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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Aug 01. 2020

한 작가의 강연 후기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고

 한 작가가 '여성과 픽션'에 대한 강연을 시작한다. 여성과 픽션, 뭔 상관이람. 픽션을 쓰는 여성에 대한 강연일까, 누군가가 지어낸 픽션 속에서만 살아야 하는 여성에 대한 강연일까. 돌을 메고 강에 걸어들어가 죽을 거라는 그 삶의 결말 말고는 아는 게 없는 작가였다. '댈러웨이 부인'을 읽다 만 것처럼 그의 강연도 중도포기하고 말지 나는 의문스런 팔짱을 끼고 자리에 앉았다.

 

  작가는 처음부터 강연 주제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한다. 강연의 주제에 대해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생각하며 작가는 옥스브리지 대학 내의 잔디밭을 걷고 있었다고 했다. 

 저기 멀리서 근엄한 얼굴을 한 수위가 작가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책망이 가득했다. 작가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걷고 있던 잔디밭이 자신이 걸어서는 안 되는 곳임을 직감했다고 말했다. 작가는 황급히 잔디밭을 빠져나왔고 더 이상 수위는 그녀를 따라오지 않았다. 옥스브리지 대학의 잔디밭은 교수와 학자들의 전유물이지 여자가 발디딜 수 있는 곳이 아니였다. 그녀가 황급히 잔디밭을 빠져나왔을 때 그녀의 사색도 그녀를 빠져나갔다.

 작가는 이제 영국 박물관으로 가보자고 말했다. 영국 박물관의 서가에서 진리를 찾는 여정을 시작해보자고 말했다. '예술품의 창작에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가난은 픽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왜 한 쪽 성은 부유하고 한쪽 성은 가난한가?'

 서가에 꽂힌 책들은 쉬지 않고 여자들에 대해서 말했다. 그것을 쓴 사람들은 남자들이였다. 그들에게 여자란 특징이 전혀 없고, 영혼도 없고, 정신적, 도덕적, 생리적으로 열등한 존재다. 누구보다? 그들보다. 남자들은 열렬히 여자를 경멸했다가 드물게 신성시하기도 했다. 양쪽 모두 어떤 증거도 없이 여자에 대해 규정하고 싶어서 안달이였다. 

 작가에 따르면 알로에꽃은 100년에 한 번 핀다고 한다. 1882년생 작가와 1992년생인 나 사이에 알로에꽃이 한 번 피어났다면, 그 꽃이 보는 세상은 얼마나 달라져 있나? 이제 우리는 남자가 서술하는 여자에 관한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여자가 서술하는 남자에 대한 책을 읽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나? 여성은 더 이상 가난하지 않나?  

 

 왜 수많은 작가들은 수많은 예술가들은 수많은 과학자들은 남성들이여야 했나. 

 나는 최근에 1400년부터 1900년 사이에 살다간 과학자와 작가와 예술가 등등을 연대별로 표시해두는 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 독서노트 마지막 장에는 지금까지 대략 40여명의 이름이 태어난 순서대로 질서정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내 개인 연대표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린 여성이다. 40명 중에 한 명. 40명은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선호를 바탕으로 선택되었는데, 이 무작위성에서도 성비의 불균형은 너무나 뚜렷하다. 1867년생 마리 퀴리, 1878년생 리제 마이트너, 브론테 자매, 제인 오스틴 등등, 여성들의 이름을 한 명이라도 더 더해보려고 애써봤자, 위대하고 무수한 남성들의 권위에 비할 바가 못된다. 

 영국에서는 1866년이 되어서야 여성들에게 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1880년이 되어서야 기혼 여성만의 법적 재산 소유권이 인정되었고, 1919년이 되어서야 여성 투표권을 인정했다.

 아서 퀼러쿠치 경은 '글쓰기의 기술'에서 이런 말을 한다. '--실제로 영국의 가난한 시인이나 아테네 노예의 자식이나 작가가 위대한 글을 낳는 바탕인 지적 자유의 세계를 맞이할 희망이 없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그가 말하는 위대한 시인 12명 중에 9명은 대학을 나온 이들이였고, 대학을 나오지 않은 3명 중에서 유복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은 '존 키츠'뿐이였다('자기만의 방'이 쓰인 시점이 기준이다).

 작가는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다고 말했고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하물며 남성 작가들의 세계마저도 물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여성들의 삶은.. 여성들은 삶은, 단지 거울이였다고 작가는 말한다. '남자의 형상을 실물보다 두 배로 확대해 비춰주는 마법 같은 달콤한 능력을 발휘하는 거울'. 남성들이 여성들의 이야기를 열렬히 쓸 때, 그들은 사실 여성들의 열등성에 관심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기 위해 열등한 거울을 쳐다볼 필요가 있었을 거라고 작가는 담담하게 말했다. 

 작가가 여성을 거울에 비유할 때 나는 자세를 고쳐잡고 작가의 눈을 응시해야 했다. 열등해야만 하는 거울로 사는 여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2020년에도) 거울로밖에 살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고 작가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 여자가 매일 아침, 적어도 하루에 두 번씩은 자신의 몸을 낮춰가며 비춰야 했던 남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남자는 자신을 비추는 여자를 향해 그의 성기만큼 지루하고 고루한 말의 지렁이를 쏟아낸다. 순리에 대해서,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 그러므로 여자가 남자를 위해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문밖을 나선 남자는 너무 큰 세상에 주눅이 들 때마다 집으로 돌아와서 거울을 찾았다. 다시 자신의 경건함을 회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성에게 밥을 주문하고 또 이런 주문을 한다. '너의 역할이란 무엇보다 아름다움이야.' 그 자신이 너무 추하기 때문일까.


 나는 잠깐 숨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것 같았다. 작가의 말을 소화해야 했고, 아랫도리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누그러뜨려야 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는데, 작가는 기다려주기는 커녕 계속해서 말을 했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충동은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여성은 이제 글을 자기 표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 활동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나는 흐트러지고 말았다. 이미 존재했던 분노 위에 더 큰 분노가 덧붙었다. 속이 데인 것 같았다. 작가를 흔들어 깨우고 싶었다. 잠깐만요, 하나의 예술 활동이요? 자기 표현 수단이 아니라?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내가 지금껏 해온 건 분노를 표현한 것밖엔 없는데? 그것도 아주 개인적이고 자전적인 이야기로요. 분노와 충동, 내 얘기를 토해내야만 한다는 강박말고 가진 게 없다면요? 확대경으로 사는 여자를 내가 안다고요. 그 여자를 파먹고 사는 남자에 대해서도 알고요. 근데 분노하지 않을 수 있어요? 분노를 표출하는 수단으로서의 글쓰기가 아니라 예술 활동이.. 예술 활동이 도대체 뭔대요?


 작가는 구구절절 설명해주는 친절한 사람은 아니였다. 

 그는 '여성과 픽션'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의 손을 이끌고 잔디밭을 걷게 하더니 수위에게 함께 쫒겨나게 했고,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육체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떠드는) X교수가 가진 분노의 뒷편을 함께 분석하도록 유도했고, 에프라 벤의 묘지 위에 꽃을 던져줘야 한다고, 제인 오스틴과 셰익스피어에 대해 감탄할 수 밖에 없도록 나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여성과 픽션, 그리고 가난. 여기저기 내 손을 잡아 이끌고 다니며 많은 것을 알려주기보다 던져줬던 작가는 강연이 끝날 때쯤 되자 비로소 분명한 주제 의식을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따라서 내가 여러분에게 돈을 벌고 여러분만의 방을 가지라고 부탁할 때, 나는 여러분에게 실재를 마주한 채 활기 있는 삶을 살 것을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누이는 시인이 되지 못하고 죽어야 했지만, 자기만의 방 말고도 갈 수 있는 카페가 있고 카페에서 커피를 사먹을 돈을 버는 내게는 변명거리가 없다. 나는 실재를 마주해야 한다. '여성으로서, 그러나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잊고서' 글을 써야 한다.  


 그래 글을 써야 하는데, 자기 표현 수단이 아닌 예술 활동으로써의 글쓰기란 도대체 뭔가. 


 내가 만드는 하나의 문장으로 작가의 인생을 함부로 수축시키려고 했을 때, 작가가 만든 하나의 문장은 다음 문장과 그 다음 문장들로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이야기를 따라 나는 하나의 생각을 시작했다. 달팽이관이 갸우뚱 거리더니 뒤로 물러서게 되었고 숨을 멈췄다가 다시 내쉬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쳐다봤다. 작가의 문장들이 이어진 덕에 나는 무질서하게 바람 안에서 놀 수 있게 되었고, 작가가 말한 자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바라봤던 세상의 한계와 그녀가 시도했던 한계 너머에 서는 일에 대해서 몸서리치며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억압적인 남성에 대해 분노하고 억압적인 사장을 향해 분노하고 억압적인 자본과 국가에 분노하고 억압적인 인간 종에 분노한다. 분노한 사람은 분노를 표출하는 글을 쓸 수 있지만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분노일 뿐이다. 예술은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다. 예술은 분노가 지배하는 세상에 의해 무너지며 울부짖는 일이 아니라 분노가 미치지 못하는 세상의 다른 면을 자기 자신이 되어 생생하게 발견하는 힘이다. 

 분노에 점령당하는 대신 나는 그것들을 장신구처럼 입고 벗으며 나를 꾸미기로 한다. 자신의 진실성을 내세우며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거짓이다. 많은 경우 진실은 거짓말 속에 숨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거짓말을 잘하는 연습을 계속하고 싶다. 세상이 던져주는 억압을 벗고, 억압을 달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도 한 켠에 치워두고, 내가 향유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내 지적 자유를 지켜내면서 그것으로 가장 양질의 거짓말을 풀어쓰는 일을 말이다. 


'우리가 자유를 누리는 습관과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쓸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우리가 공동 거실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 인간을 다른 이와의 관계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실재와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다면, 그리고 하늘이든 나무든 그 무엇이든 그 자체로 볼 수 있다면, 우리가 밀턴의 <악령> 너머를 볼 수 있다면, 우리가 매달릴 팔이 어떤 것도 없다는 점을 마주한다면, 오직 우리는 홀로 걸어야만 하고, 우리의 관계는 남성과 여성의 세계뿐만 아니라 실재의 세계와 맺는 것이라는 사실을 마주한다면,' 내게도 예술 활동으로써의 글쓰기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분노에 시달리던 중 뜻밖에 만나서 나를 건져 올려준 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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