다르타의 '중도'가 떠올랐다. 

 싯다르타가 중도에 대해서 말했던 배경은 불교의 두 극단 때문이었다. 

 인도 전통 사상은 영원이라는 극단에 서 있다. 윤회를 벗어나 성스러운 브라흐만을 응시하는 것이 그들이 추구했던 것이다. 한번뿐인 현실의 인생은 윤회의 사슬을 끊고 '아트만(아)'이 '브라흐만(범)'으로 회복되어 불변하는 자아가 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일 뿐이다. 현실 세계는 무의미해지고 허무주의가 싹튼다.

 이에 맞섰던 로카타야 학파는 순간이라는 극단에 서 있다. 그들은 인간이 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한다. 결국 몸은 모두 파괴되어 죽은 뒤에는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들이 현실적 삶의 무게를 모두 벗어던지고 순간적 변화에 매몰될 때 다시 현실 세계는 무의미해지고 허무주의가 싹튼다.

 인도 전통 사상은 칼 세이건이 말한 '절대 불변의 행성'과 맥을 같이 하고, 로카타야 학파가 주장했던 극단적인 유물론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세상'과 맞닿아 있다. 

 

 이들을 상대로 싯다르타는 말한다. 우리는 영원히 존재할 수도 없고, 순간적으로만 살지도 않는 존재라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세상을 의심하는 데에서 출발하지 않을까. 

 절대성에 대해서 의심할 때, 나를 비롯한 세상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순간성에 대해 의심할 때, 변화가 가지는 어떤 패턴이나 규칙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정착할 수 있게 돕는다. 

 

 나는 영원히 존재할 수도 없고 순간적으로 살지도 않는 존재다. 그래서 나는 의심한다. 의심하는 눈을 통해 절대성을 지워나가는 연습을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발견하는 세상의 패턴과 규칙을 숙지해나가며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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