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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Aug 22. 2022

여름 학기마저 끝났을 때

영화 Groundhog day를 보고

여름 하늘, 집 앞에서.

경제학 102 기말고사까지 끝나고 나니 첫 번째 허들을 넘은 것 같다. 실업률, GDP, 인플레이션과 같은 단어가 끼인 기사는 읽어볼 생각을 못했을 만큼 경제에 무지한인 내가 가졌던 첫 긴장감에 비하면 경제학 수업은 순조로웠다. 아쉬운 게 있다면 기말고사를 좀 망친 것 같다는? 마지막 2분을 남겨놓고 고치기에는 이미 늦은 실수를 뒤늦게 발견했기 때문일까. 첫 번째 허들을 넘고 36학점의 1년을 되돌아보는데 시원하기보다 찝찝하다. 대학에 다니는 걸 하나의 프로젝트로 생각해볼 때 내 앞에는 여전히 3개의 허들이 더 남아 있다. 앞에 놓은 3개의 허들이 너무 크게 보여 두려운 걸까.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닌데, 혹시 이 프로젝트를 계속해나갈 수 있을지, 그리하여 끝마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 두려울 때가 있다.


시험이 끝나면 보자고 남겨뒀던 영화를 저녁까지 미루는 대신 한낮에 봤다. 영화 'Groundhog day'의 주제는 명확했다. 내일이 또다시 되풀이되는 오늘이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대학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후로 나의 하루는 반복적이다.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달리는 시간을 빼면 책상에 앉아 공부한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 속에서 시지프가 돌을 들어 올리는 것과 비슷하다. 첫 번째 허들을 넘은 이 시점까지 계속해서 수업을 듣고 책을 읽고 에세이를 써내고 마지막 기말고사를 쳐왔다. 이 돌을 꼭대기에 올려놓고 싶은 열망이 너무 커서 열심히 밀어 올리게 되는 날이 있는 반면, 돌이 크고 무겁게만 느껴져서 들어 올리는 일을 주저하게 되는 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언제까지 반복될지 모를 study의 의미가 의심스러워지는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돌을 밀어 올리는 일을 멈추지는 않았다. 카뮈는 돌을 들어 올리는 일이 무의미할지라도 그 무의미마저 받아들이고 사랑해보자고 말했지만,  일을 반복하며 내가 받은 인상은 무의미와는 멀다. 나는 돌을 들어 올리는 일이 무의미하기보다는 평화로웠고, 내 돌을 사랑한다고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잃고 싶지가 않다. 내일이 또다시 되풀이되는 오늘이라고 해도 나는 요즘의 오늘들처럼 계속해서 배우고 싶다.


가정집 청소일을 하거나 카페에서 커피를 만들거나 식당에서 서빙을 하면서 살 때도 사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꼬박꼬박 일을 했기 때문에 돈이 있었고, 쉬는 날에는 그 돈으로 가보지 않은 혹은 좋아하는 식당에 가거나, 때때로 하이킹을 가거나,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고 정말 읽고 싶은 책은 서점에 가서 사읽었다. 내 안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밖으로 나오지 못해 답답해할 때는 브런치에 글을 쓰거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말을 걸었다. 기분이 내키고 시간이 나는 날에는 독서 모임에도 나갔다.


다시 생각해봐도 나쁘지 않은 날들이었지만 내겐 언제나 배고픔이 있었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섹스를 해도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 나는 내 안에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고 느꼈고 지금에 와서야 그것이 배움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사는 세상을 더 잘 읽고, 내가 보는 것들에 대해서 더 잘 쓸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 싶었지만 내 하루 시간표의 주는 7시간 노동이었고, 취미 생활처럼 읽는 책들은 기분이 별로일 때 쉬이 접을 수 있는 부가적인 장식이었다. 배우는 일이 굳이 대학에 가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오랜 시간 규율과 형태와 멀리 떨어진 채 살아온 나는 '청소부' 혹은 '서버' 혹은 '바리스타'가 아니라 '학생'이라는 옷이 입고 싶어서 대학에 갔다. 더 나은 이유를 대고 싶지만 정말 그게 다다. 내 하루 시간표 7시간의 공부가 메인이 될 수 있도록 꾸미고 싶었다. 나의 변덕에 맞춰 뜨거워지고 차가워지는 책 읽기 대신 습관처럼 읽고 배우고 싶었다. 한국에서 수능 공부를 견뎌낸 사람에게는 내가 그린 시간표가 갑갑할 뿐일지도 모르나, 서른에 자발적으로 다시 입는 학생이라는 옷은 오래전에 내가 억지로 입었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촉감을 가진다. 나는 이 옷이 가장 편하고 믿음직스러워서 오래도록 이 옷이 입고 싶다.          


내게 배움은 왜 의미를 가질까. 경제학에서 배운 신성장 (New Growth) 이론에 따르면 수확 체감 법칙(law of diminishing return)-다른 모든 조건이 일정할 때, 생산이 하나 증가할 때마다 그 생산에 따라오는 여분의 이익이 정확히 하나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줄어드는 현상-을 피해 가는 게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지식(knowledge)이다. 신성장 이론이 말하는 지식은 이익(profit)을 만들어내는 조건 하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반면 내가 말하는 배움의 지향점은 그 이익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이익인지 되묻는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둘 다 diminishing returns을 피해 간다는 점은 같다. 배우면 배울수록 알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배우는 일은 영영 알지 못할 거라는 좌절 대신 계속해서 좀 더 알고 싶다는 희망을 일으킨다. 나는 시지프가 다시 떨어지고 말 돌을 계속해서 들어 올릴 수 있었던 이유도 시지프에게 가닿고 싶은 곳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곳에 다다르고 싶은 희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단기 기억 상실증이 아닌 상, 돌이 떨어지고 말 거라는 걸 알면서도 시지프가 계속해서 다시 돌을 들어 올려보자고 다짐할 수 있었던 것은 다시 떨어지고 말 돌에 대한 절망보다 돌을 들어 올릴 수 있다는 희망이 더 컸기 때문이다. 희망이 절망을 이기 때문이다.


끝도 없고 완성도 없는, 돌을 들어 올리는 일을 되풀이하는 가난한 날들에도 나는 이 날들을 잃고 싶지 않다. 계속해서 지금처럼 살게 되면 어쩌나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처럼 살 수 없을까 봐 두렵다.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노동에 지치지 않아도 되는 groundhog day의 Phil이 사는 하루에 비하면 나의 반복될 하루에는 현실적인 걱정들이 암울하고 단조롭게 끼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의 내 돌이 지금까지 내가 가져본 어느 돌보다도 좋아서 이 하루를 계속해서 잘 살고 싶다.


하루 잘 산다고 해서 천국에 갈 거라고 믿지 않는다. 하루들을 잘 산 끝에 내 인생이 결국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도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오늘 몫의 돌이다. 오늘 몫의 내 돌을 잘 들어 올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중독된 채로 groundhog day를 산다. 이제 프로젝트의 한 단계를 거쳤고, 앞으로 세 단계가 더 남았다. 그것들이 끝날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돌을 들어 올릴 것이다. 돌은 언제나 다시 떨어질 테지만, so be it. 좁은 시야를 가진 탓에 멀리서 삶을 조망할 수 없는 나는 가까이에 있는 내 삶을 프로젝트로 나누고 이름표를 붙인다.  다음 프로젝트를 만나기 전까지, 내 모든 프로젝트들이 끝나기 전까지, 지금 몫의 돌을 잘 들어 올리바랄 뿐이다. 니체는 신은 죽었고 대신 춤을 추자고 말했다. 이동진은 인생 전체는 (내가 어찌할 수 없으므로) 되는 대로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살자고 말했다. 성실하게 사는 일과 춤을 추는 일과 돌을 들어 올리는 일이 다른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게 오늘 몫의 돌을 들어 올리는 일은 다시 말해 춤을 추는 일이고 또다시 말해 내 몫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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