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첫인상
밴쿠버는 왠지 모르게 안정감을 주는 도시였다. 아마 뒤에서 든든하게 도시를 받쳐주는 노스 쇼어 산맥과 앞에서 도시의 모습을 ‘보아라!’ 하고 자랑하듯 비추는 태평양 때문이 아닐까. 이 곳의 조상은 사실 한국인이 아니었을까 의심될 정도로 밴쿠버는 '배산임수'의 표본이었다.
한 편 밴쿠버만의 독특한 지형에 비해 다운타운은 전형적인 북미 도시의 모습이었다. 분명 처음 봤는데 왠지 낯익은 인상의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밴쿠버 시내는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이미 전에 와본 듯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단지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좀 더 낮은 예산으로 미국 대도시 느낌을 낼 수 있기에 실제로 시애틀이나 뉴욕 배경의 할리우드 영화를 자주 찍는다고 한다.
시내에서 바로 관광명소인 가스 타운으로 향했다. ‘가스 타운’ 이름의 유래는 밴쿠버 정착민 존 데이턴의 별명 ‘가스쟁이 잭 (Gassy Jack)’에서 왔다고 한다. 아무래도 ‘장이 안 좋은 분이었나’하고 상상하게 되는 별명이다.
이름의 뉘앙스와는 달리 멋진 동네였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앵두 전구가 주렁주렁 매달린 가로등 덕에 야외 파티장 분위기가 났다. 기념품 가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가게 쇼윈도 너머로 원주민들이 타고 다니던 전통 카누 나무배 모양 진열장과 C-A-N-A-D-A가 대문짝만 하게 프린트된 원색의 맨투맨을 입은 마네킹 등 캐나다 대표 기념품이 보였다. 뭐니 뭐니 해도 이들 중 제일 마음에 든 건 차렷 자세로 매장을 지키는 곰인형이었다.
가스 타운 중심지에는 이 곳 명물인 수증기 시계가 마을을 지키는 장승처럼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런던의 빅벤처럼 웅장한 시계탑은 아니지만 대신 매시간 정각에 시계 머리에서 수증기가 나오는 점이 독특하다.
하마터면 이런 게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칠뻔했는데 지나치려는 찰나 뭉게뭉게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가 나를 멈춰 세웠다.
딩~동~댕~동 딩~동~댕~동~
수증기와 더불어 차임벨까지 울려 퍼졌다. 이쯤 되면 가던 길을 멈추고 구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빅벤과 똑같이 웨스트민스터 멜로디를 연주했는데 경건한 종소리 대신 수증기 시계답게 물이 끓는 주전자에서 나오는 빼-엑 소리를 내었다.
낮에는 이 광경을 보려고 정각마다 관광객이 몰려든다고 한다. 오늘 밤에는 정말 운 좋게도 이 뷰를 독차지했던 것이었다. 계획에도 없었는데! 아니, 계획에도 없었다는 바로 그 점이 나를 더 들뜨게 했다. 마치 보너스 서비스를 받는 기분이었달까. 여행을 하면서 운 좋게 뜻밖에 무언가를 경험하게 될 때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 거다.
사진을 찍을 새도 없이 수증기는 곧바로 깜깜한 밤하늘 위로 사라졌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하지만 이 깜짝 선물은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것이다. 이 도시의 명물이 앞장서서 나의 도착을 직접 환영해 주었으니까. 앞으로 남은 밴쿠버에서의 시간이 기대가 되었다.