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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Jan 07. 2022

기본 소득족이다

Guy Standing의 Basic income을 읽고

나는 '권리(right)'에 좀 무딘 사람이다. 일하는 카페에서 30분짜리 (무급) 점심시간 브레이크 와중에 손님이 찾아오면 나도 모르게 밥 숟가락을 놓는 나를 발견한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인사가 나오고 몸이 손님에게 향한다. 그러지 않으려고 애써야 그러지 않을 수 있다. '지금은 네 휴식 시간이야, 손님이 네 이름을 불러도 모른 척 먹던 밥을 먹어야 하는 시간이라고!' 일하는 곳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등록금을 낸 학생으로서 교수들의 오피스 아워에 찾아가는 건 당연한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혹여나 그들의 시간을 너무 많이 뺏게 될까봐 조심스러워하는 나를 또 발견한다. 이런 예는 많아도 너무 많다. 자라나는 동안 권리를 인식하고 갖는 경험보다 의무를 배우고 따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정서적으로 안전한 환경에서 필요한 잠을 자고 놀이를 즐기며 원하는 배움을 시도하는 학생의 권리, 따위는 없었다. 입시 공부의 의무가 자유로울 내 권리를 언제나 삼켰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해본 적은 없는데, 그랬다면 나의 무딘 권리 의식은 지금쯤 소멸했을지도 모른다. 일할 의무는 공부할 의무보다 더 길고 끈적한 족쇄니까.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이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로써 기본 소득을 이해하자고 말했을 때 그래서 퍼뜩 이해가 안 됐다. 권리, 라는 단어가 아직도 낯설어서 말이다.


스탠딩이 말하는 기본 소득이란 인간에게 먹을 것, 잠잘 곳, 배움의 기회,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지켜주는 경제적 안전권을 의미한다(3). 돈이 없으면 존재도 없는 것처럼 취급당하는 경제적 불평등의 세태에서 가난하든 가난하지 않든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정망으로 기본소득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스탠딩은 주장한다. 그가 이끄는 기본소득 지구 네트워크(BIEN)가 정의하는 기본 소득은 소득을 증명해야 하거나 고용 상태에 따라 차등 지급되는 현재의 복지정책과 다르게 아무런 조건 없이 개인에게 분배되는 소득을 말한다. 나라마다 경제적 상황에 따라 분배할 수 있는 기본 소득은 다를 것이고, 얼마를 분배하느냐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양한 와중에 스탠딩은 최소한의 소득이라도 먼저 분배를 시행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스탠딩의 책을 읽기 전까지 기본 소득을 불평등에 대한 결과론적인 해결책으로 이해했다. 부는 부를 낳고 가난은 가난을 되물려줄 수밖에 없는 경제 시스템을 돌이킬 방법이 없으므로 기본 소득이라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해결책이 아닌 권리로써 기본 소득을 주장하는 스탠딩의 시선이 그래서 내겐 전복적이다. 18세기의 사상가 토마스 페인이 인간 모두의 공유지여야 할 땅을 훔쳐가 주인이 된 자들은 땅값을 내야 한다고, 그 돈을 그 땅의 모든 국민들이 나눠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만큼 전복적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따뜻한 음식을 먹고 누워 잠을 자고 원하는 교육을 받고 아픈 곳이 생기면 치료를 받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가 부탁해서 얻을 시혜의 대상이 아닌 마땅한 권리임을 인식할 때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권리 없음이 불공정하다는 것도 인식할 수 있다.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울타리를 치는 대신 내가 아니지만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권리도 같이 지켜주기로 마음먹을 수 있다.


스탠딩의 진정한 쿨함은 '일할 권리'에 대한 그의 시선에서 드러난다. 그는 일할 권리란 일하지 않을 권리를 포함해야 한다고 말한다(175). 새 시대의 노동권이란 단순히 노동 환경을 개선시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의미 없음이 자명한 일을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 상사에게 복종해가며 일할 권리가 아닌, 그러한 일을 그만둘 수 있는 인간의 기본권이 우선이라는 말이다. 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편협하여 회사에 나가 돈을 벌어오는 건 일이 되고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일이 못 된다. 돈을 벌어오는 일(labour)만 일이 되고 소득 없는 일(work)은 그것이 개인에게 가치 있건 말건 GDP에 포함될 수가 없다. 의미 없는 일을 위하여 생의 시간을 받치고 의미를 잃어가는 대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하여 자신에게 투자하거나 주변을 보살피는 일들에 시간을 더 쓸 수 있는 자유를, 우리 시대에는 맞아도 되지 않을까. 물론 시간과 의미 때문이라면 파이어족이 되는 것도 똑똑한 방법일 테지만 파이어족이 될만한 씨드 몇 알도 없는 사람이라면 기본 소득에 대해 떠드는 게 승산이 더 크지 않을까. 금융의 세계에서 파이어족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기본 소득이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최대 다수의 행복이 소수의 행복을 이긴다는 공리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기본 소득은 모두 함께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회복해보자는 사회 정의다(23).  


내겐 해방의 시작점인 기본 소득이 누군가에게는 뚱딴지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나는 기본 소득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이 나뉘는 이유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기본 소득에 반대한다면 그는 인간의 자유를 믿기보다는 자유를 얻은 인간의 방종을 더 믿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와 달리 내가 기본 소득에 찬성하는 이유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종속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자유가 폐허가 아닌 창조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권리란 자유를 빼앗기지 않음을 의미하고 자유란 인간이 다른 인간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할  때 이제 내게도 기본 소득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 행사의 토대가 된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불평등이란 단순한 소득의 불평등이 아니다(86). 소득이 없는 개인은 자유를 빼앗기고 권리를 훼손당한다. 돈이 없는 인간 혹은 언제나 당장 먹고 살 걱정에 시달려야 하는 인간은 시간을 잃게 되고, 교육과 지식에 대한 접근을 잃게 되고, 결과적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없는 악순환에 놓이게 된다. 삶에서 필수적인 것들이 부족하거나 혹은 단지 부족하다는 위협감만으로도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결정을 내리기 쉬운 환경에 처한다(91). 부족한 것들에 대하여 골몰하는데 대부분의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다음 달 집값을 어떻게 내야 할지, 배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 고민하다가 벙쪄보지 못한 사람은 누군가 자신보다 멍청해서 가난한 거라고 쉽게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은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환경적 요소가 인간들을 생물학적으로까지 불평등하게 만드는 데에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생각할 수 있는 힘도 빼앗긴다.


기본 소득은 가난을 구제할 뿐만 아니라 실패를 구제한다. 그것은 실패할 자유를 허용한다. 누리호 엔진 개발자 김진한 박사가 말한 것처럼 우주가 "실패를 용인하는 국가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자 신령한 영토"라면, 자유 또한 실패를 용인하는 국가의 시민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자 신령한 가치다. 어떤 사람은 실패할지라도 실험해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실패한 다음이 없기 때문에 실패할 수가 없다. 기본 소득이 제공된다면, 사회가 최소한의 경제적 안전망을 설치한다면, 그 사회에는 실패하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실패에서 배울 줄 아는 인간들, 그래서 답을 쫒는 게 아니라 의미를 찾는 인간들이 더 많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기본 소득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더 많이 생겼다. 도대체 세금은 어떡할 거냐는 사람들과 도대체 버진 아일랜드에 숨겨진 부자들의 금고는, 기업들이 받는 세금 혜택은, 개인 소득세 공제와 선택적인 조세 감면 등등은 다 합쳐 얼마나 될지 따져보고 싶고, 이산화 탄소세, 토지 가격세, 지적 재산권세 등등 도입 가능할 방법들에 대해서 더 논의하고 싶다(cp 7). 만약 이런 논의가 이뤄질 수 없다면 그건 영화 돈룩업에서 디카프리오랑 제니퍼 로렌스가 오랜 기다림 끝에 메릴 스트립을 대면하고 당황스러웠던 이유와 같다. 기본 소득은 정치적인 우선순위가 되기 힘들다. 정치란 돈이 많아서, 그래서 시간도 많은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지적한 막스 베버가 생각난다. 정치란 언제나 가진 것이 많은 자들의 차지가 되기 쉽고 힘이란 분배되지 않는 한 언제나 그들에게 수렴하기 쉽다. 신자유주의적 국가에서 힘을 가진 정치인들은 기본 소득에 재정을 분배하기보다는 기업들에게 더 많은 세금 혜택을 주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게나마 기본 소득에 대한 논의가 한국에서 이뤄지고 있어서 기쁘다. 조금 설렌다. 지금 자라나는 세대들은 자유라는 글자와 권리라는 글자가 몸과 마음에 잘 베여 있어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원하지 않는 일을 잠깐 멈출 수 있는 기회를 죄책감 없이 얻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실패하는 게 두렵지 않도록 몇 번쯤 실패해도 개의치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쿠션을 깔아주고 싶다. 그래서 나는 기본 소득이 뭔지 계속해서 떠들어야 한다. 나는 기본 소득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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