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어를 구원해줄 슈퍼 히어로는 어디에?
무대에 오르는 연주자들을 볼 때면 온몸에 전율을 느낄 때가 있다. 이 감동은 비단 그들의 입이 떡 벌어지는 연주 기술 때문만은 아니다. 단 몇 분간의 음악을 손 끝에서 만들어내기 위해 그 간에 썼던 시간과 에너지는 실제 연주 시간의 수백 배 수천 배일 것이 분명할 것이다. 음악 학도였던 나는 단 5분의 곡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의 시간 투자와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기에 이 힘든 여정을 이겨내고 한 곡을 완성해낸 이들에게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피아노 연습을 할 때 사실 너무너무 늘지 않아서 속상했던 적이 많았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점은 일정 수준의 연습의 질과 양이 충족될 때까지 연습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시간을 연습하면 그 1시간만큼의 성과가 눈에 보이면 얼마나 좋을까. 연습을 1 하면 1 늘고 하는 식으로 향상되기는커녕 10을 들여도 20을 들여도 여전히 실력은 1에 머물러 있는 나를 보면서 "나는 영 재능이 없는 것 같다" 고 낙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리 연습해도 도대체 늘지 않는 것 같다가 어느 순간, '어! 전과 좀 다른데!' 하는 때가 온다. 갑자기 말이다. 이때를 위해, 이와 같은 향상이 가시적으로 보이는 이 순간을 위해 다시 기약 없이 연습에 시간을 쏟아붓게 된다. 이 연습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삼시 세끼, 잠에 필요한 시간도 최소한으로 만들어 시간을 쥐어짜는 것도 연습의 일부일 정도로 연습의 '절대 양 확보'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특히 몸으로 체화해야 하는 악기 연주나 운동과 같은 영역에서의 연습의 절대 양은 그 결과를 크게 좌우한다.
외국어 학습도 마찬가지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은 귀와 입을 훈련해서 해당 언어를 체화하는 운동을 배우는 것과 같기에 '연습의 절대 양'을 채워야지만 비로소 그 결과를 볼 수 있다. 100 정도의 시간이 채워져야 느는 것이 눈에 보인 다하면 90이라는 노력을 투여한 상태는 10 정도 시간을 투여한 효과와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이는 억울한 상황은 일반적인 일이다. 즉, 아무리 연습해도 시간을 들여도 늘지 않는 것 같은 '어두운 터널' 같은 시간을 꾹 참고 지나가는 뚝심이 있어야지만 향상의 단맛을 느낄 수 있다.
1을 노력해서 1이라는 성과가 눈에 보인다면 어느 누가 포기하겠는가?
Y는 영어 수업 듣기와 혼자 공부 하기 중에서 늘 갈등이다. 학원에 가자니 퇴근 후에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시간에 맞춰 학원까지 이동하다가 진이 다 빠지거나 회식에 야근에 밀려 결국 포기해 버렸다. 혼자 해보겠다고 인터넷 강의를 신청했지만 몇 번 보다가 그만두었다. 그래도 희망을 품으며 이렇게 생각한다 ”영어를 완벽하게 하는 선생님을 만나면 내 영어도 극적으로 늘게 될 거야 “
길거리의 강의 광고를 보면 이 선생님의 수업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 같은 마음이 들게 된다. 영어도 명강사의 수업을 수강하면 극적으로 늘지 않을까? 하지만 선생님의 실력이 과연 내 실력으로 연결이 되었는지는 다시 한번 냉철하게 생각해 볼 점이다.
교육 효과에서 강사의 역할에 대해 다룬 흥미로운 연구가 있다. 학생을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눈 후 서로 다른 비디오 강의를 듣게 했다. 한 집단에게는 재미있는 강연을, 다른 그룹에게는 딱딱하고 재미없는 강의를 보여주었다. 그 후 강의가 얼마나 재미 있었지 얼마나 많은 내용을 기억할 수 있는지를 측정했다. 결과는 예상을 뒤엎었다. 재미있는 강연자의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수업의 학생들보다 더 많은 내용을 기억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실제로는 두 집단의 학생들이 기억하는 양이 별 차이가 없었다.
강의가 재미있으나 그렇지 않으나 학습자가 기억하는 양에서 차이가 없는 이유는 분명하고 간단하다. 학습자가 스스로 배운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드는’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습할 기회를 얻은 후 교육 효과의 수준은 두 집단 모두 무려 1.7배나 높아졌고 강의가 재미있으나 없으나에 따라 학습결과의 차이가 없었다.
특히 언어나 운동과 같이 몸으로 배워야만 느는 분야는 강사의 역할이 더욱 반감된다. 만약 김연아 선수가 스케이트 하는 법을 수백 번 바라만 보고 있었다면 그토록 완벽한 턴을 할 수 있었을까? 일방적인 가르침보다 몸으로 직접 뛰어들어 연습하는 효과로 결과가 좌우되는 것이 운동과 언어 학습의 큰 공통점이다. 학원에 다녔던 경험을 떠올려 보자. 영어가 완벽한 원어민 선생님께서 내 영어의 실수를 고쳐 주셨다 해도 나는 여전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지 않는가. 지적받는 것으로, 내용을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것만으로는 무언가 한참 부족하다.
언어 습득과 운동, 그리고 악기를 배우는 과정은 공통점이 많다. 그중 중요한 하나는 향상을 위해서 반드시 스스로 해야만 하는 분량이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명 코치를 만나도 몸을 움직여 익히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있는 자신만이 채워야만 하는 '훈련의 몫' 이 있다. 모국어를 배울 때의 여정을 떠올려 보자. 처음 말을 배울 때는 부모님께서 단어를 일러주시고, 문장을 반복해서 말해주며 실수를 바로잡아 주신다. 하지만 이 과정은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이다. 단어를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라도 따라서 말하고, 문맥에 맞지 않는 말이라도 일단 사용하고 본다. 가르쳐 주는 이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배우는 입장의 사람도 그에 상응하는 노력, 즉 소리 내 써먹는 훈련, 을 거쳐야 하는 일은 당연하다. "아빠가 뚱뚱해요."를 제대로 발음 내지 못해도 ”아바 뚠뚠 해요 “라고 말하는 단계, 즉 내 몸을 움직여 훈련하는 여정은 피할 수 없는 길이다.
그러다 아이가 더 크면 스스로 책을 읽고 대화를 하고, TV 영화 등 다양한 자극을 통해 스스로 언어 학습을 해 나간다. 언제까지고 부모님이 붙어서 일일이 지적하거나 수정하지는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독립적인 학습자가 되어 가는 과정이다. 10년씩 부모님께 모국어를 배우는 것이 이상해 보인다면 영어 학원을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의 원리이다. 초반에는 부모님과 같은 코치가 필요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학습자는 독립적으로 익혀갈 수 있어야 함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언어 학습에서 향상이 가능하려면 학습자가 학습의 주인공이어야 한다. '선생님은 다 알고 나는 모르니 알아서 나를 고쳐 놓으세요'와 같이 가르치는 사람이 "나를 구원하리라"와 같은 접근으로는 늘 남의 영어만 구경하러 다니는 신세일 수밖에 없다. 선생님의 역할은 중요하다. 단, 일방적인 정보전달이 아닌 갈 길을 구체적으로 일러주는 ”안내자“ 이자 훈련 방법과 과정을 함께해 주는 ‘코치’ 로서 말이다. 이끌어주는 교사는 학습자의 어려움을 진단하고 구체적은 훈련 방법을 일러줄 수 있어야 하고, 학습자는 이를 꾸준히 실행에 옮기는 이 두 가지 박자가 맞아야만 향상이 가능하다. 운동선수와 코치와의 관계와 같이 말이다. 축구를 처음 시작하는 이는 코치의 도움을 받아야 빠르게 실력을 늘려갈 수 있고, 또 이는 선수 본인이 몸을 움직여 훈련 내용을 체화해 나가는 "절대적인 훈련양" 이 뒤따라야지만 가능하다.
FSI에 따르면 미국인이 우리말을 하려면 약 2,500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고 한다. 거꾸로 뒤집어 보면 한국인이 영어를 하기 위해서도 적어도 이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간을 어떤 활동으로 채우느냐에 있다. 이 시간은 순수히 내귀와 내 입으로 말하는 집중 연습 시간이다. 수업을 “구경한 시간” 사지선다 문제를 “단순 찍기” 한 시간은 몸으로 배우는 언어 학습의 조건을 온전히 충족하지 못한다. 아무리 아는 것 같은 단어도, 아무리 글로 보면 쉬운 문장도 막상 쓸 때가 되면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 것은 우리가 영어를 공부했다고 믿는 시간이 실제 훈련 시간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된다. 일방적으로 구경하는 것으로는 아! 그렇구나 정도의 자기만족은 될 수 있으나, 결국 내가 말하는 훈련 과정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듣고 말하고 싶다면 내가 지금 당장 오늘 영어를 듣고 말한 시간을 헤아려보자. 학원에만 ‘다니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그저 내 마음에 뭔가를 했다는 ‘자기만족’의 느낌을 줄 뿐이다. 학원을 다니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얼마나 평소에 떠올려 보았는지, 얼마나 내 입으로 말해 보았는지 자문해 보자. 영어를 “혼자” 즉, 내 몸을 움직여서 하지 않는다면 결코 늘 수 없다. 내 목표는 원어민인데 정작 내가 듣고 말하는 시간은 하루에 5분도 되지 않는다면 카네기 홀에 피아노를 연주하기를 바라면서 피아노 앞에 앉는 시간이 채 5분이 안 되는 것과 같다.
" 정말 시간이 없고요. 원어민 친구도 없어서 듣고 말할 상황이 안 돼요. "
충분히 그 마음을 이해한다.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느새 잘 시간이 되어 버리는 일상을 매일 반복하면 주말에는 늘어져 버리기 십상이다. 영어를 늘려 가는 방법을 연구하고 전하면서 그 내용을 실행하고 싶으나 실행 부분이 정말 어렵다고 털어놓는 분들을 많이 만났다.
사람마다 목표로 하는 지점이 다르겠지만 영어로 자신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기까지 통상 2,500 시간 정도는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일주일에 2시간 영어학원을 다니는 것으로는 이 임계점에 미치기에 너무 긴 시간이 소요될 뿐더러 그나마 2시간 중 실제 내 귀와 입이 "훈련한" 시간은 이에 훨씬 못 미치기 쉽다.
희망이 있다. 시간 부족에 허덕이는 직장인에게도 말이다. 바로 언어 훈련은 특정한 장소에 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디에서든 가능하다. 내 귀를 열고 내 입을 움직이는 일은 악기 연습과 같이 특정한 장소와 시설이 필요하지는 않다. 단 2분으로 시작하는 것은 어떤가? 출근길에 2분 점심시간에 2분, 오후 쉬는 시간에 2분, 퇴근 시간 2분, 자기 전에 2분. 가능하지 않을까? 영독 소에서 제공하고 있는 1일 1 생 영어 영상은 단 2분을 넘지 않는다. 2분짜리 영화 예고편에 등장하는 생영어를 귀와 입으로 반복하여 훈련할 수 있는 바른 습관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냥 흘러가버릴 수 있는 시간을 잡아서 내 실력으로, 영어 독립의 글 길에 꾸준히 투자해 가시는 분들 계시다.
아무것도 아닌 2분의 시간이 20분이 되고 2시간 그리고 2500 시간이 되어 나에게 선사할 자유는 이루 설명할 수가 없다. 시간의 복리의 마법을 누릴 것인가 체력만 소진해 가며 몸만 학원을 오갈 것인가는 철저히 자신의 몫이다.
이렇게 하면 느나요?라고 재기보다 그 시간에 한 문장이라도 더 내 귀로 듣고 내 입으로 말하는 것이 낫다.
너무 안 늘어요 로 한탄하기보다는 그 임계점이 올 때까지 꾸준히 더 양을 부어 넣어야 한다.
성인일수록, 시간이 없을수록, 막연히 하고 싶다는 ‘소망’을 넘어선 ‘간절함’이나 ‘다급함’ 이 필요하다. 영어를 잘하면 참 좋겠다 정도의 바람으로는 바쁜 일상의 틈 사이로 영어가 들어갈 여지가 생기질 않는다. 사실 성인에게 매달림에 가까운 "간절함"이나 "재미"가 없다면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굳이 영어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질 좋은 방법으로 세월을 아낄 수는 있어도, 투여 시간이 제로인 내용이 저절로 느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움직여야만 한다. 단 2분의 조각 시간을 붙들어야만 가능하다. 물론 2분만으로 영어가 능통하게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무시할 만큼 작은 시간으로 좋은 방법을 '일단' 시작하는 것과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나무 아래에서 입만 벌리고 있는 것 간의 차이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영어를 완벽하게 하는 하버드 대학의 영문과 교수를 내 선생님으로 모셔도 내가 시간을 내어 내 귀와 입을 훈련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결국 내가 실천해 나가지 않으면 남의 영어 일 뿐이다.
* 참고문헌
신병철의 Biz-Library
스타강사가 가르치면 정말 교육 효과가 좋을까?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는 한국인의 영어 독립을 꿈꿉니다. '세월을 아끼는 영어 학습법' 나누며 한국인이 영어에 사용당하지 않고 영어를. 도구로 자유로이 활용하는 길을 함께 합니다.
"말"보다 먼저 배워야 할 것 - 이 다음 칼럼으로 이어집니다.
영어독립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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