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은 그랬었지…
그때 그 시절은 그랬었지…
고요한 아침을 지나 연일 이어지는 뜨거운 열기가 느리고 길게 일상을 달궈온다.
햇살 가득 봄날의 추억을 그리며 뜨거운 여름에 순응하듯 켜켜이 커튼으로 햇빛 차단하고,
적당히 선선한 온도를 맞추고, 어제서야 페인팅을 끝낸 냉장고에서 적당히 차가운 맥주를 꺼낸다.
소소한 나만의 사치일까? 역시나 기대 이상으로 시원하게 넘어가는 알싸한 맥주로 한낮을 견디어 내본다.
그러다 한 땀 한 땀 색칠하고 공들여진 나의 집사 같은 냉장고를 바라보다 문득
매일이 그러하듯 오늘은 무엇을 해 먹을까?라는 삼시세끼 책임 회피가 그 옛날 하루 종일 우물에 담겼다 해가 길어진 하지의 저녁 밥상에 올라온 아삭하고 담백한 열무김치 국수, 그리고 몽글몽글 피어나는 모깃불과 평상에 누워 수없는 별을 세며 흐드러지게 흩뿌려진 은하수를 여행하다 잠든 아이에게 긴 한숨과 어우러져 부채질해주던 아버지... 그때 그 시절이 아련하게 그리워진다.
1976년쯤 나는 무늬만 여자 아이지 늘 상고머리에 슈퍼 에너지를 소유한 일곱 살 난 사내아이 같았다. 치마는커녕 활동성 있는 반바지를 즐겨 입었고 코 뭍은 또래 남자아이들을 진두지휘하며 산과 들로 낱낱이 파헤치며 종횡무진하며 뛰놀았다.
아마도 그 자연이 주는 풍성함 때문에 배고픔도 잊은 체 놀았을게다. 꽃길을 벗 삼아 가다 보면 빨갛게 열린 산딸기도 먹어 주고, 소나무 그늘 널찍한 바위에 낮잠까지 청해 주신다. 지금처럼 먹거리가 흔하지 않았지만 지천에 우리를 유혹하는 산딸기의 향긋함은 사계절 내 먹을 수 있는 예쁘게 포장된 딸기에 감이 비할바가 못된다.
그러나 그런 내게도 최대의 약점이 있었으니 밥때를 놓치면 큰일이 나는 줄 았았다.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밥 차려 내라 어깃장에 가까운 때를 쓰며 짜증을 냈다 한다. 지금 생각하면 지치도록 놀다 온 게 무슨 유세라고!!
일단 들로 산으로 놀다 지쳐 들어오신 나는 우물가로 달려가 세상 호탕하게 벌컥벌컥 우물물을 들이켠다. 그런 철부지 막내 따님 뗏국물은 아빠가 등목으로 말끔히 해결해 주시고, 세상 시원해진 나는 널찍한 대야에 담긴 수박과 참외를 폭풍 흡입해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봉으로 쌓은 하얀 쌀밥에
묵은 된장 듬뿍 찍어 아삭하고
매운 청양고추 두서너 개는 애피타이져로
너끈히 먹고, 빨갛게 부서질듯한 석류빛 열무김치를 곁들인 비빔밥으로 마무리해주신다.
참으로 세상이 내것이냥 기분 좋은
포만감을 어찌 잊으랴!
전기가 있어도 냉장고는 꿈같은 그때 그 시절
당시에는 전기가 들어왔지만 냉장고가 있는 집은 그리 흔하지 않았을 때이므로 수맥 잡아 오랜 전통 자랑하는 우리 집 깊은 우물은 여름날의 시원한 냉장고이자 천연 김치 냉장고였다.
얼키설키 정체모를 그물망에 단단히 묶여있는 항아리 모양의 플라스틱 김치통을 두레박처럼 끌어올려 적당이 숙성된 열무김치를 꺼내 두꺼운 막국수에 슥삭슥삭 비벼주면 참으로~ 그 맛은 눈물이 나도록 황홀한 맛이었다. 이제는 그 시절의 열무국수 맛을 다시는 못 만나볼 자연의 맛이었고, 추억의 맛이었다.
그렇다면 추억 찾아 ~맛 따라 잠시라도 행복해져야겠다. 그리운 옛맛에 힘입어 며칠 전 담아 놓은 열무김치부터 펼쳐놓고 일장연설 분석에 들어간다.
6~8월까지 제철인 연하디 연한 열무는 섬유질도 풍부하지만 사포닌도 다량 함유돼있어 여름철 대표적 보양식에도 손색이 없고, 하늘이 높다 하여 높으시고 귀하디 귀하다던 산삼, 인삼이 부럽지 않은 뼈대 있는 면모도 갖췄을뿐더러 베타카로틴, 비타민 A C까지도 충분이 함유돼있는 이 시대 트렌드에 걸맞은 웰빙김치이자 알칼리성 김치이다.
그런 여름 짱!! 열무김치를 그 옛날 추억의 맛을 생각하면서 표현하는 데는 적당한 단어도 딱이 없는듯하여 내 기필코 그 맛을 재현해 보이리라 작정을 했건만 ……
계란 삶아놓고, 양념장 만들어 칼칼하니 잘 숙성된 열무김치도 준비해 놓았는데… 국수가 사라졌다!!! 분명 어딘가 있을 터인데… 아무리 뒤져도 없다. 족이 20년을 넘게도 천천히 진행된 치매 초기에 가까운 건망증을 탓하며 국수 대신 스타게티라도 삶자!!
스파게티는 8-10분을 안단테로 삶는데 국수와 똑같이 인내심을 갖고 푸르륵~~~ 거품 내며 끓어오를 때까지 세 번 정도 반복하며 찬물을 조금씩 끼얹어 준다. 마치 물을 넣지 않아도 익어가며 스스로 물을 내는 열무김치의 인내처럼 말이다. 그래야 탱글탱글하게 탄력 있는 면발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그래 봤자 소면 대신 스파게티여서 심이 내 맘에 썩 내키지 않으나 아쉬움을 애써 감추며 참기름으로 커버해주고 갖은 양념장에 매실액으로 달달함을 더한 뒤 , 칼칼한 고추장 한 스푼을 잘 섞어 한 끼 정도는 가볍게 먹고 싶은 주부들 마음 대변하듯 쓱싹쓱싹 오른쪽으로 BBGO 왼쪽으로 BBGO 무섭도록 “폭풍흡입” 함과 동시에 열무김치 국물까지 휘리릭~~~ 원샷으로 깔끔히 마무리!
그때 그 시절의 아삭아삭 하고 매콤함을 더한 알싸함까지 입안 가득 퍼지는 게 추억이 되살아 나는 듯하다. 국물 자박자박 하니 시원함의 극치였던 그 잊히지 않는 한낮에 열무국수가 그립다. 아~~~ 이런!!! 또 깜빡했네~~~ 김치 국물을 살얼음 동동 띄워 함께 살고 있는 세대주에게 생색도 내봤을 터인데... 그러하지 아니할지라도 이 또한 감사한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