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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Aug 18. 2020

엄마, 달리는데 엄마가 보였어.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달려보자고 처음으로 마음먹었을 때 내 목표는 3k였다. 마음먹고 달리겠다는 게 고작 3k였냐고, 지금의 나는 몇 개월의 전의 나를 조금 깔보면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운동화끈을 조이고 나면 10k를 뛴다. 

 

 뛰는 건 여러모로 좋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체중의 변화가 없다. 좀 덜 먹으면 살이 빠지련만 두 마리 토끼를 잡기에 내 배고픔은 너무 어리석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내일 한바탕 달리면 된다고 속 편하게 생각하고 허벌나게 맛있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콘을 햝아 먹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한다.

  ‘mapmyrun’이라는 앱을 이용해서 달린다. 맵마이런은 내가 달리는 와중에 평균 속도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해주면서 나를 부추길 줄 아는 똑똑한 앱이다. 달리기가 끝나면 소모한 칼로리와 총 소요시간을 알려주는데, 그 큰 숫자들과 함께 내가 대단한 일을 한 사람인 것 마냥 느끼게 해주는 현명함도 갖췄다. 맵마이런이 축적해온 지난주와 지지난주의 내 달리기를 되돌아보는 일은 요즘 내가 자주 탐닉하는 습관 중의 하나다. 뭘 하면서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에 힘이 빠질 때 나는 내가 달려온 거리들을 음미하면서 내 자신을 위로한다. 네가 임마, 이만큼 뛰는 놈이라고!

 

  다른 러너들은 달리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다고들 하던데, 시도해본 결과 내 몸에서는 생각 정리와 달리기가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 생각 ‘정리’ 보다는 생각 ‘갑툭튀' 현상이 훨씬 빈번하게 일어난다. 

 오늘은 달리는데 엄마가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하늘이 흐린 아침이였다. 보통날이면 시속 10km로 계속 달렸을 건데 날씨가 마음에 들어서인지 킵초게가 이런 느낌일까 싶을만큼 다리가 잽싸게 움직였다. 맵마이런이 ‘일레븐 킬로미터 퍼 아워’라고 말한 직후였던 것 같다. 갑자기 내 눈 앞에 엄마가 나타나더니 사라졌다. 또 내 머릿 속에서는 이런 생각이 튀어나왔다. ‘왜 나만 도망쳤을까.’ 

 뛰고 있는데 눈물이 나는 건 당황스럽다. 당황스러워서 눈물이 났을까. 어쨌든 눈물이 났고 당황스러웠던 것만은 확실했고 나는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고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눈물과 당황을 떨쳐냈다. 빨간색 철갑 다리를 건너고 말 탄 아저씨 동상을 건너고 청동오리 무리를 지나고 얼마쯤 더 달렸을 때 맵마이런이 말했다. ‘ 텐 킬로미터.’ 나는 달리기를 멈추고 걷기로 했다. 하루의 달리기가 끝났다. 


 달리기는 엄마를 남겼다. ‘왜 나만 도망쳤을까.’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엄마가 튀어나왔을 때 고개를 흔들면서 엄마를 떨쳐냈던 것처럼 나는 정말로 내 인생에서 엄마를 떨어트렸다. 세상에는 인정하기 힘들지만 진실인 진실이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내게도 인정하기 힘들지만 진실인 진실이 있고, 그것은 내가 교묘하고 의도적으로 엄마 손을 슬그머니 놓아버렸다는 것이다. 


 한 때 나는 엄마와 같은 세상에 살았다. 아빠가 진창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날에, 그가 풍기는 분노가 평소보다 몇 겹 더 진득하고 꼬릿해지면, 우리 둘은 새벽 한 시건 두 시건 손을 잡고 현관문을 나섰다. 몇 번의 큰 위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경우에 아빠는 분노보다 더 큰 알코올의 위력에 나자빠져 잠들었고, 더 이상 엄마 전화기가 울리지 않을 때에야 우리 둘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시간들이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엄마 특유의 가벼움과 호들갑스러움 덕분에, 엄마는 내 또라이 같은 천역덕스러움 덕분에 우리 둘은 우울 속에서 울다가도 웃곤 했다. 

 언제 한 번은 동네에 야간 인형뽑기 가게가 들어선 적이 있었다. 어김없이 되돌아오는 아빠의 꼬장 대잔치가 시작될 즈음 엄마랑 나는 기회가 왔다며 평소보다 들뜬 채 현관문을 나섰다. 우리는 곧장 인형뽑기 가게로 향했다. 

 가게는 검정색 바탕에 마시마로 인형 냄새를 흠씬 풍겼다. (마시마로 인형 냄새가 뭐냐고? 세탁 세재 냄새와 30대 남자가 뿌리는 향수 냄새가 뒤섞인 듯한 그런 냄새가 있다.) 노래방 조명이 돌아가듯 동그란 야광 조명이 원을 그리면서 검정 공간을 회전하고 있었다. 우리는 가장 단순해보이는 인형뽑기 머신 앞에 자리 잡았다. 엄마가 뭘 잡으려고 했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나는 흰토끼를 조준했다. (마시마로는 아니였다. 옷을 걸치지 않고 웃고 있는 아기 토끼였다.) 500원을 넣으면 두 번의 기회를 줬는데, 2000원을 써도 토끼를 구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내가 지지리도 조준을 못한다면서 마지막 남은 500원을 써서 자기가 한 번 아기토끼를 구해보겠다고 용을 썼지만 무소용했다. 

 나는 그 날 춤추는 야광 조명 아래에서 눈꼽만큼의 우울도 붙잡아 두지 않고 즐거워했던 엄마 얼굴을 기억한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키득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 인형뽑기 가게가 3개월도 못가고 문을 닫았던 건 비극 중의 비극이였다. 


 엄마는 아직도 아빠와 함께 산다. 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지만 엄마의 연약한 삶을 이해하지 않고도 사랑하고 싶다. 엄마는 내가 캐나다에 살아서 참 다행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내가 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하는 것만큼. 엄마는 나라가(사촌동생) 이모에게 발맛사지 기계를 사줬고 나라는 대학에 나왔지만, 그래도 본인은 내가 자랑스럽고 사람 앞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멋진 사람이 될지도 모를 일이라고 말한다. ‘엄마도 발맛사지 기계가 갖고 싶은 거야?’ 라고 물으면 그런 건 전혀 아니지만 나라가 장하긴 하다고 말한다. ‘엄마 갖고 싶은 게 있어?’라고 물으면 내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야! 나는 너만 건강히 잘 지내면 돼!’ 라고 맞받아친다. 조금 뜸을 들이다가 ‘우리 지난 번에 일본 여행 정말 좋았는데 그지?’라고 내게 되묻는다.


  스무 살이 된 이후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사랑할 것들을 찾아가면서 내 인생에서 엄마는 계속해서 희미해져갔다. 배신자가 된 기분이다. 난파선에서 무자비하게 불어오는 파도에 먹히면서 함께 배멀미를 했던 친구를 버리고 나는 오래전에 배를 갈아탔다. 빨리 달리고 싶어서, 내 길을 너무 잘 달리고 싶은 마음에 여전히 그 배에 남아 배멀미에 고생하는 엄마를 까먹었다. 엄마는 내가 자기를 까먹어도 먹히는 게 소명인 것 마냥 게의치 않는다.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이였던 친구를 잃은 엄마의 마음은 어떤 식으로 스스로를 위로했을까. 내 가장 오랜 친구, 내 삶의 가장 힘든 구간을 함께 해준 친구의 남겨진 마음에 대해서 나는 너무 오랫동안 모른 척 해온 것 같다.


 엄마는 나를 구출해준 사람은 아니다. 엄마는 내가 홀가분한 마음으로 더 멀리 달아날 수 있게 과거의 시간을 붙잡고 서 있어온 사람이다. 

 앞으로 달려가는 일이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아닌가보다. 오늘 달리기는 엄마의 마음으로 달려가는 시간이였다. 발맛사지 기계는 됐고 어서 백신이 계발되길 바란다. 엄마랑 나랑 우리 둘이서 일본 여행보다 정말 정말 더 좋은 여행을 같이 가야 하니까. 엄마 손을 잡고 걷고 싶다. 나를 욕하는 이모를 같이 욕해주고 돈을 안 갚는 삼촌 얘기를 들어주고 지금 엄마 마음이 어떤지 엄마가 혹시 슬픈 날은 없었는지 그런 날엔 어떻게 견뎌냈는지 들어주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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