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이 대통령 취임식에서 '자유'를 35번 언급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12.3 계엄을 선포할 때도, 또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연설에서도 자유라는 단어를 빠트리지 않고 반복했다. 그가 그토록 강조하고 싶었던 자유는 무얼 의미할까.
윤석열은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를 그의 인생책으로 꼽는다. 밀턴 프리드먼은 1980년대 신자유주의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자유 시장 이론가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이 정부 규제로부터 자유로울 때,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수요와 공급이 사회에 가장 이상적인 결과물을 가져온다는 믿음이다. 그는 시장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서 정부는 될 수 있는 한 가장 작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There's no such thing as society)."
프리드먼의 자유 시장을 열정적으로 수용했던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이 남긴 말이다. 그의 발언이 드러내듯, 신자유주의자들이 꿈꾸는 세상에는 사회적 공동체가 없다. 시장에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이 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정부는 시민들에 대한 공적 책임을 회피할 정당성을, 기업과 자본가들은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그에 대한 대가로, 시민들은 날로 깊어지는 불평등을 일상처럼 마주하게 되었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는 신자유주의의 정수였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자유란 모두를 위한 자유가 아닌, 일부 자본가들을 위한 차별적 자유를 의미했음을 드러냈다. 서민들이 집을 잃고 거리에 나앉는 동안 금융 위기를 주도했던 시장 세력과 그들과 공모한 정부 인사들은 어떠한 책임도 물지 않았다. 신자유주의라는 문화 및 시스템 안에서 가진 자들은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감지할 센서를 잃고 자신들의 시장적 이익을 위해 폭주할 뿐이였다. 어쩌면 그 차별적 자유란 것이 그들이 믿었던 선이였을지도 모르겠다. 프리드먼이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이롭게 할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반은 진실인 믿음인지도 모르겠다. 신자유주의가 그가 속한 부유한 집단을 더욱 부유하게 만든 건 분명하니까. 그러나 서민들이 속한 사회는 신자유주의의 유행 속에서 더 병들게 됐다.
밀턴 프리드먼의 자유가 위험한 이유는 그것의 사회적 책임감 결여 때문만은 아니다. 프리드먼적 자유는 정치적 독재마저 정당화했다. 프리드먼은 군부 독재를 행했던 칠레 대통령, 피노체트를 지지했다. 피노체트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던 아옌데 정부를 총칼로 말살한 뒤 17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았던 독재자다. 프리드먼은 칠레를 자유 시장 이론을 적용할 시험대로 이용할 목적으로 피노체트의 경제 멘토를 자처했다. 프리드먼은 경제적 충격 요법(Shock Treatment)이라는 이름 하에 피노체트에게 공기업을 민영화시키고 정부 예산을 무자비하게 삭감하는 것을 주문했다. 17년에 걸친 피노체트의 정치적 독재와 경제적 긴축 정책 이후, 칠레 서민들은 오래도록 경제적, 사회적,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윤석열은 아무래도 제 2의 피노체트가 되기를 꿈꿨을까? 그는 피노체트처럼 프리드먼을 멘토로 삼더니, 피노체트처럼 군사 쿠테타를 일으켜 민주적으로 선출된 국회 의원들을 살해하려고 했다. 그의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나는 여전히 윤석열적 자유가 무섭다. 프리드먼의 자유를 답습한 윤석열적 자유는 자기 안위적 자유이고, 자유를 가장한 방종이고, 독재를 숨겨둔 가면이기 때문이다. 그의 자유를 지켜내는 비용이 바로 서민들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자유라는 단어를 남발할 때,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되물을 필요가 있다. 당신이 말하는 자유는 오직 당신의 지칠 줄 모르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 공동체를 해칠 수 있는 방종이고 독재 아닙니까.
칼 폴라니는 <거대한 변환>이라는 책에서 자유 시장주의자들이 주창하는 자유가 결국 민주주의를 해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자유 시장 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정부에 대한 가지는 불신을 이용해서 마치 시장에서는 그들이 자유란 것을 되찾을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폴라니는 인간 역사에 존재했던 수많은 국가 권력이 폭력적이였던 것은 사실이나, 그에 대한 해결책이 비대한 시장을 만드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정부를 좀 더 민주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만드는 것을 해결책이라고 봤다. 그리고 시민들이 그 변화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단지 선거철이 되어 투표에 참여하는 것에 그치는 대신, 시민들이 좀 더 정치적인 주체가 될 때 정부가 좀 더 민주적일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내란 수괴와 그 동조 세력에 맞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거리로 나와 응원봉을 켜는 시민들을 지켜 보면서, 나는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데에 있어 시민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다시 느꼈다. 시민 김동현씨가 군용차를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다른 시민들이 김동현씨를 외면했더라면, 김동현씨와 같은 마음의 시민들이 국회로 달려가 군인들과 맞서지 않았더라면, 이후로 지금까지 2030 여성들이 집회 현장을 지켜내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지켜지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계엄 이후, 한국 시민들의 자유는 윤석열적 자유의 가장 반대편에 서있다. 윤석열적 자유가 사회적 책임 의식이 전혀 부재한 나르시스트적이고 독재적인 자유라면, 한국 시민들은 민주적 공동체를 함께 지켜내기 위한 공생적 자유를 외치고 있다.
한국 시민들은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타인들의 자유도 함께 지켜져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인식한다. 그에 반해, 윤석열과 내란 동조 세력들은 그들의 자유를 위해서 타인들의, 그러니까 국민들의 자유를 짓밟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가 공존하는 민주 사회의 얽히고 섥힘을 그들은 독재라는 간단한 키로 손쉽게 해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지지자들을 선동하는 윤석열이 체포되는 게 끝은 아닐 것이다. 윤석열적 자유 아래에서 기생했던 반민주적 세력들은 언제까지나 자유라는 말로 그들의 사적 이익을 호도하겠지. 그들이 판치는 세상을 마주하기 않기 위해서는 나는 한 명의 시민으로서 거리에 서있는 시민들을 따라 계속해서 좀 더 정치적이기로 한다. 계속해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자유를 부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