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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Nov 29. 2022

완벽한 엄마의 조건

엄마의 시간관리

 아이를 낳고도 몇 년간 공부나 일을 병행했다. 친정이나 주변 도움 없이 아이를 키우다가 결국 아이의 초등 입학을 앞두고 두 손 들고 백기를 흔들며 오롯이 엄마의 역할에 집중하는 삶을 결정했다. 좀 더 편하고 여유가 생길 줄 알았다. 이 생활의 실체를 알기 전까지는.     


“ 빨리 준비해! 오늘도 유치원 늦었다. 왜 맨날 늦니? 빨리! 얼른 서둘러! ”

아이한테 하는 말이지만, 나한테 하는 말이다. 말 그대로 오늘도 늦었다. 이제 더 이상 유치원 선생님 얼굴 볼 면목이 없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살면서 매일같이 늦으니 부끄러워 살 수가 없다. 애꿎은 아이한테만 잔소리다. 유치원 앞에서 선생님께 멋쩍은 마음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 보지만 선생님도 나도 안다. 아이의 지각은 곧 엄마의 지각이란 것을. 10시 등원도 못 맞추는 내가 뭘 하겠는가 싶다. 한없이 나 자신이 한심해 보이는 아침 같지 않은, 차라리 점심에 가까운 아침이다.      


 간신히 아이를 보내고 나면 쓰나미처럼 휩쓸고 간 집안 풍경이 보인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피곤한 느낌이다. 정신없이 눈에 보이는 일부터 서둘러 마치고 나면 한두 시간은 우습게 간다. 슬슬 배가 고파온다. 요리가 젬병인 나는 다시 아파트 정문 상가의 반찬가게와 배민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어떻게 점심을 해결할까 고민해 본다. 간신히 나만의 양식(?)이 생기면 혼자 먹는 느낌이 싫어서 영화나 드라마 한 편을 열심히 찾아본다. 잘생긴 남주와 미련 가득 서브남주 사이에 고민하다 보면. 헉, 벌써 하원 시간이라니. 기껏 집안일 몇 가지 하고, 밥 한 끼 먹었을 뿐인데 자유시간 끝.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라는 생각에 아침에 이어 두 번째 현타가 온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말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지만 그 마음은 하원 후 30분까지만. 뭐가 그렇게 요구사항이 많은지 놀이터, 마트에 끌려다니다가 집에 도착해 목욕시키고 저녁을 먹이고 나면, 오늘도 일이 많아서 일찍 올 수 없다는 남편의 카톡이 온다. 이번 주부터 엄마표 영어 시작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다음 주부터로 미뤄야 하나. 일단 나도 한숨 돌리려면 잠깐의 영상을 아이에게 보여주고 나도 잠시 소파에 퍼져서 잠시 눕는다. 아 맞다, 내일 먹을 장이랑 간식 또 주문해야지. 아이 신발도 작아지고 내복, 양말도 낡아져 새로 주문해야 하는데 좀 더 이쁘고 싼 걸 사려고 검색만 하다 보니 벌써 아이 재울 시간이다. 깜짝 놀라서 서둘러 간신히 아이를 재우고 스마트폰을 열어 못다 주문한 장을 보고, 페북이나 인스타에서 반은 일상의, 반은 육아 관련된 글들을 보다가 잠을 잔다. 오늘 하루 뭐했나 싶어 세 번째 현타가 온다. 그래, 애 키우는 엄마의 삶이 다 그렇지 싶으면서도 뭔가 모를 찜찜함이 한동안 내 마음에 계속됐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잘 관리되지 않은 엄마의 삶은 그냥 흘러가는 시간과 눈앞에 내가 해야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에 쫓기게 된다. 늘 무언가 바쁘게 움직이지만 뿌듯한 느낌도 없다. 목표한 바도 약속도 지키지 못한 채로 어수선하고 분주하게 흘러간다. 엄마는 시간에 쫓기는 사람이 아니라 이끌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예를 들면, 나의 고질적인 문제 지각의 경우, 엄마가 미리 시간을 챙기고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아이는 늦는다. 등원 시간이 몇 시이고 집에서 유치원까지의 거리가 얼마인지가 본질이 아니다. 어젯밤 취침 시간에 따라 거의 판가름 난다. 그 말은 오늘 하원 이후의 놀이, 식사, 목욕, 학습 등 각각의 시간이 얼마나 잘 관리되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잠깐 방심하면 지각이다. 이 당연한 걸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쳇바퀴 돌 듯 늘 같은 일을 하는 엄마처럼 보이지만, 머릿속에는 늘 목적성 있는 시간표가 있어야 했다. 그래야 그 시간이 의미 있고, 관리되는 시간이었다.      


 엄마에게 주어진 시간은 대부분 양질(良質)의 시간이 아니다. 아이의 등원과 하원 사이에 잠깐 자유시간이 주어지지만, 다른 집안일과 용건들이 중간중간 들어와 있다. 무언가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집안일처럼 계속 반복되지만 매일 해야만 일들도 많고, 갑자기 끼어드는 일들도 많다.

 고되고 분주한 하루를 마치고 아이를 재우는 시간이 되면 그제야 엄마에게는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몸도 마음도 가장 지친 데다가, 조용히 아이 옆에서 있어야 하는 시간이라 기껏 할 수 있는 것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일이다.  몰라도 그만인 그저 그런 내용들을 습관적으로 살피면서. 결국 엄마가 자신만을 위한 의미 있는 시간을 갖고 싶다면 그런 시간과 환경을 노력해서 찾아내야 했다. 요즘 유행하는 미라클 모닝처럼 졸음과 사투를 벌이며 새벽이나 주말에 나만의 ‘시간’을 찾거나, 의도적으로 독서실이나 커피숍 같은 그러한 ‘공간’을 찾아가야 한다. 마음먹은 일들을 하고 오겠다는 목표과 집중의 시간이 없으면 결국 또 집안일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집안일이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계획한 중요한 일보다 내 눈앞에 시급한 일에만 마음을 쏟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엄마는 정말 빈틈없이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매일 해야 하는 집안일도 그때마다 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가 더디거나 할 수가 없었다. 안 하면 결국 다 내 몫의 일이다. 미루는 그 순간의 잠시의 편한 느낌을 제외하곤 좋은 점은 없다. 아이에게 필요한 장보기, 학습과 관련된 책, 옷이나 신발, 머리핀까지 수많은 잡스러운(?) 것들까지도 미리 부지런히 알아보고 찾아야 한다. 그래야 필요할 때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칠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지만 남들보다 잘 키우고 싶었고,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짧지만 잠시 이 삶을 살아보니 엄마라는 자리는 자기 관리의 끝판왕이 요구되는 자리였다. 잘해봤자 본전이요, 수많은 일 중에 뭐 하나라도 놓치면 금방 티가 났다. 수고에 대한 격려나 인정, 보상은 거의 없었고 결과는 언제쯤 나타날지 혹은 나타나기는 하는 건지도 모른다. 고도의 자기 절제와 성찰을 통해 스스로 삶을 관리하고 성숙하게 통제해야 했다. 엄마라는 역할은 생각보다 광범위하고 많았다. 잘하면 잘하려고 할수록 더 많은 일이 생겼다. 상사도 없고 월급을 받는 일도 아닌데 그 이상으로 바쁘고 힘들었다.      


 아, 엄마는 완벽해야 하는 사람이구나. 불가능한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본인이나 주변의 기대가, 혹은 SNS를 비롯한 인터넷의 넘쳐나는 정보가 세상에는 이미 완벽해 보이는 엄마가 많이 있었고, 나도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완벽한 엄마로서의 로망(?)은 그때부터 생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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