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그라 하니 담근 고춧잎 김치

by 글쓰는 도예가 naBi




자동차 속도를 낮추며 잠깐씩 바라본 풍경은 수줍은 처녀의 볼처럼 발그레 하니 곱게곱게 물들어간다. 게다가 달리는 자동차에 의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일렁이는 낙엽들의 회오리 춤사위가 근사하다. 어제저녁부터 무언가를 함께 작업하자며 조금은 흥분된 목소리의 스승님 부름은 막상 도착해보니 “고춧잎을 같이 따자”였다. 실하게도 열려있는 크고 작은 고추들은 일차적으로 바구니에 따서 놓고, 스승과 나는 가벼운 종이백을 손목에 걸고 스카프 휘날리며 고춧잎을 따기 시작했다. 실상 딴다는 수준보다 "훑는다"말이 어울릴 정도로 여덟 아홉 개의 고추나무 옷들을 벗겨 가기 시작했다. 점점 앙상하게 드러나는 고추나무를 보면서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생각났다. 미루어 짐작컨데 스승님의 계산 방법은 첫서리가 오기 전 따서 김치를 담아 놓자이다. 더불어 유년 시절, 시골에서 맛본 빨간 고추를 따고, 마지막 늦둥이 고추가 열려 아직 제구실을 못할 때쯤 지금처럼 따서 좀 더 짭짤하게 담가 저장해놓았다가 독특한 풍미를 봄이든 초여름이든 맛보고 싶으신 게다. 한평 남짓한 텃밭에서 한여름 동안 우리의 입맛을 돋웠던 오이, 부추, 쑥갓, 그리고 고추는 맛깔스러운 쌈장과 싸오신 보리밥만 있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을 만큼 집 나간 입맛도 돌려놓았었다. 그중에서도 아삭한 고추 하나 들고 된장과 고추장을 적당하게 섞은 쌈장에 찍어 한입 베어 물면 그 아삭함과 신선함에 충분한 에너지를 받고 그 여름의 시간을 보냈었다. 어디 그뿐인가 틈나는 대로 무럭무럭 잘 자라는 요 녀석들 때문에 약도 치지 않은 건강한 먹거리를 이 사람 저 사람 나눌 수 도 있었다. 이제 그 추억들을 정리하며 내년에는 더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거둬들인다.

고춧잎은 비타민 C와 비타민 A 그리고 섬유질과 고춧잎 추출물에서 발견한 암세포 증식 억제 효과 등등~~~ 어찌 됐건 우리 몸에 아주 좋다는 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고춧잎 김치”는 조금 낳설고 처음 들어본 사람도 있을 테고, 한 번도 맛보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게다. 물론 나조차도 계절에 맞는 농사보다 제철 음식을 조금씩 사서 먹는 입장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양이 필요한 고춧잎은 유년 시절에 맛보고는 아마도 어른이 된 이레 처음일 게다. 거기다 스승은 내게” 담가라” 명하시고 더 이상 말씀을 안 하신다. 아무리 정보화 시대라고 한들 그 옛날 어머니들의 맛을 재현할 수 없을 터이지만 “담그라"하고 명하시니 담글 수밖에…

진한 청록색을 띤 고춧잎은 적당한 비율로 물과 소금을 섞어서 잠기도록 부어놓고, 하루 이틀 정도 절여 놓는다. 어떤 이들은 일주일 동안 삭이듯 하는 절임 방법을 쓰기도 하지만 나는 고춧잎이 가진 빛깔을 조금이나마 살리고픈 연민이 더하여 하루 정도만 절인 뒤, 두어 번 정도 흐르는 물에 씻어 물기를 빼준다. 자~~~ 그럼 이제는 양념을 함께 해볼까요? 양념은 별반 다를 게 없다. 먼저 전날부터 미지근한 물에 불려 놓았던 고춧가루에 , 마늘, 양파, 사과, 배를 갈아 놓은 것을 함께 넣고, 설탕 대신에 매실 진액과 맑은 멸치 액젓을 넣어 잘 섞는다. 여기에 보약 같은 가을무도 섞박지 김치처럼 잘라 넣어도 더한 풍미를 줄 것이다. 이렇게 모두들 당신이 당신만의 김치 담는 방법으로 해서 재료만 다른 고춧잎에 부어 주고, 하루 정도 숙성시킨 뒤 길고 긴 날을 저장해 두었다가 별미 김치로 누구에게든 특별한 김치로 선보이면 될 것이다. 추억은 길고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왔어도 가슴 저리게 그립고 아련히 돌아가고픈 애틋함이 있다. 나보다 훨씬 많은 나이임에도 추억을 그리워하는 스승의 순수함도 내게는 아픔이다. 돌이켜 보면 어느 날 문득 추억이 미치도록 그리운 건… 지금의 든든하던 처마가 흔들린다거나, 단단하게 묶여 있는 사람의 관계가 흔들린다거나, 자신이 잘 견뎌온 것들이 그 무언가에 흔들려 잠 못 이룰 때 우리는 어머니의 소박한 밥상 같은 따뜻함으로 위로받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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